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교만이 지나치면 세상을 망치게 된다. 이런 말은 골백번이나 들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그런 것을 잊게 되고, 또 다시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도 한다. 참으로 우매한 것이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그런 인간이 부른 교만이 한 마을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 바로 현 순창군에 있는 적성현이라는 고을이다.

적성현은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에 폐현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현이 폐현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바로 교만한 한 인간의 바보 같은 행동에서였다. 남원에서 순창으로 가는 21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채계산’이라는 산이 있다.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이 산의 중턱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최영이 화살을 따라 뛰던 산

체계산은 회문산,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 명산이다. 이 산은 화산, 적성산, 책여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 봉우리는 험한 준령인데 최영장군이 이 산에서 활을 쏘고, 화살보다 먼저 말을 달리며 무술을 닦았다고 전한다. 하루는 활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이 떨어지는 곳으로 내달았으나, 화살이 보이지가 않았다.

최영은 말이 뒤늦어 화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바로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최영은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고, 그 뒤로는 직접 자신이 활을 쏘고 산에서 달려 내려와, 적성강에 먼저 도착하는 훈련을 수도 없이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영은 자신의 경솔함을 바로 후회하고, 그 뒤로는 자신이 직접 달렸다고 한다.



신비한 화산옹 바위의 전설

이 채계산이라는 이름은 귀부인이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은 형상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 채계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예전 이곳에 적성현이 있던 곳인가 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풍부한 물이 앞으로 흐르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시야 속에 많지 않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예전 이곳이 적성현이 있었다고 하면, 상당히 많은 집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만한 한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이, 결국 한 현을 송두리째 망하게 만든 셈이다.



이 산에 있는 바위는 흡사 노인이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화산옹 바위'라고 부른다. 늙은 노인이 서 있는 바위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말로 이 바위를 보는 순간, 수염을 길에 느린 노인 한 분이 서 있는 듯하다. 이 바위는 장군바위, 미륵바위, 메뚜기바위라고도 부른다.

교만은 역사를 망치게 만든다는 교훈이

화산옹 바위는 높이가 30m 정도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면 이 바위의 우측이 떨어져 나간 듯 보인다. 좌측에는 팔 같은 것이 삐죽이 나와 있는데, 우측엔 그런 돌출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잘려나간 듯하다. 이 바위의 우측 팔 부분이 잘려나간 것은, 전라병사 김삼용의 교만심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이 화산옹 바위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 바위였다고 전한다. 풍년이 드는 해는 이 바위가 하얀색을 띠고 있지만, 흉년이 드는 해는 검은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성현 내에 큰불이 나거나 유행병이 번지면 바위가 푸른색을 띤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가 되면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화산옹 바위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가야 한단다. 만일 말에서 내리지를 않으면 말이 다리를 삐거나, 말에 탄 사람이 낙상을 하기도 했단다. 그런 변괴가 일어나는 신령한 바위이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이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아이를 못 낳으면 정한수를 떠놓고 빌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위 앞에는 누가 기원을 한 것인지 작은 돌무지가 있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날인가 전라병사 김삼용이 금빛과 은빛이 나는 화려한 갑옷으로 차려입고, 이 화산옹 바위 앞을 지나게 되었다. 수행을 하던 아전이 다가와 김삼용에게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삼용은 그 이유를 듣고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탄 채로 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분을 이기지 못한 김삼용은 ‘화산옹의 요망한 바위덩어리가 장부의 기개를 꺾는다’며, 칼을 빼 오른쪽 어깨를 치니 팔부분이 떨어져 적성강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화산옹 바위의 영험은 사라졌으며, 천재지변이 연이어 일어나 적성현은 폐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교만이 한 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매한 마을의 지도자가 마을을 망치 듯, 우매한 가장은 집안을 망치는 법이다.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화산옹 바위. 이 바위의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다면, 나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을. 두 손을 마주해 머리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없는 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고려 말 어머니 한 분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라는 곳이다.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나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청소년 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경천이라는 내를 건너 ‘대모암’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300m 정도를 오르면 이 부인이 쌓았다는 성이 있다.

이 산성은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 등으로 불리는데,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감싼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성은 현재 ‘홀어머니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성을 아홉 명의 아들을 둔 양씨 부인이, 아들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에는 양씨부인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씨 총각의 구애에 죽음으로 답한 양씨부인

홀어머니 산성은 양씨 부인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다. 양씨부인을 흠모하던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설씨총각은, 은근히 양씨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설씨총각이 양씨부인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부인은 딱히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해 낸 것이.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고 하였다. 총각은 서울로 떠나고 부인은 아들들과 함께 열심히 성을 쌓았다. 아홉 명의 아들들과 성을 쌓는 부인은, 지아비의 생각을 해서라도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을 쌓고 있던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설씨총각이 먼저 돌아왔다.

 

대모암과 산성 오르는 길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 쓴 양씨부인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 잎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산성 이름이 홀어머니 산성이기 때문에, 홀로될 것을 염려해서 인가보다.

군창으로 사용했던 홀어머니 산성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보리라 몇 번을 별렀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벌써 몇 번째 길을 돌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6월 5일 일요일, 약속이 깨어지는 바람에 잠시 답사 길에 나섰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갈 생각에서이다.



내를 건너면 좌측으로 대모암 이정표가 나온다. 대모암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작은 산당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토속신앙을 섬기던 장소였다. 그러다가 1935년에 학성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 대모암을 창건하였다.

대모암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높지 않은 등성이 위에서는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조금 걷다가 보니 산성이 보인다. 최근에 일부는 복원을 한 듯하다. 원래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성벽은 그리 높지가 않으며, 동쪽으로 향한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았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는 군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길이는 700m 정도라고 하지만,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성의 길이는 100여 m 정도인 것 같다. 남은 부분은 넝쿨이 우거져 들어갈 수가 없다. 성벽은 가파른 언덕 위에 쌓았는데, 성벽의 넓이는 1.3m ~ 4m 정도가 된다.

홀어머니 전설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

복원을 한 성벽 끝으로는 옛 성벽인 듯한 곳이 아직 남아있다. 성벽 위로 한 바퀴 돌아본다. 아마도 이 성이 과거에는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다. 군창을 두었다고 하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성에 왜 고려 시대의 홀어머니 전설이 전하는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대모암과 대모산성. 아마도 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던 산당과 연결이 된 전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산당에 모셨다는 신격이 혹 홀어머니는 아니었을까? 성벽 위에 걸터앉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본다. 그저 답사를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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