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탑은 대개 3층 석탑, 혹은 5층석탑 등 그 층수를 앞에 붙인다. 하지만 전북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6에 소재한 금당사의 경내에 있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금당사 석탑은 그냥 앞에 층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부재들로 보아, 처음에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석탑의 기단부는 가운데돌이 없어져 다른 돌로 대신하였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형태로 남아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 놓인 상륜부의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탑으로, 제작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호국, 항일의 절 금당사

 

삼국유사 제3권 홍법조에 보면 금당사는 신라 때 처음으로 창건된 절로 전해진다. 무상, 금취 화상이 서기 650(백제 의자왕 10)에 마이산(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산, 조선개국 후에는 속금산이라 불렸다)에 열반종의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금당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이 절이 상당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말에는 나옹스님이 금당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이곳 도장굴에서 100일 기도 후,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을 혈암사라고 적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주둔지로, 승병이 패퇴함에 따라 절이 전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전봉준의 딸이 이곳 고금당에서 10여 년간 숨어 지냈으며, 1906년 윤 4월에는 호남최초의 항일의병 경사체이기도 한 장의동맹이 이곳을 진앙지로 삼았다고 한다.

 

금당사에는 보물 제1266호인 금당사 괘불탱이 전해지고 있다. 이 괘불탱은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제작한 것으로 높이 약 9m에 넓이 약 5m 정도이다. 한국의 괘불탱 중에는 유일하게 화관에 4마리의 봉황이 그려진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전북 지방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 목불좌상이 있다.

 

 

연못 가운데 서 있는 석탑

 

이 석탑은 당시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작은 형태의 석탑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석탑이 크게 파손이 되었다. 기단부도 사라져 현재는 원래의 석탑에 사용한 부재가 아닌, 딴 돌을 이용해 채워놓았다. 조선조 숙종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고쳐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금당사 석탑은, 구조나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덮개돌의 밑받침은 3층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추녀는 밋밋하게 꾸며졌다. 탑의 몸돌에도 특별한 조각이 없이, 사각형의 탑신으로 올려놓은 형태이다.

 

한 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병들의 거점으로, 승병을 키우는 곳으로,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국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금당사. 그 대웅조번 앞쪽에 오롯이 서 있는 금당사 석탑, 그 석탑은 금당사의 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무더운 날 찾아간 금당사에서 만난 석탑 한기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남원시 산곡동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은, 참으로 슬픔이 많은 산성이다. ‘교룡산성’이라는 산성 명칭은 아마도 이 산성이 물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룡산성에는 모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5월 12일,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교룡산성은 이번 답사가 두 번째였다.

산성 입구에서부터 길이 미끄럽다. 돌계단을 따라 좌우로 길게 뻗어있는 산성은 그 높이가 5~8m 정도로 단단한 석축 쌓기를 하였다. 이곳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 쌓고 있는 산성이다. 산은 그리 높지가 않지만 밀덕봉과 복덕봉 등의 봉우리를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곽으로 추정하다

교룡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빗방울이 뿌리는 가운데 천천히 교룡산성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성 입구에는 양편으로 성이 쌓여있고 가운데 계곡부분에는 끊어져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곳에 수문을 두었을 것이다. 99개나 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면, 그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성의 입구 좌우로는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 길이는 고작 200m 정도일 뿐이다. 원래 교룡산성의 전체길이는 3.1km 정도가 되는 제법 큰 성이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성곽이 남아있다고 한다. 성문으로 다가가니 반월형으로 조성한 성문이 나타난다. 안쪽으로 보니 문을 달아냈던 툴이 보인다. 그런데 한편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외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문을 달아냈던 흔적이나, 성문의 규모로 보아 아마도 암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성문은 모두 장대석을 이용해 아치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한 장의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틀을 만들었다. 성문 안으로는 비석군이 서 있다.

옹성은 후에 쌓은 듯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아놓았다. 옹성이 있다는 것은 이 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옹성은 임진왜란 당시 쌓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대장 처영이 성을 고쳐 쌓았다고 하는데, 그 때 이 옹성을 축성했으리란 생각이다. 남원은 임진왜란 때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심하게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본군이 남원성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이곳 교룡산성의 아군과 교전을 하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있는 이 문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해야 할 곳이다. 하기에 비탈이 진 성이지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옹성을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작은 문이지만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교룡산성의 슬픈 역사

비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니, 선국사가 보인다. 아마도 승병들은 이 절을 거점으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선국사는 3.1 독립만세를 주도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조사가 처음으로 출가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을 지나 좀 더 오르니 대밭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그 대밭 사이에 석비 하나가 보인다.

‘군기 터’라고 쓰여 있다. 선국사 뒤편에 이런 군기터가 있었다는 것이 승병들이 선국사를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교룡산성은 백제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서 두 번의 일본과의 교전, 그리고 나중에는 동학군의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이 산성을 방어선으로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결국 교룡산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산성이었다는 생각이다.




동학군의 지도자 김개남의 피에 젖은 역사

김개남(1853년 ~ 1894년)은 조선 말기의 전라북도 태인의 대접주이다. 전라북도에서는 전봉준 다음가는 동학의 실력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남원을 기반으로 삼고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과는 달리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전라북도의 실력자로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 때, 김개남은 처음부터 김낙삼과 김문행 등 1,300여 명의 농민군과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도를 통할하였다. 같은 해 4월 에는 고부 백산에서 농민전쟁의 본부격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한 김개남은, 전봉준을 능가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동학혁명군의 토벌 책임자인 홍계훈과 협상을 벌인 김개남은,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내주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간섭하게 되자, 다시 5 ~ 6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10월 14일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해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자신이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는 등 남원에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아마도 이때에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칭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개남은 전주 수비군 5천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다음 야산에 은신하였다. 12월 27일 매부인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태인에서 체포된 김개남. 전라감사 이도재는 그를 전주에 압송한 뒤 남원부사 이용헌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가두었다가 1895년 1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처형하였다.

처형을 당한 김개남의 수급은 한성부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농민군을 모아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던 김개남.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처형을 당하고 난 후, 서소문 밖에 목만 매달린 채 피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교룡산성의 역사는 그렇게 피의 역사로 끝이 나고, 슬픈 역사를 알리 없는 5월의 비만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19 교룡산성 동문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10여분 정도 오르면 선국사를 만나게 된다. 선국사는 통일신라 당시에 지어진 절로 알려져 있으며, 경내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대웅전이 서 있다. 이 대웅전은 교룡산성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선국사가 개창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인 180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선국사의 대웅전은 산성의 안에 비탈진 곳에 절을 마련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앉혔으며, 지금은 한창 전각을 짓느라 부산한 모습이다.



퇴락한 단청에 숨은 화려함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대웅전은 돌로 낮은 기단을 쌓고, 주추는 넓적한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기둥은 위아래의 변화가 없는 기둥을 사용했으며, 지붕이 밖으로 많이 돌출이 되어 사면에 바깥기둥을 대었다. 대웅전의 단청은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색은 오래되고 퇴락했지만, 그 화려함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선국사의 대웅전을 돌아보니 이상한 것이 하나가 있다. 작은 법당치고는 유난히 여기저기 용의 조각이 많다. 대웅전 앞이나 측면의 공포와 부연 등에서 용의 조각이 보이고 있다. 법당 안에 있는 닫집에도 끝에 용두가 조각되어 있으며, 대들보 끝에도 용이 있다.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용만해도 10여 마리는 됨직하다.




대웅전 외부에서 보이는 용조각

임진왜란 때 승병이 주둔하던 곳

왜 이렇게 크지 않은 대웅전에 용의 형상이 많은 것일까? 대웅전 안에는 한편에 커다란 북이 매달려 있다. 이 북은 전북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또한 승병대장이 사용했다는 인장도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북은 둘레가 269cm, 지름이 79cm, 길이는 102cm로 절에서 사용하는 법당용 북으로는 상당히 큰 편이다. 소나무 몸통에 쇠가죽을 씌워 만든 이 대북은, 그 제작시기가 조선조 말엽으로 추정한다. 이 대북은 언제 사용을 했던 것일까?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가 승병의 주둔지라고 한다면, 아마 이 북도 그와 관련이 잇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안에 걸린 민속자료 대북

선국사의 옛 이름은 용천사였다.

북과 인장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이 선각사 대웅전에는 왜 특별히 용의 조각이 많이 나타나고 있을까? 선국사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절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바로 ‘용천사’였으며, 승려가 300여명이나 기거하던 대규모 절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국사에 용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산성명칭도 교룡산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곳이 특별히 용과 관련이 된 전설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용이 유난히 많은 선국사의 대웅전. 그 용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다. 대웅전 현판 옆에 있는 용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가끔 물가에 서 있는 정자 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대웅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용조각

사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반야용선’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대웅전의 중앙에는 용머리를 항상 조각한다. 하지만 선국사처럼 중앙과 네 귀퉁이에 용을 조각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법당 안에도 용의 조각이 있다. 이는 교룡산성, 용천사 등과 이곳의 지세가 남다른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 더 큰 대국의 꿈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다음번 이곳을 답사할 때는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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