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단을 올린 위에는 한 날 작도가 놓여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 위로 오르더니 천을 작도 날에 갖다 문지른다. 그 순간 천이 석석 비어진다. 잘 갈아놓은 작두의 날이 번들거리는 것이,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3일 오전 9시가 가까워지면서 화성시 장안면 면시무소에는 버스와 차량 등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을비치고는 빗줄기가 세찬 편이었지만, 면사무소 강당 안과 밖에는 테이블이 놓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앉았다. 장안면 각 마을에서 모인 어르신들은 1,500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1,500명 어르신 모시고 효 잔치 및 제6회 대동문화제 열어

 

3일 오전서부터 열기로 했던 장안면 효 잔치 및 제6회 대동문화제를 개최하는 날에 가을비가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앞 공연장에서 열기로 했던 효잔치 및 대동문화제는 장소를 강당으로 옮기고, 그 밖에는 비닐로 차일을 치고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프로그램은 1부에서는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보존회원들이 판굿을 벌이는 대동굿 재현과, 2부에서는 유래비 제막식 및 개회식, 그리고 3부에서는 효 잔치 한 마당이 벌어졌다. 이날 음식을 준비한 장안면 조종애(, 58) 부녀회장은 1,5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했다고 한다.

 

 

어제부터 저희 장안면 48개리 부녀회장 및 회원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했어요. 음식은 어르신들이 비가 오는 날 따듯하게 드실 수 있도록 고깃국과 불고기, 잡채, 수육, 도라지무침, 버섯전, 나박김치, 과일, 떡 등 10여 가지가 넘어요. 오늘 인근 부대에서 봉사를 나온 군 장병들과 함께 이 음식을 어르신들께 나누어 드릴 겁니다.”

 

비가 오는데도 취사장 근처에서 송산면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를 일일이 정리하고 있는 부녀회원들은 수백 상자 째 다듬고 있다면서 팔이 아프다고 한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프로그램이l 진행될 대마다 큰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한다.

 

 

채인석 시장 등 참석, 유래비 제막식도 진행 해

 

이날 행사는 비가 오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늦은 10시 경부터 강당 안에서 먼저 대동굿이 벌어졌다. 앉은부정에 이어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김경진(도당굿보존회 부회장)의 제석굿, 이수자인 승경숙(도당굿보본회 남부지부장)의 신장, 대감굿, 김경진의 군웅굿으로 이어졌다. 반주를 하는 악사로는 이수자인 변남섭(청배, 장고), 곽승헌(피리) 등이 맡았다.

 

11시 경에는 장안면에 채인석 화성시장이 도착을 했고, 곧 이어 장안면 청사 입구에 마련한 유래비의 제막식이 있었다.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서도 채인석 시장을 비롯한 시의원, 장안면장과 부녀회장, 이장 등이 참석해 함께 제막식을 가졌다.

 

유래비 제막식에 이어 강당 앞에 마련한 무대에서는 난타작두거리가 이어졌다. 계룡산 할아버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공성구의 작도거리이다. 먼저 문하생들과 태평소 등이 빠른 장단을 치자 날이 선 큰 칼을 들고 혀에 대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주변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여기저기 휴대폰 등으로 촬영을 하느라 부산하다.

 

 

TV등에 출연을 하고 국태민안 나라굿을 주관하고 있는 공성구의 작도거리를 보고 있던 한 사람은 소름끼친다고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정말 무섭네요. 저렇게 날이 선 칼로 어떻게 입에다 대고 문지를 수가 있죠. 다치지 않을지 걱정도 되고요. 오늘 이렇게 하는 행사가 우리 장안면이 평안하고 농사가 풍년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에도 그래서 대동굿을 열었다고 하잖아요.”

 

1130분부터는 민요, 노래자랑, 어린이 벨리댄스 등 본격적인 효 잔치가 벌어졌다. 장안면 효 잔치를 보러왔다는 일본인 관광객중 한 사람은 모처럼 한국에 와서 효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고 간다.”면서 대동굿과 작도거리를 보면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한국의 문화를 더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수염을 기른 남정네가 긴 수건을 목에 걸고 사람들 앞에 나섰다. 장단에 맞추어 피리, 대금, 해금, 징이 음악을 연주한다. 움직이는 듯, 멎은 듯한 동작이 크게 두 손에 집은 수건을 허공에 뿌린다. 그리고 또 다시 멎어버린다. 도살풀이춤, 경기도 지방의 화랭이들에 의해 추어졌던 춤이라고 전한다.

 

도살풀이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경기도에서 시작한 살풀이이다. 호남의 살풀이와는 그 춤태나 장단이 전혀 다르다. 도살풀이를 경기도살풀이라고 풀이를 하지만 그보다는 도당살풀이라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경기도당굿에서 사용하는 장단과 음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당굿의 무부(巫夫)들인 화랭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춤이기 때문이다.

 

도살풀이춤은 흉살과 재난을 소멸시켜 안심입명, 나아가 행복을 맞이한다는 종교적 소원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스럽고 소박하여 삶의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긴 수건에 의한 공간상의 유선이 매우 다양하여 선이 그려지는 형태가 하나의 소박한 화폭과도 같다. 이춤은 각기 정, , . . .정의 신비스럽고 자유로운 춤사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도살풀이춤은 호남 살풀이장단(4)과는 다른 경기도당굿 속에 있는 도살풀이(섭채6) 장단에 맞추어 춘다. 또한 춤사위도 다루치기와 목젖놀이, 학사위, 용사위 등의 독특한 사위를 가지고 있다. 도살풀이춤은 경기도당굿속의 도살풀이 장단(6)에 맞추어 춤을 추며, 199010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이 되었다.

 

어려운 장단을 소화하는 한수문의 도살풀이춤

 

3일 오후 지동교 밑 수원천에서 벌어진 세월호 희생자 위령굿. 그 자리에 키가 껑충한 한 사내가 춤을 추었다. 한수문, DMKorea 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사단법인 매헌춤보존회 부회장이기도 하다. 한양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를 받은 한수문은 서울시무용단 수석이기도 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인 처용무 이수자이기도 한 한수문은 오랜 시간 도살풀이춤을 추어왔다. 무대라는 곳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텐데도 무대에 오르면 늘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경기도당굿에서 사용하는 장단은 어렵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듣고 익힌 굿거리, 허튼타령, 살풀이장단 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6박이나 10박 장단을 사용하는 경기도당굿은 기능이 뛰어난 무부들이 도당굿 판에서 서로의 재능을 겨루며 실력을 쌓아왔다. 사용하는 장단만도 도살풀이 장단(섭채), 오니굿거리(청배섭채), 터벌림(반설음장단), 진쇠, 올림채, 겹마치, 뻐드래, 부정놀이 장단 등 경기도당굿 만이 사용하는 특별한 장단을 사용하고 있다.

 

색다른 춤사위에 빠진 관객들

 

그동안 도살풀이춤을 몇 번 보았어요. 대개는 여자들이 추는 춤을 보았는데, 이렇게 남자가 추는 춤을 보니 색다른 듯합니다. 도살풀이춤은 수건이 길어 춤을 추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역시 힘이 있어서 그런지 수건이 날리는 것도 좀 다른 듯합니다. 아마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이 모두 좋은 곳으로 갔을 것 같습니다.”

 

 

구경을 하던 한 사람은 자신도 춤을 좀 추었다고 하면서, 남자가 추는 도살풀이춤을 보는 것이 색다르다고 한다. 곁에서 춤을 지켜 본 한 사람은 아마 이렇게 좋은 무대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경기도당굿의 다양한 장단을 소화해야 출 수 있다는 도살풀이춤. 그 무대 하나만으로도 돋보이는 자리였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도 이런 무대는 처음이다. 맨 바닥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한편에선 물줄기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사회자가 한마디 거든다.

 

폭포무대라고 이런 무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무대이자 최초의 무댑니다. 앞으로도 이런 무대는 아무도 마들지 못할 겁니다. 우리 수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무댑니다.”

 

그 말에 수원천 건너편 객석의 관람객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한다, 3() 오후 5시부터 수원천 지동교 아래 통로애 마련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 도당굿 이수자 승경숙 제3회 개인발표뢰 및 세월호 희생자 극락왕생을 위한 위령굿현장이다. 천안에서 구경을 왔다는 이정재(, 44)는 구경을 하면서 기가 막힌다며 말한다.

 

 

세상에 나는 다리 아래서 이런 공연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전통시장 구경을 왔는데 음악소리가 나기에 찾아왔더니 다리 아래 이런 공연장이 있네요. 사람들에게 여기서 공연을 자주 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오늘 처음이라고 하네요. 참 수원이라는 동네 정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발상을 하죠.”

 

물을 사이에 두고 무대와 객석을 구분해

 

처음부터 이런 무대를 마련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위령굿 날짜를 3일로 정했는데 갑자기 태풍 나크리가 올라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행사 관계자들은 행사를 연기할 것인가? 아니면 장소를 변경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지동교 아래는 폭이 넓어 충분한 공간이 있다고 판단을 해 장소를 다리 위에서 아래로 옮겼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참 캄캄했어요. 날짜를 옮기는 것도 그렇고 딴 공연도 아니고 세월호 의생자 위령굿으로 몫을 정했는데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더구나 경기도도당굿 회원들에게 모두 연락을 취했는데, 취소를 할 수도 없거요.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궁여지책으로 택한 곳이 지동교 아래인데 이렇게 훌륭한 무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날 지비를 들여 개인발표회 및 세월호 희생자 극락왕생을 위한 위령굿을 펼친 승경숙(60) 도당굿보존회 이수자의 말이다.

 

 

300여명의 관중들, 즐거운 굿판이었다.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도당굿은 그 도당이 처해있는 지리적인 여건에 따라서 모셔지는 신위가 각기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내륙지방에서는 대개 산치성이나 산제라고 하여서 도당할아버지나 도당할머니가 남산신 혹은 여산신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경기도의 서해안과 섬 지방의 풍농과 풍어의 성격을 함께 띠고 있는 도당굿도 섬기는 신위는 용왕이나 임경업장군 혹은 바다라는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은 신격들을 모시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섬 지역인 제부도, 영종도, 떼무리섬, 살섬, 용유도, 덕적도, 등에서도 풍어를 위한 대동굿을 풍어제라고 부르지 않고 도당굿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절차나 의례를 보아도 서해안 별신굿으로 나타나는 풍어제와는 다르게 행해졌다.

 

 

이날 위령굿은 경기도당굿 이수자 목진호의 주정청배로 시작을 해 승경숙의 선부정, 도당을 모셔들이는 산바라기, 시루굿과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굿답게 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 이수자인 김규미(, 54)의 지전춤 등으로 이어졌다.

 

정말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경기도도당굿 보존회 여러분과 승경숙씨 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태풍이 부는 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세월호의 많은 생명의 극락왕생을 위한 자리도 좋지만, 이 비가 퍼붓는 가운데서도 공연을 한다는 발상이 기가 막히네요. 더구나 떡이며 과일을 모두 나누어 주는 바람에 손이 푸짐해졌습니다. 정말 고맙고 즐거운 굿판입니다.”

 

사람들은 자리를 뜰 줄을 모른다. 걸판 진 굿판과 동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위령굿은 발표회를 겸한 굿판을 펼친 이수자 승경숙을 비롯해 오진수(보존회장 전수조교), 장영근(전수조교), 이수자 소명자, 김순중, 백윤이, 곽승헌, 목진호, 김영은, 고현희와 전수자 이용수, 김상희, 이순덕, 강봉림, 이인자, 이주현, 최남수, 김지혜, 최인순 등이 동참했다.

 

전화가 왔다. 팽목항에 가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위령굿읗 하고 왔단다, 보내온 사진을 보니 배 위에서 넋을 건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뱃전에 노랑색 리본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팽목항까지 가서 위령굿인 영혼제를 올리고 왔다는 승경숙(, 60.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이수자)씨를 만나 보았다.

 

지난 63일이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참사를 당한지 49일째 되는 날예요. 2일 날 진도를 가는데 비바람이 얼마나 몰아치는지, 수원에서 문하생들과 함께 8명이 물건을 가득 싣고 15인승 차로 가는데 차가 뒤집힐 것만 같았어요.”

 

 

가는 길서부터 험난했다고 한다. 그렇게 진도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고난 후, 3일 날 아침 일찍 팽목항으로 이동을 했단다. 정작 팽목항에서 배가 바다로 나갈 수가 없어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인근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나갔다고 한다.

 

어선 두 척을 이용해 30분 정도 나갔는데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눈을 뜰 수조차 없었어요. 거기다가 바람이 불고 파도가 너무 높아 다시 항구로 돌아와 가까운 곳에서 굿을 시작했죠. 배 두 척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만신 등 30명 정도가 배위에 오르고, 한 배에는 굿을 할 사람들이 탔죠.”

 

 

대명원 김현정 원장이 주관한 영혼제

 

사람들은 세월로 침몰 49일째인 지난 63일을 전후 해 곳곳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사고가 난 지점에 가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위한 굿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은 없었다.

 

이번 영혼굿은 서울 약수동에서 대명원을 운영하시는 김현정(, 69) 원장님이 주관을 했어요. 서울에서도 많은 신 제자들이 함께 참여를 했는데, 배 위에 올라 바다로 나가 막상 넋을 건지는 굿을 하려고보니 얼마나 눈물이 흐르는지 참을 수가 없었죠.”

 

준비를 해간 음식만 해도 150인 분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아이들 생각이 나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와 통닭, 빵까지 준비를 했다는 것. 그 많은 음식들을 선장들이 바다에 넣어 아이들이 배가 고프지 않게 해달라고 해서 모두 바다에 뿌려 주었단다.

 

 

왜 그렇게 많은 음식을 해갖고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아이들이 그런 것들이 먹고 싶었나 봐요. 정말 많은 음식을 해갖고 갔는데도 정작 저희들이 먹은 것은 없어요. 아침 10시에 바다로 나갔다가 항구로 돌아온 것이 오후 330분 정도였나 봐요.”

 

8월에 100일 위령굿 열 터

 

그렇게 팽목항으로 달려가 위령굿을 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고 하는 승경숙씨. 10일 오후 자신의 신당이 있는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세지로 160 제석천궁이라는 신당에서 일일이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다.

 

 

“82일이 세월호 사고가 난지 10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때 다시 팽목항으로 갈 수는 없지만, 수원에서라도 장소를 잡아 제가 위령굿을 해주려고 합니다. 이번에 배위에서 굿을 할 때도 기에 일일이 글씨를 써서 했는데, 그때도 노란천에 글씨를 써서 늘이고 굿을 하려고요.”

 

아이들이 어른들의 부주의로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까워, 100일째 되는 날 자비를 들여 위령굿을 꼭 열어 주겠다고 하는 승격숙씨. 그때의 생각이 다시 나는 듯 눈시울을 붉힌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경기도 일원의 각 마을 도당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안과태평을 위한 마을굿이다. 경기도당굿은 한수 이남의 경기도 전역과 현 인천광역시의 섬까지 걸쳐 연희가 되던 마을 제의로, 화랭이라고 하는 세습무들에 의해서 전승이 되어왔다.

 

19901010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이 된 경기도당굿은 보유자인 고 조한춘과 고 오수복이 세상을 떠난 뒤, 아직도 보유자 지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는 경기도당굿보존회에서 모든 행사 및 각 도당의 제의를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전승에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는 경기도당굿 남부지부 승경숙 지부장을 만나보았다.

 

 

처음에는 낯설기 만한 경기도당굿

 

현재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승경숙 지부장은 1986년 내림굿을 받은 후, 주로 한양굿을 배워 굿판에서 나름 잘 불리는 무녀였다. 그러다가 1993년 경기도당굿 보유자인 오수복 선생님의 권유로 경기도당굿의 전수생으로 입문을 하게 된다.

 

“1993년에 처음으로 당시 경기도당굿의 보유자이신 오수복 선생님을 뵙고 도당굿에 첫발을 내딛었어요. 당시는 경기도당굿에 이름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분들이 모두 문하생으로 있었죠. 거기서 함께 끄트머리에 서서 무녀제 도당굿의 제차를 배웠어요. 오수복 선생님께서는 도당굿에서 무녀가 맡아하는 부정, 제석, 군웅 등 여자가 할 수 있는 굿거리를 저희들에게 알려주셨죠.”

 

처음에는 경기도당굿이 낯설기만 했다고 한다. 경기도의 판소리인 판배개 창으로 불러대는 도당굿의 소리가 따라 하기조차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힘든 도당굿의 춤사위며 장단, 소리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전수교육조교인 고 방돌근 선생 때문이라고. 고 방돌근 전수교육조교는 이 시대의 마지막 전악이라고 할 만큼 도당굿의 장단과 경기 시나위를 구가하고 있던 악사였다. 할아버지가 경기도의 대금 시나위의 창시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의 유지 받들어야

 

낮에는 오수복 선생님께 도당굿의 굿 제차를 배우고, 저녁에는 방돌근 선생님께 도당굿의 장단과 무가를 배웠어요. 경기도당굿은 신이 나지도 않고 까다로운 장단과 사설로 인해 고통을 받기도 했죠. 배우다가 보니 점점 그 깊이에 빠져들게 되고, 나중에는 도당굿의 소리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어요.”

 

그렇게 경기도당굿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도당굿의 모든 행사에서 거리를 맡아 자신이 가진 재주를 선보였다고 하는 승경숙 지부장. 기획 공연만 해도 50여회에 도당굿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인공연도 2회나 가졌다.

 

선생님들께 그냥 받은 재주잖아요. 열심히 할 수밖에요. 그동안 많은 곳에 공연을 다녔어요. 선생님들과 함께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공연을 했죠. 때로는 박물관에서 때로는 산사에서, 어디든지 도당굿을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달려가서 공연을 했죠. 당시 연세가 많으신 오수복 선생님께서 노구를 이끌고도 도당굿의 전승을 위해 애를 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선생님들이 이젠 한 분도 세상에 있지 않다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고 방돌근 선생은 첫 개인발표회를 며칠 앞두고 세상을 하직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기도. 보유자이신 오수복 선생도 20111217일 세상을 하직했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후,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산의 굿당에서 선생님의 지노귀굿을 해드렸죠. 두 분의 선생님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선생님들께 배운 재주를 널리 퍼트려야 하겠다고. 그래서 오산에 경기도당굿 남부지부를 개설했어요.”

 

 

그동안 50여명의 전수생 키워내

 

20121월부터 6개월 과정으로 경기도당굿의 기본적인 학습을 시작한 전수생들은, 그동안 114, 28, 316, 415명 등 53명에 달한다. 경기도당굿은 그 특성상 일반 굿과는 제차가 다르기 때문에, 6개월 과정으로는 배울 수가 없다. 하기에 꾸준히 학습을 하고 행사에 자주 참석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 오산에서 전수생들을 학습시키다가 보니 이동거리가 멀어 전수생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수원 팔달구 인계동 지하에 20여 평 정도 되는 연습실을 마련했어요. 선생님들께 배운 것을 온전히 전수시키고자 마음을 먹었죠. 이달 16일에 전수소를 개소하려고요.”

 

전수소의 개관을 준비하고 있는 인계동 지하에서 만난 승경숙 지부장. 경기도당굿의 온전한 전수 보전을 위해서 앞으로 많은 노력을 하겠다고 한다. 남들은 어렵다고 배우기를 꺼려하지만, 선생님들께 배운 재주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어려움을 참아내야 되지 않겠느냐며 각오를 다진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경기도당굿이 온전히 전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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