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백성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수원화성 구조물

 

수원화성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현재의 장소로 옮긴 후 축성한 성이다. 정조대왕은 부친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천봉하고 난 후 쌓은 성이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요, 후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기위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곳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축성하였으며, 가장 강력한 군대인 장용외영을 이곳에 주둔시켜 자신의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요새로 삼았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20만 덩이의 석재, 53만장의 기와, 69만장의 벽돌, 26천주의 목재, 1845명의 장인이 거중기 등 각종 기구를 시용하여 1794년부터 28개월 만에 완공한 자연친화적인 성이다. 수원화성은 성을 축성하면서 각 공사구간별로 책임을 맡은 모든 장인들의 이름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을 제작하여 성벽에 부착함으로써, 자신이 축성한 곳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후대에 누가 그곳을 책임지고 축성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화성 시설물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 있어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시설물 중 연도와 굴뚝이 서 있는 곳이 있거나, 곳곳에 눈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19일이 우수인데 16일 아침부터 기온이 떨어지면서 눈이 날리기 시작한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눈보라가 치는 날 수원화성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남수문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지휘소 겸 인근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팔달문과 남공심돈·남암문(두 곳은 현재 유실되었다) 남수문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보라가 몰아쳐 눈을 뜨지 못할 정도지만 남수문에서 동남각루를 항해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치는 중에도 확인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각루는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함께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를 돌아보니 연도와 굴뚝이 보인다. 연도와 굴뚝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온돌방이 있다는 뜻이다. 동남각루를 돌아 뒤편으로 가니 아궁이가 있다. 수원천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으로 인해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추울 것을 염려해 온돌방을 놓은 것이다. 이런 온돌방은 서북각루에도 굴뚝과 온돌방이 보인다. 수원화성의 구조물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물들이 눈에 띤다.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동남각루를 지나 봉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눈보라가 더 심하게 친다. 며칠 안 있으면 우수인데 꽃샘추위인 듯하다. 항상 입춘이 지나고 나면 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닥친다. 동삼치를 지나 공사 중인 동이포루를 지난다. 그리고 봉돈을 앞에 두고 밖에서 인을 들여다본다.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출입이 자유로웠을 때 봉돈 안에도 병사들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창문은 까치살창을 내어 환기를 도왔다.

 

·포루 등을 거쳐 창룡문을 돌아본 후 동북노대를 지난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곳으로 동북노대는 동장대와 동북공심도 가까이에,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소재한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복노대를 거쳐 관람이 중지된 동북공심돈에 도착했다.

 

동장대인 연무대를 돌아본 후 동암문을 지나 높은 곳에서 군사들이 적을 관찰할 수 있는 동복포루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심하게 치기 때문인가?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 동복포루 역시 높은 곳이 자리하고 있다.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인 동북포루는 정자와 같은 형태로 이층으로 올리고 아래편에는 군사들이 눈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또한 이 공간은 숨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비밀공간이기도 하다.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은 1794(정조 18) 10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인 화홍문 역시 군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평소 같으면 꼼꼼히 돌아보아도 4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인데, 눈보라를 맞으며 걷다보니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바람도 점점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거세진다. 더 이상 돌아본다는 것이 어려울 듯하다. 화홍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생각해 본다.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화성의 시설물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게 만든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의 시설물들. 그저 겉으로 보고 걷기보다는 그 시설물에 얽힌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어보자. 정조대왕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기 때문에 그 시설물들이 한결 돋보이는 듯하다.

 

수원은 우리 전통문화의 중심지였다. 한 때 수원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이 집약된 곳으로 전국을 누비는 재인들이 모두 수원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그런 수원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전통문화와는 거리를 두고 서구문화에 치중한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지역이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산실이요 수백 년 동안 전통문화를 이어가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들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내팽개친 꼴이 되었다.. .

 

과거 일제치하에서도 수원은 우리나라 모든 재인이 거쳐 기던 곳이다. 제인청은 광대청(廣大廳장악청(掌樂廳신청(神廳풍류방(風流房공인청(工人廳)이라고도 하였다. 한말 재인청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삼도에 두었는데, 경기도의 재인청은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현 오산시 부산동)에 있었다.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우리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재인청이 폐청됐다. 폐청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해있던 재인의 수는 전국에 4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1925년 당시 인구 12,997,611) 그 방대한 조직은 현재의 예총이나 민예총을 능가하는 대단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재인청의 조직을 관리하던 곳이 바로 삼도의 재인청 중 당시 수원군에 소재하고 있던 경기재인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재인청 직제는 도 재인청을 비롯해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 하고, 군 소재 재인청의 우두머리는 청수(廳首)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 도 재인청의 총수였던 대방의 아래 두었던 각 도의 책임자인 도산주(都山主)로부터 행정적인 지시를 받았다. 어느 지방이던 재인청에 매였던 광대나 재인들의 행정적인 업무는 청수가 거느린 공원(公員)과 장무(掌務)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까다로운 규제 속에 생활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지금도 경기도 내의 여러 곳에 보면 광대마을, 혹은 재인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난 날 군 재인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재인청이라는 곳은 춤을 추거나, 단지 소리를 하거나 하는 예인의 집단이 아니다. 재인청이란 한 마디로 3도에 있던 모든 예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한 기, 예능조직이었다는 점이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 무속의 연구>에 의하면 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모든 재인(광대, 재인, 소리꾼, 화랭이, 춤꾼 등을 합친 모든 예술인)들을 총괄하는 자리였으며, 그 밑에는 좌우도산주가 있어 재인들을 관리했다. .

 

 

재인청의 폐청으로 뿔뿔이 흩어진 재인들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년에 걸쳐 경기, 충청, 전라 삼도에 존속했던 재인청은 폐청 이후 제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이 배운 학습을 이용해 단체를 조직해 맥을 이어갔다. 그들 중 일부가 오산 부산리에 거주하던 이용우 가계로 12대 째 대를 물린 전형적인 산이계열의 집안이다.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의 경기재인청 도산주인 이종하의 집에는 경기도 창제도청안1, 경기도 재인청 선생안1, 경기도 창재청2책이 있어서,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 년에 걸쳐 재인청에 소속되었던 재인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우리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 활동무대는 수원화성이었다.

 

이렇게 방대한 조직으로 운영되던 재인청이 사라지고 난 뒤, 현 수원화성행궁 운한각 옆 풍화당에 거주하던 고 이동안은 이곳에서 재인청 춤 선생인 스승 용인춤꾼 김인호로부터 전수받은 경기재인청춤을 제자들에게 전승시켰다. 또한 이용우도 수원영동거북산당을 근거지로 경기도당굿을 전승시켰으며 인천 동막, 부천 장말 도당굿 등에서 지역에 전승되던 전통예술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재인청이라는 거대한 민간예술조직이 와해되고 난 후 기능을 가진 각 예인들은 파별로 전통문화를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이용우와 이동안의 예술세계는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산주 이종하의 아들 이용우는 많은 재인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기도당긋이 19901010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화성출신 이동안 역시 경기도재인청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 이동안은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손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화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 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동안은 용인의 재인청 춤꾼 김인호로부터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는 줄타기를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로 지정받았다.

 

 

재인청 폐청 100년의 아픔, 이제 수원에서 되살려야 한다

 

이렇게 많은 뛰어난 예능을 보유하고 있던 재인들이 모인 경기재인청. 이동안이 수원화성 운한각 풍화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수원은 전국의 수많은 예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런 경기재인청이 폐청된지 올해로 100. 100년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일 년 동안 수원에서 무대에 오르는 전통공연을 보면 미비하다. 그래도 이용우 가계와 이동안 가계로 이어진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몇몇 후학들이 애를 쓰고 있지만,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지원은 극히 미비한 상황이다. 40여 년 동안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년 공연을 두 차례씩 벌이고 있는 안택굿 명인 고성주는 한 번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늘 자비를 들여 무대를 마련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국의 수많은 전통예술인들을 관리하고 전통문화를 지켜왔던 경기재인청. 그 중심에 있던 수원으로서는 재인청 폐청 100년이 지난 2020년을 맞아 수원의 정신적 중심으로 남아있는 경기재인청에서 이어진 전통예술을 찾아 그 정체성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현재 수원화성에는 공심돈 두 곳(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이 소재한다.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화성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공심돈과 남수문 사이에 남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암문은 화성 안에서 형벌을 받고 형을 당한 죄인이나 성안 백성이 죽으면 이 남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런 역할을 하던 남암문도 사라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팔달문 앙 편 끊어진 곳에 자리했던 남공심돈, 남암문, 은구와 팔달문 양편에 적대는 찾을 수가 없다.

 

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되던 곳이다. 공심돈은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높게 조성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많은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총안과 현안 등을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남수문 옆 지장물 철거가 주는 의미

 

현재 남수문에서 팔달문 방향으로 약간 휘어진 곳에서 성이 끊겨있다. 남수문은 1846년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922년 대홍수 때 남수문이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가 남수문이 복원되어 현재는 42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2012년 수원시는 90년 만에 남수문을 복원하였다. 동남각루 경사진 곳에서부터 새로 성을 축성하고 남수문을 복원한 것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것을 감안해 수문 안쪽으로 장마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들을 걸러낼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물이 급격히 불어나도 많은 물이 수문에 영향을 주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2년 남수문을 복원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이 복원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도 그 이상의 공사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다시 화성의 끊긴 부분을 공사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이미 화성의 자리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화성을 복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언제 만날 수 있을까?

 

27, 남수문 안쪽에 현수막이 한 장 걸려있다. ‘남수문 옆 소공원 지장물 철거공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남수문 안쪽 성벽이 끊어진 곳에 서 있는 건물에 공사용 가름막이 쳐져있다. 이제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먼저 성터에 서 있는 건물들을 매입하고, 지장물을 철거한 후 성벽을 쌓기 시작해야 한다.

 

이번 화성사업소에서 하는 공사는 현재 그동안 남수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상가건물들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234~2, 33~6, 35, 32~2번지 등으로 현재 수원남문고객센터 건물만 남겨놓고 그 인근 건물이 모두 철거대상이다. 이 건물들이 철거돼야 끊어진 성벽과 잇대어 공사를 할 수 있고, 남암문과 남공심돈을 복원할 수 있다.

 

202013일까지 지장물 철거공사를 마치고나면 남수문 옆에서 끊어진 채로 놓여있던 화성의 일부분이 다시 이어지게 된다. 물론 그 공사를 마친다고 해도 화성전체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많은 공사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구간이라도 이렇게 연결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수원화성이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지장물 철거공사 안내판을 보면서 벌써 남공심돈과 남암문의 모습이 그려진다.

 

화성 풍경을 작가의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전시회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는 팔달구 행궁동 행정복지센터 1층 민원실에 소재하고 있는 갤러리이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는 이곳 출신인 정월 나혜석을 기리는 곳으로, 행궁동 주민들과 행궁동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전시공간이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는 매달 2명의 작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작가 중 한 명은 화가나 사진작가들이 초청된다. 이들의 전시공간은 민원실을 들어서면 좌측 벽면과 2층으로 오르는 계단입구 벽면에 작품을 전시한다. 그리고 민원실 좌측 유리전시관 안에는 공예작품을 전시한다. 한 달에 한 번 작가들의 작품이 교체되지만 11월 정월행궁나라 갤러리 초대전 공예작가는 인두화작가인 우송연의 인두화 작품이 지난달에 이어 계속 전시되어 있고, 벽면 화가 초대작가는 유화를 그리는 민병순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인두화 작가인 우송연 작가의 작품이 지난달에 이어 11월에도 전시되어 있는 것은, 공예작가의 섭외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가만 교체가 되어 민병순 초대전으로 바뀌었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의 전시는 매달 1일에 시작하여 한 달 동안 전시를 하고 작가들을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다.

 

 

행정복지센터에서 화성을 만날 수 있는 정월 행궁나라 갤러리

 

15,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내린다. 비가내리는 날은 취재를 한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특히 비가내리는 날 야외로 카메라를 휴대하고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휴대폰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 자료를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를 찾아갔다. 민병순 작가의 작품을 만나기 위함이다. 민병순 작가는 현재 연홍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청도국제미술제 출품(한국미술창작협회), 홍익 화우회 38주년 전(정 갤러리), 연홍 미술관 개관 가념전(연홍미술관), 연홍회 전기 전시에 다수 출품했으며, 대한민국 에로티즘미술작품 공모대전에서 특선을 한 바 있다.

 

성안마을 행궁동에 살아가며 만나는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을, 골목의 소박함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붓으로 천천히 담아보았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의 그 장소처럼 소중한 순간들을 그림을 통해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작가노트에서 민병순 작가는 성안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성안마을에서 화성의 모습을 작품으로 그려냈다. 전시된 작품들이 수원화성과 연관이 있다.

 

 

늘 보아오던 정겨운 모습이라 더 반가워

 

그동안 정월행궁나라 갤러리에 작품이 바뀔 때마다 찾아가보았다. 다수의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월 초청작가인 민병순 작가의 작품은 늘 보아오던 모습을 작품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친근감이 인다. <서북각루의 가을>이라는 작품은 가을이 되면 서북각루 밖으로 억새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성벽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 수원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북수문인, 서포루의 한 낮과 화홍문 등도 만날 수 있다. 민병순 작가는 그렇게 화성의 모습을 그려냈다. 늘 수원화성을 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림만 보아도 어느 계절인지, 어디인지 일 수 있다. 눈에 악은 낯익은 모습이라 더 정겹다.

 

행궁동 행정복지센터 정월행궁나라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정겨운 모습.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를 찾아가는 것은 화가들의 작품과 공예작가들의 작품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 정월행궁나라 갤러리를 찾아가보면 유화 민병순 작가의 화성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작가의 작품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돌아보며 쐐기흔적 찾아보기

 

가끔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가 있다. 한 인터넷 언론에 몇 년 동안 1,500건이 넘는 문화재에 관한 기사를 송고하다보니 나름 그 방면에서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하다, 가끔은 사진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고, 계절에 맞는 문화재 여행에 대해 좋은 곳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도 받는다.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화성을 돌아보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지정 사적 제3호이다. 그만큼 문화재로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난 수원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꼭 한 가지 제안하는 것이 있다.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화성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화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는지, 또 성을 쌓은 돌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흔히 성돌을 뜬 곳을 부석소라고 한다. 큰 바위를 나르기 좋게 잘라 화성축성의 현장까지 옮겨왔다. 수원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찾아가보면 돌을 떴던 큰 바위에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바위를 잘라내기 위해서 홈을 파 그곳에 나무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어 올라 바위를 쪼개낸 현장이다. 그런 현장을 돌아보면 수원화성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축성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팔달산 곳곳에 남아있는 돌 뜬 흔적

 

9일 오전, 수원을 찾아 온 지인들을 인내하여 지동순대타운에 들려 순대국밥을 한 그릇씩 먹은 후에 우선 화성을 돌아보는 것으로 돌을 뜬 곳을 찾아나섰다. 먼저 이들에게 알려줄 것은 바로 화성을 쌓은 돌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억새가 피어 아름다운 동남각루를 지나 화성을 돌면서 성벽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팔달산에 있는 성돌을 뜬 흔적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로 318(교동) 팔달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수원중앙도서관 옆으로 팔달산으로 오르는 소로가 있다. 이곳을 걸어 팔달산 위 수원화성 성벽을 보고 오르면 4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돌을 떠내느라 파 놓은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1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6960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 위로 올라 화성 성벽을 따라 성 밖으로 걷다보면 여기저기 바위가 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깨진 돌을 찬찬히 살펴보면 쐐기자국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문화재 안내를 할 때 꼭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 현장 입구까지만 안내하고 정작 현장은 스스로 찾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이 필요한 문화유적을 찾았다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오래도록 문화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짙어진 숙지산 부석소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 소재하고 있는 숙지산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이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1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했단다.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1100덩어리, 여기산 62400덩어리, 권동 32천덩어리, 팔달산 13900덩어리 등 189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

 

가을이 깊은 숙지산의 돌뜬 흔적은 여러 곳에 보인다. 그중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화서다산도서관 뒤편에 있는 흔적이다. 여러 곳에서 돌을 뜬 후 수레를 이용해 돌을 화성 축성역장으로 날랐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옮겼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여기산에서도 성돌을 떠내

 

서호를 내려다보는 구릉처럼 솟아있는 산, 바로 여기산이다. 여기산(麗岐山)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길 우측 아래로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뜬 곳으로 기록되어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본다. 바위의 크기가 엄청나다. 어른 키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바위에 돌을 떠내기 위한 쐐기자국이 보인다. 절개된 바위 면에 선명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 파 놓았던 구멍이 있다.

 

가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 계절에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좀 더 스토리가 있는 야행을 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단지 지나치면서 수원화성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좀 더 알차고 내실있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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