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지방마다 많은 장인들에 의해 석불이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불교를 그 어느 때보다 앞장세운 고려이기 때문에, 그만큼 석불이나 석탑 등 불교의 조형물이 많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불교석조물은 지방에서도, 그 지역의 장인들에 의해서 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었다.

지방에 장인들에 의해 조성이 된 불교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지방색을 띠우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 불상 등은 거대불로 변화를 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당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석불의 경우 섬세함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장중하고 간략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고려석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선스님이 창건한 고찰 선원사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만행산에 자리한 선원사는, 도선스님이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사적비에 의하면 도선이 남쪽의 산천을 유력하다가 남원에 이르러, 주변을 두루 살펴본 끝에 남원의 지세가 강해 진압 사찰로 이 절을 창간하고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당우가 30동이 넘었다고 전한다. 그 뒤 수차례의 흥패를 거듭하다가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의하여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임한 부사 김세평이 노계소ㆍ신도계 등과 협의하여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고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깨지고 갉아먹은 석불좌상

선원사에는 ‘선원문화관’을 개관하기 위해 분주하다. 선원문화관은 남원을 비롯한 인근 문화의 산실로 자리를 잡기 위해 ‘겔러리 선’과, 어린이와 어머니들이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 이층으로 올라가면 사무실이 있고, 그 안에 높이 110cm, 무릎넓이 90cm 정도의 석불 한 기가 있다.

고려석불로 알려진 이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보면 그 풍채가 당당하다. 양편의 귀는 목까지 흘러내렸고, 목은 두터우나 삼도는 지워졌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안면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깨어지고 갉아진 모습이다.



이 석불은 원래 경내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들여 놓았다고 한다. 아마 밖에 있을 당시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듯하다. 선원사에 오래도록 다녔다는 어르신 한 분은, 이 석불은 아이를 잘 낳게 하는 효험이 있어서 사람들이 코를 갉아간 것 한다고 하신다. 현재는 여기저기 시멘트로 발라놓아 처음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다. 법의는 희미하게 그 선이 보이고 있으며, 양편의 어깨에서 타원을 그리며 가슴께로 흘러내린 듯하다. 양팔의 소매에는 넓은 소매 끝을 알아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소매 끝으로 인해 법의의 형태를 유추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장중함이 배어있는 석불이다.




이 석불은 특이하게 양손을 가슴께에서 마주하고 있다. 이런 지권인은 ‘공양인’에서 나타난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표시이다. 공양인은 두 손을 마주 잡아서 연꽃 봉오리처럼 만든다. 이러한 지권은 보살이나 제자들, 혹은 부처님을 예배하는 자와 협시불이 부처님을 찬탄하고 숭배할 때 나타내는 동작이다.

선원사 석불좌상, 천년 세월을 그렇게 비바람에 씻기고, 사람들에게 훼손이 되면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석불좌상의 수인이 ‘공양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수인의 표시인지 궁금하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앉아 공양을 드리고 있다면, 아마도 선원사를 찾아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 모든 이들의 아픔을 가시게 해 달라는.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혼자 웃고는 한다. 특히 전국의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석불 등, 불상을 볼 때 그렇다. 어떻게 시간에 따라 그 표정의 느낌이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는 그 때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즉 내 마음이 편하면 불상의 표정이 편하고, 내가 화기가 있으면 불상도 찡그린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공감이 가는 것은, 같은 불상을 보면서도 수시로 그 표정이 변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고, 어느 때는 준엄한 얼굴이기도 하다. 때로는 노여움을 탄 얼굴이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자비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불상의 표정을 보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한다,


진리의 상징, 비로나자불좌상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호저면 중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칠봉이라는 계곡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봉우리를 지나 들어가는 막다른 마을이다. 마을 끝에는 탑과 불상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용운사지 석불 좌상과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고려 전기인 11세기경에 조성된 불상이다. 최근에는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발견이 되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 매끄럽지 못한 조각이지만, 그 얼굴은 늘 웃음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불의 얼굴은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표현을 하였다. 입은 약간 앞으로 튀어 나왔으며, 입 끝이 처져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약간 앞으로 구부정한 모습이다. 코는 한쪽이 떨어져나갔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한쪽 끝은 파손이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례가 잘 맞지 않고 조각 기법은 세련되지 못하였지만, 고려 초기에 이 지역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석불의 손은 가슴께로 모아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왼손의 둘째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수인을 지권인이라고 하며, 이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의 모습이다. 대좌는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는데, 아래위로 연꽃을 큼지막하게 조각하고, 중간의 돌에는 안상을 하나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조각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투박하고 세련미는 없지만 우직한 모습으로 편안함을 주는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난 언제나 마음이 울적하거나 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는다. 항상 안면에 미소를 띠우고 있는 이 석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가 치밀 일이 생겨도 이곳이 와 이 석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노여움이 눈 녹듯 사라지기 때문이다.

늘 이 용운사지 석불좌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한다. ‘부처님, 세상이 그리 즐거우세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한가지이다. ‘그럼 즐겁지 않으면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나?’ 그 대답을 들으면 모든 노여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갖가지 표정으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불상들.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런 문화재를 보고 어찌 생명이 없는 조형물이라고 할 것인가? 오늘도 답사를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당야한 표정을 만나기 위해.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