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에 소재한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인 고창읍성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답성놀이란 일명 성밟기, 성돌기라고도 하며 부녀자들이 한다.

 

이 놀이의 목적은 대개 마을의 평안과 개인의 액막이를 겸하는 것이나,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1년에 1번씩 점검하고 발로 성을 밟아 견고하게 다지는 목적도 있다. 유명한 곳은 개성, 고창, 영광이다. 고창의 답성놀이는 주로 부녀자들이 머리에 작은 돌을 이고 모양산성을 돌아오는데 3번 도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게 하면 소원성취를 하며 다리에 병이 없고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믿는다. 머리에 이고 가는 돌을 떨어뜨리면 불길하고, 성을 2번만 돌고 와도 좋지 않다고 믿는다.

 

 

동헌 등 22개 전각이 있던 고창읍성

 

성 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병화 등으로 소실이 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읍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바로 정문이자 북문인 공북루를 만나게 된다. 공북루 앞에는 옹성을 쌓아 적의 침략에 대비를 하였는데, 이러한 축성방법은 고구려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옹성위에는 여장을 쌓아 성안에서 성밖을 관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 안으로 적이 성문을 부수기 위하여 들어온다고 해도, 옹성에서 쏟아 붓는 화살과 기름, 돌 등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더욱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공성무기를 사용하기도 힘들다. 옹성에는 밖으로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현안과, 총안을 내어 놓았다.

 

 

공북루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옥사가 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관옥 또는 원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옥사는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가 짓고, , 여를 구분하여 가둘 수 있도록 하였다. 옥사의 주변에는 높은 담을 둥그렇게 둘러치기 때문에 원옥이란 이름을 붙였다.

 

관리사무소 뒤에는 향청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향청은 지방의 방백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 지방의 향리를 구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향청에서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약수터가 있다. 성안에서는 식수가 가장 중요하다. 오랜 시간을 적과 대치를 할 때는 식수가 없으면, 그만큼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약수터를 빗겨서 풍화루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는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풍화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기록에는 고창읍성 안에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다고 했다. 풍화루란 글 그래도 고을의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지어진 정자다.

 

 

백성을 생각하는 수령이 있던 고창읍성

 

풍화루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고창 동헌과 내아가 있다. 동헌이란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 현 등 각종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는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이라 하였다. 동헌의 정면에는 평근당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백성과 가깝게 있으면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동헌의 옆에는 내아가 있다. 내아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을 말한다. 흔히 동헌을 내동헌과 외동헌으로 구별을 하는데, 외동헌은 집무를 보는 곳으로 이를 동헌이라고 하고, 살림을 하던 내동헌을 내아라고 부른다. 동헌의 앞쪽에도 숨겨 놓은 듯한 우물이 있다.

 

 

동헌에서 남서쪽으로 높은 곳에는 고창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을마다 있던 객사는 중앙에는 몸채라는 정당(正堂)이 있다. 정당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궁궐을 에를 올렸다. 양편에 있는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고창객사의 현판에는 모양지관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고창을 모양이라고 했고, 성을 모양성이라고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객사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연못 조금 위편에 작청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다. 작청에서 북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우측을 보면 관청이 있다. 관청은 관주라고도 부르며, 이곳은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일을 맡아하는 곳이다.

 

관청에서는 수령과 그 권속들, 그리고 빈객에 대한 예우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조달과 관리를 맡아하던 곳이다. 현재까지 성안에 자리한 복원된 건축물 돌아보았다. 관청에서 옆으로 난 소로길을 이용하면 성곽길을 오르게 된다. 올라가다가 보면 소나무 숲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는 한다.

 

 

치성을 쌓아 적을 공격

 

성 위로 오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치다. 고창읍성에는 6개소의 치가 있는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치란 꿩을 말하는 것으로 성곽의 일부분이 밖으로 돌출이 되어있는 것을 일컫는다. 이 치의 용도는 상당하다. 적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 치에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하면, 적은 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고창읍성의 경우에도 지형지세를 이용해 성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치와 옹성에서 바라다 보이지 않는 곳은 성의 한 부분을 굴곡지게 쌓아 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천천히 걸어 성의 남쪽으로 향하니 읍성의 동문인 등양루가 나타난다. 동문 역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다. 수원 화성이 국가적으로 온 나라가 나서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했다면, 고창읍성은 전라우도인 고창, 고부, 김제, 무장, 영광, 옥구, 용안, 장성, 정읍, 제주, 진원, 태인, 함평, 흥덕과 전라좌도인 능성, 담양, 순창, 용담, 임실 등 19개의 군과 현 등에서 모인 사람들이 3년 동안을 쌓은 성이다.

 

성 밖에는 각 고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맡아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자 재현을 시켜 성 밖에 구간별로 세워 놓았다. 이렇게 민초들의 힘을 쌓은 고창읍성은 크지는 않지만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쌓은 성으로 매우 견고한 성곽이다.

 

등양루는 동편 오르막에 세워져 있다. 등양루를 지나 동치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얼마나 잘 축성된 성곽인지 그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문인 등양루를 지나 성을 타고 한 바퀴 돌다가 보면 동남치와 남치를 거친다. 그런데 고창읍성에는 남문이 없다. 일반적인 성들은 문이 동서남북에 있는데 비해, 남문이 없다는 점이다.

  

남치의 안쪽을 보면 상황사가 있다. 요즈음은 성황당이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이 있는 곳으로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성황사가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황사에서는 성황신을 내려 모시고 고을의 방백이 직접 제를 올렸다.

 

성황사를 거쳐 성곽을 타고 내려오면 서남치를 거쳐 서문인 진서루가 나타난다. 진서루의 형태는 북문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옹성을 쌓아 놓았다. 진서루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공북루로 돌아오게 된다. 20여리가 미치지 못하는 고창읍성. 그러나 성을 돌아보면 그 성을 쌓은 민초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축성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민초들이라고 달라질 수가 없다. 고창읍성을 돌아보면 호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성곽. 오늘 고창읍성은 오랜 역사를 그렇게 지켜보면서 말없이 서 있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1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월 6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규모가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지난 410일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아직 이른 철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주변에는 산수유가 망울을 터트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누구랄 것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그 아름다움을 글로 남겨놓기를 좋아한 우리 선조들이다. 그것이 임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누정 하나를 두고도 그렇게 임금들 까지도 그 아름다움을 후대에 전했다.


관동팔경.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여덟 곳을 이르는 말이다. 강원도 고성부터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볼 수 있는 관동팔경은 몇 번을 둘러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관동팔경은 강원도 통천의 총석정과 고성의 삼일포를 비롯해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경상북도 울진의 망양정과 월송정을 일컫는 말이다. 현재는 이 관동팔경을 다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비가 오는 날 오른 망양정


정자기행을 하면서 망양정을 찾은 날은 비가 뿌리는 날이었다. 망양정에 오르니 주변에 원추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작은 능선 위에 올라앉은 망양정. 가히 관동팔경 안에 들어갈 만한 곳이다.


이 망양정은 팔경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라 하여, 조선 숙종이 <관동제일루>란 현판을 하사할 정도였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가 보다. 비가 뿌리는 망양정. 그 멋스러움은 몇 해가 지났건만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망양정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와 숙종의 어제시

 

망양정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와 글로는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 정철의 관동별곡 등이 전해진다. 그림으로도 정선의 백납병, 관동명승첩에 있는 망양정도 등이 유명하다. 아름다움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기를 좋아했던 선조들. 그만큼 망양정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만 한 정자다.


관동별곡 중 망양정 부분을 보면 파도가 치고 포말이 일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정철이 이곳에 올랐을 때 동해에 파도가 심하게 치고 있었는 듯하다.


션사(仙사)를 띄워 내여 두우(斗牛)로 향(向)하살까.

션인(仙人)을 차자려 단혈(丹穴)의 머므살까.

텬근(天根)을 못내 보와 망양뎡(望洋亭)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늘이니 하늘 밧근 므서신고.

갓득 노(怒)한 고래, 뉘라셔 놀내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은산(銀山)을 것거 내여 뉵합(六合)의 나리는 듯

오월(五月) 댱텬(長天)의 백셜(白雪)은 므스 일고.

 


자리를 옮긴 망양정


원래 망양정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철종 11년인 186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다. 그 후 망양정은 몇 번의 수난을 당했다. 허물어져 없어졌던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며, 2005년에 완전 해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동팔경 중 수일루라고 일컫는 망양정. 그저 누각에 올라 동해만 바라다보아도 가슴이 트이는 듯 하다. 이런 절경에 누각을 짓고 누대에 올라 어떤 꿈을 꾸었을까?


수많은 선조들이 이곳을 거쳤을 것이다. 그 많은 선조들은 각기 가슴에 망양정이라는 절경을 품고 길을 떠났을 것이다. 정자를 찾아 길을 나설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오늘은 또 어느 곳에서 아름다운 정자를 만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 정자에는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정자들을 찾아 길을 나서지만, 그 여정이 언제 끝나려는 지는 모르겠다. 그저 언젠가 아름다운 정자를 작은 책에 담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도 누정을 찾아 길을 나서고 싶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 하고 싶다. 그 작은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고 싶다.

어제시란 임금님의 시를 말한다. 조선조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정자가 있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변 무릉리. 정자 앞에는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있고, 작은 정자에는 요선정이란 현판과 함께, 모성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임금을 그린다는 뜻인가 보다.

요선정(邀僊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15년에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회원들이 지은 이 정자는, 앞으로는 저 아래 계곡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자 앞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석탑 1기가 있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 빼앗길 뻔하다

더욱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쓴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가치를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은 정자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요선정에 걸린 어제시는 숙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원래는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다.

그 후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시골의 촌부들이 지켜낸 어제시

일개 촌부들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소중한 어제시 현판이, 수주면에 거주하는 원씨(元氏)·이씨(李氏)·곽씨(郭氏)의 3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숙종임금의 어제시 현판이 일본으로 건너갈 위기에 놓인 것을 많은 돈을 주고 돌려받은 무릉리 요선계원들. 그들이 진정한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요선정으로 오르는 숲길 입구에 있는 작은 암자에 차를 대놓고, 주천강 옆으로 난 숲길을 오른다. 강바람인지 바람 한 점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난다. 예전에는 요선계원들이 지켜 온 어제시를 이제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지키고 있는 것인지.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일대에는 사적 제471호인 위봉산성이 있다.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 축성한 산성이다.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원년인 1675년에 시작하여, 숙종 8년인 1682년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처음 찾아갔을 때는 벌써 7 ~ 8년 전 이었나보다. 당시에는 지방문화재였던 이 산성이, 2006년 4월 6일자로 사적으로 변했다.

위봉산성은 성벽 둘레가 약 8,539m에 성벽 높이는 1.8 ~2.6m 정도이며, 높은 곳은 5 ~ 8m에 이른다. 성 안의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와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와 포루지 13개소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추정 건물지 15개소에 수구지 1개소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

비가 오는 날 위봉산성을 향하다

2월 27일, 토요일에 온다던 비가, 일요일 아침 일찍 눈을 떠보니 후줄근하게 내린다. 카메라가방을 몇 번이고 들러 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가까운 곳은 몇 번이고 다녀온 터라,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위봉산성에서 조금 더 지나면 있는 위봉사라도 다녀올 마음에서다.

위봉사를 가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위봉산성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산에는 비구름이 가득 끼었다. 정작 고개 정상에 있는 위봉산성 서문지 일대는, 그래도 짙은 구름은 끼지는 않았다.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려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가득 비구름이 끼어있다.



위봉산성은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위봉산성을 축성한 것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한 성이라고 한다.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 둘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실제로 1894년 동학혁명 때 전주부성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이 되자, 이곳으로 경기전에 모셔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옮긴 적이 있다.



7개 군의 군민이 동원되어 쌓은 위봉산성

위봉산성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다. 올 봄에 날이 풀리면 시간을 내어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서문일원은 성문의 성벽과 옹성, 그리고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도로를 내느라 끊어진 산성은 산 위로 길게 쌓아올렸다. 길 건너편 성곽을 둘러본다. 급한 경사면을 이용해 축성을 한 위봉산성은, 경사면이 바로 성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산성을 축성할 때는 인근 7개 군민이 모여서 쌓았다고 한다. 8년이나 걸쳐서 쌓은 성은 산에 있는 돌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 일대의 민가 축대에서도 성벽을 쌓은 돌과 같은 석재들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골짜기에 축대를 쌓고 그 안쪽으로는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었다.




여장을 쌓은 돌도 다듬은 돌이 아니고, 성벽을 쌓기에 적당한 돌을 이용했다. 위에는 큰 돌을 올려 무게를 주었는데, 이 돌은 전투시에는 공격용 무기로 사용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총안으로 밖을 내다본다. 저 밑 계곡에서 밀려오는 적을 공격하기에는 적당할 듯하다.

옹성이 있는 서문지를 돌아보다

서문지를 돌아본다. 아치형으로 문을 만들고, 그 위는 서문의 위에 섰던 누각이 있었던 곳이라 위가 뚫려있다. 서문 밖으로는 옹성을 쌓았다. 대개 옹성은 낮은 편으로 쌓지를 않는다. 적이 공격을 하기가 어렵도록, 높은 곳을 골라 출입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한다. 위봉산성 서문지의 옹성이 터진 곳도, 가파르게 성벽이 산을 타고 올라가는 쪽에 내놓았다.



만일 적이 성문을 깨기 위해 옹성 안으로 들어온다면,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있다. 옹성은 성을 보호하고 적을 섬멸하는데 있어서는, 꼭 필요한 구조였을 것 같다. 이 산성을 돌아보는데 빗줄기가 더욱 강해진다. 괜한 걱정을 한다. 예전에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성벽 위에서 파수를 보던 병사들은 어떻게 비를 피했을까? 비가 오는 날 오른 위봉산성에서, 지나간 옛 시간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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