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미륵당집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하던 곳이다. 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곳은 계획을 세워 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녔으니...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다.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잘 아신다는 분이 이렇게 알려주었으니, 주변만 맴돌 수밖에.

 

 

주변을 돌면서도 당집을 발견 못해

 

몇 번을 파장동 직원들과 통화를 하고 난 후에야 바로 눈앞에 있는 당집을 발견했으니, 답사를 하면서도 이런 경우는 또 생전 처음이다. 당집 앞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었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고 부르던 것을, 누군가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부른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굳게 닫힌 문, 까치발로 보다

 

그런데 문제는 미륵당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는 것이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미륵님 미륵님, 선이라도 보세요?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을 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을 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가 힘들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을 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향민을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다 마을을 떠난 듯하다. 매일 수백 대의 버스가 앞으로 지나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미륵당 석불.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모처럼 틈을 내어 찾아간 수원 파장동 미륵당 석불. 생긴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 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영험한 미륵조차도 버려두는 것인지.

45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 곳에서 마을주민들을 지켜 온 돌미륵. 그저 평범한 돌에 얼굴은 언제 사라졌는지, 딴 것을 올려놓았다. 아마 이 미륵이 영험하다고 소문이나 났던 것일까? 이천시 모가면에 있는 미륵댕이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곳은, 이천시 두미1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200여 년 전에 두역동(豆亦洞)이라는 마을과 시미동(侍美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두 마을에서 한자씩 따서 두미리라고 불렀단다. 미륵댕이라고 부르는 두미1리에는 450년 전 난폭한 산적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그 산적으로 인해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장사가 마을에 찾아들어 이 산적을 내쫒고, 이곳에 큰 미륵을 세웠다고 한다.


450년 주민들과 함께 한 미륵

그 뒤부터 이 마을을 미륵댕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마을에 전해지는 설화야 진위여부를 따질 것이 없지만, 마을에 미륵이 450년 정도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미륵댕이 설화를 뒷받침 하는 것이 바로 미륵댕이 숲이다. 오래 묵은 고목들이 미륵이 있는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두미리의 미륵댕이 숲은 가히 절경이다. 돌미륵 앞에 떨어진 낙엽들이 장관이다. 왜 치우지 않느냐고 마을 사람에게 물었더니 '보기가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보다 미륵댕이 숲에 나무를 함부로 다치면 벌을 받는다고도 한다. 어디를 가나 전하는 신령한 나무에 관한 이야기지만, 미륵댕이 숲의 분위기는 그보다 더 신비할 듯하다.


두미리의 사람들은 이 미륵댕이 숲에 자리한 미륵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미륵은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1m 남짓한 미륵, 마을의 구심점이 되

미륵은 1m 남짓하다. 머리는 얼굴모양의 돌을 얹었는데 원래의 머리가 아닌 듯하다. 목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미륵의 몸통에는 희미하나마 윤곽이 보인다. 아마 처음에는 미륵의 형태를 가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몸통에 비해 큰 머리를 얹어 균형이 잡혀있지는 않다. 앞에는 시멘트로 단을 만든 것으로 보아, 이 돌미륵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의 사방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커다란 돌을 얹어놓았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돌지붕도 산적을 내쫒은 장사가 얹어 놓은 것이 된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야 어떻든, 이 돌미륵으로 인해 마을에는 공동체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450년이라는 긴 세월을 마을을 지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가을날 찾은 미륵댕이. 그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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