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이 넘는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비 한기.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에 소재한 국보 제8호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신라시대인 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비를 만난 것은 106일이다.

 

낭혜화상은 신라 무열왕의 8세손이다. 신라 애장왕 2년인 801년에 태어나,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인 845년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중요한 신라역사를 알 수 있는 탑비

 

무염이 이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 뒤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무염이 진성여왕 2년인 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려주었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다. 비 몸돌에 새겨진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인 890년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를 세운지 벌써 1,123년이나 되었다.

 

 

이 비에 적힌 기록을 보면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이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 자료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비는 성주사 절터 서북쪽에 세워져 있는데,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다양한 문양과 힘 있게 조성한 탑비

 

6, 12일의 보령시로 답사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성주사지이다.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고 성주사지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바로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 탑비이다.

 

 

벌써 몇 번째 찾아 본 낭혜화상 탑비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그만큼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탑비는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다. 받침돌인 귀부는 머리의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다. 귀두 부분이 깨어진 부분이 있어 전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통일신라시대 탑비의 백미

 

귀부의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인 문양을 새기고, 중앙에는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는데, 안상을 파고 그 안에 꽃을 새여 넣었다. 귀부 위에 올린 비몸은 앞면에는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린 머릿돌인 이수는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앞으로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문화재답사는 문화재와 함께 호흡을 하고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내어 찾아가야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낭혜화상 탑비.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로 조성한 이 탑비는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백미로 꼽힌다. 모처럼 찾아가 만난 그 탑비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의 입구나 혹은 사찰 입구에 보면, 부릅뜬 눈에 왕방을 코, 그리고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 어째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있다. 흔히 장승이라 부르는 이 신표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장승, 장성, 장신, 벅수, 벅시, 돌하루방. 수살이, 수살목, 수살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장승은 나무나 돌을 조형 해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기록에 보인 장승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정확하지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 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보물 제157호인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는 이미 장승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표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장승은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 등에 세운 공공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까지도 마을에서는 장승을 신표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곳이 상당수가 있으며, 옛 지명 중에 ‘장승백이’나 ‘수살목’ 등은 모두 장승이 서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기능을 갖는 장승

 

장승은 설화나 속담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하다는 것이다. 장승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여 도둑을 잡았다거나. 판소리 변강쇠타령 등에 보이는 장승에 대한 이야기는, 장승이 민초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척 장승같다’거나 ‘벅수같이 서 있다’ 등은 모두 장승의 형태를 빗대어 하는 속담 등이다.

 

 

장승의 기능은 경계표시장승, 로표장승과 비보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승의 기능은 대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경계표시 장승은 사찰 등의 입구에 세워, 잡귀들의 출입을 막고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로표장승은 길목에 세워, 길의 안내를 하는 기능을 갖는 장승을 말한다. 비보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마을로 드는 재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장승나라 청양, '장승무덤'도 있네.

 

청양군 대치면 장곡사 입구에는 장승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장승공원은 칠갑산 주변 마을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10여 개 마을에서 지내오는 장승제로 인해, 1999년 칠갑산 장승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조성한 전국 최대의 장승공원이다. 칠갑산 주변에는 대치리 한터마을을 비롯하여, 이화리, 대치리, 농소리, 정산면 용두리, 송학리, 천장리, 해남리, 대박리, 운곡면 위라리, 신대리 등에서 장승제가 전해지고 있다.

 

 

장승공원 안에는 장승체험관을 비롯하여 전국 최대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청양 마을의 장승과 각 지역별 장승, 시대별 장승, 창작 장승, 외국의 장승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약 300기가 넘는 장승공원에 서 잇는 장승들은, 그 수명을 다해 쓰러지면 ‘장승무덤’에 갖다가 놓는다.

 

이 많은 장승들, 비오는 날 더 괴이하네.

 

7월 14일 비가 쏟아지는 장마에 장곡사를 둘러보고 난 후, 장승공원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들고 작은 카메라를 지참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비가 심하게 내리니 장승공원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편안하게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서 있는 장승들을 만나본다.

 

 

왕방울 눈에 매부리 코, 듬성듬성한 이빨을 보이며 희죽이 웃고 있는 장승. 그런가하면 새치름한 표정으로 비가 싫다는 듯 눈썹이 치켜 올라간 장승도 보인다. 허리가 휘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장승이 있는가 하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웃음보를 터트릴 것만 같은 장승도 보인다.

 

장승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별별 장승이 다 있다. 그 많은 장승들이 하나같이 모습들이 다 다르다. 장승은 깎는 사람의 모습과 마음을 닮는다고 했던가? 아마도 이 장승을 조성한 작가들의 심성이란 생각이다. 우중에 돌아 본 청양의 장승공원. 속으로 되놰 본다.

“이 많은 장승들이 서 있는데 청양에 무슨 일이 있겠어?”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126-1에 소재한 각화사는 신라 때 최초로 건립이 된 절이다. 현재 각화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인 ‘화사 각화사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부도는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비 받침인 각화사 귀부는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는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덥혀 있고, 그 안에 ‘王’자와 ‘佛’자를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대체로 조각의 수법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효대사가 창건 한 각화사

 

각화사는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고려 예종 때 계응이 중건하였으며, 1926년에 달현이 중수하였다. 영주-봉화-울진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의 봉화 동쪽 방향 21km 지점인 춘양삼거리에서, 998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9km 정도를 가면 각화사 입구가 나온다. 각화사는 이 입구에서 2km쯤 올라가면 된다.

 

각화사는 원래 춘양고교 교정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사찰의 명칭도 남화사였다고 한다. 이 절을 새로 옮겨 지으면서 각화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화사에는 한때 800여명의 승려가 거주하였으며,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각화사는 조선시대에는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태백산 사고는 선조 39년인 1606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왔다.

 

 

균형미를 잃어 안타까워

 

현재 각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이다. 이 각화사 절 입구 오른족애 놓인 비 받침돌이다. 이 각화사 귀부는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한 마디로 균형미가 갖춰지지 않은 고려 때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각화사 귀부는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이 귀부에 비의 몸돌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오히려 그렇게 후에 제작해 올린 비문과 머릿돌로 인해 중요한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까 보아 걱정스럽다. 각화사 귀부는 폭은 190cm에 높이는 92cm이다.

 

30년 세월 만나본 문화재, 하지만 난 아직 초보자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다. 그간 숱하게 많은 문화재를 만났고, 그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썼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아마 이제 겨우 발걸음을 땐 초보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문화재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가 문화재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깨달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들이다. 혼자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워,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하겠다고 쓰기 시작한 기사가 꽤나 쌓였다. 그러나 아직 돌아볼 문화재가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한 마디로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한 가지 원이 있다면, 이제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문화재를 찾아보고 글을 쓰는 데만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아플 뿐이다. 소중한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개와 땀을 흘리며 찾아보기. 정말 누군가 이 일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장수군 천천면 비룡리 38번지에 소재하는 신광사. 42일 토요일 오후, 장수에서 726번 지방도를 타고 천천면 소재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도로변에 성수산 기슭에 자리한 신광사라는 절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탑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가 절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판을 따라 좌측으로 접어들면, 신광사로 들어갈 수가 있다.

 

신광사는 신라 흥덕왕 5년인 831년에 무염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조 헌종 14년인 1848년에, 당시 장수현감인 조능하에 의해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도 운장스님의 노력이 함께 했다고 하지만, 현감에 의해서 사찰이 중창이 된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 신광사에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대웅전아 있다. 이 대웅전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너새기와를 올린 대웅전이라니

 

너새기와란 몇 가지 뜻이 있다. 우선은 측면에 대는 박공 옆에 직각으로 대는 암키와를 너새기와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지붕을 이을 때 사용하는 얇은 조각의 돌기와를 말하기도 한다. 이 신광사 대웅전에서 말하는 너새기와는 지붕을 얹은 얇은 돌로 된 기와를 말하는 것이다.

 

신광사를 찾아 문화재 안내판을 찾아보니 대웅전 앞에 서 있다. 대웅전이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설명에 너새기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와인줄을 모르고 있다가,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정말로 너와로 지붕을 올렸다. 어떻게 절집 대웅전지붕을 돌을 얇게 편을 떠 만든 너와로 올린 것일까?

 

 

특이한 형태의 신광사 대웅전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은 모두 얇은 돌로 만든 너와로 덮었고, 맨 위 부분만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건물의 양 끝이 처져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의 끝을 위로 약간 올렸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무게를 받치는 있는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축대를 쌓은 중앙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다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지었다. 대웅전의 기둥 받침인 주추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했으며,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주심포 사이의 벽에는 딴 곳에서 흔히 보이는 비천상이나 보살상이 아닌, 특이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창호도 정면 세 칸 중 가운데 칸은 두 짝 미닫이로 빗살문이며, 양쪽 칸은 두 짝 미닫이로 아()자형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협시보살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수행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모셨다. 대웅전 천정과 마루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천정의 문양은 대단히 화려하게 그려 넣었다.

 

돌담이 아름다운 신광사

 

신광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멘트나 흙을 사용하지 않고 쌓은 돌담이다. 경내를 둘러싼 돌담은 높이가 1m 50cm 정도가 된다, 반듯하게 쌓은 돌담이 아름답다. 어떻게 흙조차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반듯하게 돌담을 쌓았을까? 그렇게 쌓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였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 더 궁금한 것은 대웅전의 너새기와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너새기와를 올렸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너새기와로 대웅전 지붕을 올렸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이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광사는 신라시대 처음으로 지어진 후, 고려를 거쳐 조선조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조 27년인 1649년에 천혜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한다.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신경준의 가람고, 조선 정조 3년인 1779년에 우리나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 소재지, 연혁 따위를 적어서 펴낸 책인범우고등에도 신광사의 명칭이 보인다.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이 언제부터 너새기와를 올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우리나라 절중에 이렇게 대웅전 기와를 편돌인 너새기와로 올린 곳은 유일한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광사는 깨끗하게 정리가 된 경내. 반듯하게 쌓여진 돌담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절이다.

 

문수사에는 문수보살을 모신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협시보살로 최고의 지혜를 갖고 잇는 보살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인격화한 보살이라고 하여, 문수보살을 대지(大智)보살이라고도 한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문수사는 우리나라의 많은 절 중 오대산 상원사, 춘천 청평사, 삼각산과 김포의 문수암, 울산 문주사 등과 함께 문수보살을 모신 절 중 한 곳이다.

 


 


  
익산 문수사의 극락전은 1994년에 새로 지었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이후의 연혁은 알 수가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 중건한 바 있다. 그 후 몇 차례 중건한 문수사는 백운암과 백련암의 부속 암자를 두고 있다. 천호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관세음보살 등 3대 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문수사는 문수보살, 백운암은 보현보살, 백련암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셔 왔다고 전해진다.

 


산신각은
  
1994년까지만 해도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나무의 단풍. 매년 이렇게 아름답게 물이 든다고 한다


  
아름답게 그려진 단청이 눈길을 끈다

 

가을 날 찾은 문수사는 비구니 절들이 그러하듯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대웅전이 극락전 앞에 선 나무는 반홍반황(半紅半黃)의 색을 띠고 있어 아름답다. 극락전 뒤에 선 삼성각은 1994년까지는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1994년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천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한 곳 흐트러짐이 없이 정리가 되어 있는 절. 장독대는 얼마나 닦아댔는지 윤이 반지르르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을이 깊었음을 알린다. 요사 뒤에 있는 모과나무에는 튼실한 모과들이 달렸다. 그저 밑에만 가 있어도 모과냄새가 코를 간질일 듯하다.


  
문수사 요사 뒤에 모과나무에는 모과들이 참 많이도 달렸다


  
깨끗히 정리된 장독이 윤이 난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고 하는 문수사. 현재는 김제 금산사의 말사로 되어 있는 문수사의 가을은 또 하나의 정취를 지니고 있다. 어디를 가나 아름다움이 한 가지씩은 있다는 절집들. 문수사의 가을은 극락전 앞에 선 아름답게 물든 단풍에서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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