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를 내려가도 100년이다. 그런 대물림도 대단하다고 하는데, 자그마치 4대를 대물림을 하면서 집안으로 전승이 된 음률을 지켜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피리 시나위 남양제는 옛 수원군 남양면의 한 귀퉁이에서 그렇게 전승이 되었다. 어림잡아 100년이 훨씬 지나도록 가계로 전승이 된 것이다.

 

예전에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장자만자용자를 쓰시는 분이십니다. 피리 시나위 남양제의 창시자라고 보아야죠. 그 시나위 제를 할아버님인 장자점자학자를 쓰시는 분이 이어받으셨고, 다시 아버님이신 장자유자순자를 쓰시는 분이 전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나위의 본가락이 바로 경기도당굿 전수조교였던 고 방돌근 선생에게 전해진 것이죠.”

 

 

7일 오후 인계동 한 연습실에서 만난 장영근 명인. 직접 부친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다니면서 남양제 피리 시나위를 익힌 고 방돌근 선생에게서 시나위 가락을 익혔으니 대물림을 했다고 해도 허언은 아니다. 그렇게 4대를 이어오면서 남양제 시나위를 지켜냈다.

 

재인청의 산이들 뛰어난 기량으로 민속음악 지켜

 

우리의 음악은 궁중악인 아악과 민초들의 민속음악으로 크게 구분을 짓는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연주하고 즐겨듣는 것은 역시 민속음악이다. 민속음악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악기를 다루는 시나위류의 음악은 대개가 수원을 비록한 화성, 오산, 평택, 광주 등지에서 창출이 되고 전승이 되었다.

 

조선조 말기에 130여 년간 존속이 되어왔던 재인청(才人廳)에는 수많은 기능인들이 속해 잇었다. 그 중에서도 악기를 다루는 산이들의 기능을 뛰어났다. 경기도의 무속음악은 한수이북과 한수이남 지역이 조금씩 다른 특성을 보이며 전승이 되어왔는데, 흔히 남양제(南陽制=현 화성군 남양면에서 발생한 음악)와 광주제(廣州制=광주 출신 피리의 명인 이충선의 가락을 전수 받은 律制), 그리고 평택을 기점으로 한 동령제(東嶺制=대금의 명인 방화준의 율제)로 구분이 되고 있다.

 

 

여기에 해금의 명인으로 한때 무형문화재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던 지영희의 안산제(安山制)가 더해진다. 이 중 광주제는 이충선에 의해서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전승이 되고 있으며, 지영희의 안산제는 국악예술학교에서 후학들에게 전해져 한 류파를 이루며 전승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안산제나 광주제는 본래의 경기도 무속음악인 시나위의 형태는 사라지고, 정형화된 산조의 기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남양제만이 경기 무속음악에서 시나위로서의 기능을 지니며 남양출신 산이인 장유순의 가계로 전해지다가 전 경기도당굿의 전수교육조교이며 동령제의 기능인인 방화준의 손자 고 방돌근에게로 전해져 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동령제는 김광채에게로 전해졌다가 그 맥이 끊겨서 기실 전통 경기도의 무속음악에서 나타나던 경기시나위의 맥은 남양제만이 전승이 되고 있을 뿐이다.

 

4대째 시나위 맥을 이어가는 장영근 명인

 

저희 아버님은 일 년이면 한 5일이나 집에 계셨어요. 당시는 조금앵, 임춘앵, 김진진 등 국극단체들과 함께 전국을 유랑하실 때라 거의 뵐 수가 없었죠, 어머니께서는 우자정자옥자를 쓰셨는데 전 경기도당굿 보유자셨던 고 오수복 선생님께 같은 급의 대만신이셨어요. 그러니 자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악기 등에 취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죠.”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무속 음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에서 워낙 반대가 심해 21세 때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가서 5년 정도 택시운전을 수원으로 다시 내려와 버스 운전을 3년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굿판으로 돌아왔다.

 

 

“2006년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전수조교로 지정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직도 화랭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많은 아픔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인가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그렇게 즐겨하는 편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과거의 아픔 대문이겠죠.”

 

우리 민속악계에서는 손 꼽을만한 대단한 부모님을 두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늘 마음 한 구석을 누르고 있던 만신과 화랭이의 자식이라는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런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언젠가 자신이 부친의 뒤를 이어 당당히 보유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 그런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4100년 이상을 이어 온 남양제 시나위, 이제 장영근 명인 그 대에서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기를 기대해 본다. (자료사진은 장영근님의 것을 인용했습니다)

방돌근, 그는 갔어도 장단, 피리소리 생생히 남아

 

경기도의 소리를 보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많은 풍류의 소리들이 있어 우리는 경기소리를 이야기할 때, 한 가지만을 들어서 이것이 경기도의 소리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경기도에서 경기인들에 의해 창출된 많은 소리들은 각기 그 특징이 있다. 경상도의 소리가 남성적이고 투박하며, 전라도의 소리가 여성적이고 섬세한 면이 있고 한을 표출한다고 한다.

 

경기도의 소리는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라도의 소리처럼 구슬픈 한을 갖지는 않는다. 한을 표현할 때도 어찌 보면 한의 소리 같지 않은 가운데 진한 한을 표현한다. 하기에 사람들은 경기도의 소리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소리가 있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경기도당굿은 그 안에 많은 소리가 있다. 도당굿에서 나타나는 소리는 흔히 경기, 충청간의 판소리인 중고제(中高制)의 음률로 되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소리가 생긴 내력으로 본다면 중고제가 경기도의 굿 소리를 인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의 창출이 무가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도에서 불리는 무가에 중고제의 원형이 경기도의 굿에 있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불러지는 소리가 바로 청배(請拜)’. 청배란 신격을 청해서 모셔온다는 뜻이다. 오니섭채라는 장단을 치면서 소리를 하는 화랭이들은, 바로 도당굿에서 춤과 소리, 음악을 담당하는 만능 예술인들이다.

 

 

굿에서 제일 먼저 부르는 소리 청배

 

도포를 입고 갓을 정갈하게 쓰고 장단을 치면서 하는 소리, 청배는 각 부분의 첫머리에 불려진다. 이는 가계로 전해지는 기, 예능을 전수받은 세습계열의 화랭이들은 강신이 되지 않으므로, 먼저 그 거리의 신격들을 청원 해 굿청에서 흠향을 하도록 소리로 모셔드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경기도당굿에서 청배는 매우 중요한 부분에 속하고, 그 소리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흔히 청배는 부정청배, 시루청배, 제석청배, 군웅청배 등이 불러지고 있다.

 

공심은 제례주요 남산이 본이로구나

집터를 골라 잡으시니 삼십상천 서른 지어내려

허궁천 비비천 삼하도리천 열시왕을 마련하고

청개 여자하고 지벽이 여축하여

산천에 올라 좌우를 살펴보니 일월성신이 되옵시고

중탁자 하위내려 산천초목이 되오실 때

복덕씨는 나무를 마련하시고 수인씨는 물을 마련하시고

화덕씨는 불을 마련하시고 신농씨는 농사법을 마련하실 때

높은 데는 밭을 풀고 깊은 데는 논을 풀어

구백곡식 씨를 던져 만인간 먹게 마련하실 적이로구나

 

살아생전 오직 도당굿의 전승과 보전에 애써 오신 많은 분들이 불러오던 부정청배의 한 대목이다. 그 화랭이들의 소리와 음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방돌근 선생은,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남자들이 수명이 짧은 것을 걱정한 할머니가 험한 이름을 지으면 명이 길어진다고 해서 이름을 돌근(乭根)’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경기시나위 남양제의 대가인 장유순 산생 밑에서 시나위를 익혔다. 장유순 선생의 가문은 화성시 남양면을 비롯한 인근에서 떨치던 세습무가였다.

 

장유순 선생은 아침마다 방돌근을 찾아와 당신이 갖고 있던 재주를 다 물려주었다고 한다. 큰 선생 밑에서 큰 제자가 나는 법이다. 장유순 선생에게 남양제 시나위를 물려받은 방돌근은 도대방의 가문인 오산을 근거지로 이루어진 이씨 세습무가의 마지막 화랭이라고 하는 이용우 산생에게서 그 어렵다고 하는 도당굿의 장단을 전수받았다. 당시는 꼭 장단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일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린 나이인 19세부터 이용우, 정팔봉, 오필선, 이덕만 선생 등 내로라하는 경기도 세습무가의 화랭이들 틈에서 함께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4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고 한다. 한 때는 전국을 유랑하기도 했다. 국극단을 쫓아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몸이 약해지기도 했고, 때론 힘든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피리와 장단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각 지역의 굿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시작하면서 수원으로 돌아와 다시 굿판에 섰다.

 

 

경기무속음악의 대가 방돌근 선생

 

방돌근 선생의 이야기를 쓰자고 하면 아마 석 달 열흘은 써야할 것 같다. 그만큼 이 세계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가슴은 한으로 멍이 든단다. 그 한이 소리가 되고, 그 한이 장단이 된다는 것이 선생님들의 말씀이셨다. ‘장단 잘 치고 피리 잘 부는 사람방돌근 선생을 칭하는 보편적인 용어이다. 그의 장단은 그 어렵다는 도당굿 장단을 손자락 안에서 화려하게 구사를 한다. 피리시나위를 듣다가 보면 가벼운 듯 무겁고, 무거운 듯 깊게 가라앉지를 않는다.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소리를 전수생들에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익혀주던 생전의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인 따스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장단을 알려줄 때도 선생들에게서 당신이 받은 것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정이 많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애 첫 발표회 앞두고 세상을 떠나

 

2001517. 생애 첫 발표회를 4일 앞두고 방돌근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방돌근 선생이 세상을 뜬 후 세인들은 이제 경기도의 음악은 끝났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세상을 뜨기 일 년 전부터 방돌근 선생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기량을 제자들에게 물려주었다. 날마다 집으로 불러들여 혼신을 다해 전수를 시키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갈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의 경기 시나위는 당시 제자인 김현주(, 피리. 당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부수석), 안재숙(, 해금. 당시 국악고등학교 교사), 김현숙(, 대금. 당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 김흥수(, 피리. 옛소리 국악원장)에게로 전해졌다.

/ 하주성

경기일보 · 경기문화재단 공동기획(20021229일자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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