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소재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처음으로 창건을 한 절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실상사는, 이미 그 역사가 1,200년 가까이 된 고찰이다. 실상사는 홍척스님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실상사에는 옛 실상산문답게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보물 제35호인 석등은 실상사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등으로 장명등이라고도 부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화사석을 받치는 받침돌, 그리고 화사석을 덮는 지붕돌로 구분을 한다. 그런데 이 실상사 석등은 팔각기둥의 전형적인 간주석과는 달리, 장구의 형태인 고복형 간주석을 지닌 석등이다.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

받침돌의 고복형 간주석, 석조미가 일품

실상사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 밑으로 3단의 받침을 쌓고 있다. 받침부분은 모두 3단으로 구성을 했는데, 아래받침돌과 위덮개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아래받침돌과 위덮개돌의 귀퉁이에 조각한 귀꽃이 색다른 석등이다. 지대석은 밑에 팔각의 넓은 돌을 놓고 그 위에 안상을 새긴 팔각의 돌을 올려놓았다.

지대석 위에는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귀꽃 위로는 두 장의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다. 중간 받침돌은 일반적인 팔각형이 아닌, 장고통과 같은 형태로 둥글게 조각한 간주석을 놓아 특이하다. 간주석에도 띠를 둘러 앙련을 조각하였으며, 위에 연결된 조각은 흡사 네 잎 크로버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어 색다른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장구통처럼 생긴 간주석과(위) 기단부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에도 두 장의 커다란 앙련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 큰 규모로 조형이 되어, 석조계단을 조성해 놓고, 그 위로 올라가 불을 붙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집혀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아름답게 조형이 되었다.

화사석과 머릿돌도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어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화사석의 창을 보면 한 면은 크고, 남은 면은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불을 붙이는 창을 크게 낸 듯하다. 창 하나를 내면서도 조금 더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듯하다. 화사석 위의 덮개석인 지붕돌은 날렵하게 경사가 졌는데, 팔각면의 끝에도 귀꽃이 자리하고 있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실상사 석등의 간주석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형태로 팔작지붕의 날렵함을 지녔다. 그리고 돌출된 꽃모양인 귀꽃을 조각하여 멋을 더했다. 덮개석 위에 얹은 머리장식은 화려한 무늬를 새겼으며, 이 머리장식에도 화려한 무늬와 함께 귀꽃을 조각해 붙였다. 실상사 석등은 받침돌, 덮개석, 머리장식이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모두 귀꽃을 놓아 뛰어난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사대의 뛰어난 석조미술품

이러한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형태이다. 실상사 석등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다양한 석조물 조형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원형 그대로를 거의 보존하고 있는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 벌써 천년 세월을 서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화사석과 귀꽃(가운데) 그리고 머리장식

아마 실상사 일원이 사적 제209호(백장암과 약수암을 포함)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뿌리는 비에 몸을 적셔가면서도 답사를 그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 때문이다. 실상사 답사를 하면서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 전통문화가 우리를 살찌울 수 있는 자본’이란 생각이다.

장승은 많은 이름이 전한다. 장승, 장생, 장성, 수살, 수살목, 돌하루방, 벅시, 벅수 등 지역마다 그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긴다, 마을 입구에 선 장승은 나무나 돌을 깎아 마을 입구에 솟대나 돌탑과 함께 세우지만, 장승만을 별도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

원래 장승은 절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경게표시를 하는 표시장승이 시초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마을을 지키는 수호장승의 역할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장승의 역할은 표시장승, 수호장승, 그리고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 등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장승의 복판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 기본적인 대장군이 가장 많지만, 동방청제축귀대장군, 상원주장군 등 마을마다 각기 특징적으로 적기도 한다.



내를 건너 좌측에 서 있는 석장승. 왕방을 눈에 주먹코가 해학적이다.

모두 남자뿐인 실상사 장승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소재한 실상사. 실상사 경내를 들어가려면 작은 내 하나를 건너게 된다. 그런데 이 내를 건너기 전에 좌측을 보면 석장승 한 기가 서있다. 이 장승은 다리를 건너면 좌우에 또 한 기씩의 석장승이 서 있다. 원래는 다리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에 두 기씩 모두 네 기의 장승이 서 있었으나, 1936년 홍수에 한 기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장승은 일반적으로 남녀 한 쌍을 세우거나, 남녀를 구분해 양편에 집단으로 세운다. 그러나 실상사 석장승은 모두 남자이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눈은 왕방울 눈이 튀어나왔다. 입에는 양편에 송곳니가 솟아나오고, 코는 주먹코가 얼굴에 비해 커다랗게 표현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절을 지키는 장승이라기 보기에는 해학적이다.



내를 건너 우측에 선 장승. 건너편에 있는 장승과 길을 사이에 마주한다.

300년 전에 절의 수호를 위해 세운 장승군

절 입구에 세우는 장승은 신성한 지역을 알리기 위한 표시장승이다. 즉 이곳서부터는 절의 경내이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표시장승이라고 보기보다는 수호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가 평지에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내가 있어 물과 불 등에서 실상사를 지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실상사 석장승은 장승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조선조 영조 1년인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300년이 다 되어가는 장승들이다. 사방에 세운 장승의 형태는 거의가 같은 모습이다. 한 기가 없어져 버린 실상사 장승은 절을 수호하는 험상궂은 장승이기 보다는, 해학적인 모습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 생긴 모습이 재미있다. 세 기가 남은 석장승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이 되었다.


짝을 홍수에 잃은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에 있는 장승
 
볼수록 웃음이 나와

땅위로 솟은 장승의 높이는 2.5m ~ 2.9m 정도이다. 너비는 40~50cm 정도이며 모두 남장승으로 비슷한 형태로 조각이 되었다. 모자 밑으로는 불거진 이마가 있고, 눈은 왕방울 눈이다. 양편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코는 커다란 주먹코인데 코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다. 그 밑으로는 금방이라도 이를 보이며 웃을 것만 같은 입이, 일자로 표현되었다. 두 기의 장승은 송곳니가 보인다.

중요민속자료 제15호인 실상사 석장승. 비가 오는 지난 11월 27일에 찾은 석장승은 한기가 홍수에 떠내려가서인가, 조금은 한편이 빈 것처럼 허전히다. 실상사를 찾을 때마다 보는 장승이지만,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아마 그 해학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이 석장승이 절을 지키는 수호장승이라고 한다면, 그 모습 속에는 어느 맘씨 좋은 절집의 불목하니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따스함과 웃음이 배어있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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