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팔각형으로 조성한 간결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충주 미륵대원지 석등(忠州 彌勒大院址 石燈)’은 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보물 제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과 버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한 겨울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미륵대원지. 그곳에서 만난 석등은 그저 아무런 밀도 없이 그렇게 눈 속에 파묻혀 있다.

 

미륵대원지 석등은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 , 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했다. 받침 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위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으며,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졌다. 꼭대기에는 8각의 낮은 받침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미륵대원지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함께 서 있는 석불입상, 5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오측석탑을 중앙에 두고 양편에 석등이 서 있다.

 

 

이 두 개의 석등은 사각 석등과 팔각 석등은 모두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지를 처음 석굴사원으로 보성할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석등은 간결하지만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석등에 쌓인 눈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하기에 문화재 답사는 사계절을 다 돌아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문화재는 여름철에 더 아름답고, 또 어느 문화재는 겨울철에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미륵대원지야 말로 겨울철에 가야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한 겨울에 눈 속이 묻힌 석등을 바라보면서 다음에는 봄철에 이곳을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 소재한 보물 제96호 미륵리 석불입상. 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이상하게 깊은 겨울, 그것도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이곳을 찾게 된다. 아마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이 미륵리 석불입상을 찾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왜 이렇게 거대한 석불입상을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거대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보개석까지 합하여 모두 여섯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하나의 거대한 불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돌을 이용해 거대 석불입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북향을 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와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후,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도 전한다. 마의태자는 덕주산에 있는 덕주공주가 새긴 마애불과 마주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단지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석불입상은 석굴식 전각 안에 모셔놓았던 것으로 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이 미륵입상이 서 있는 좌우와 뒤편으로는, 거대한 돌들을 이용한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앞과 위로는 목조로 된 전각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타버렸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불입상의 형태가 고려 초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거대석불의 특징을 보이는 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리 석불입상은 그 전체적인 조형은 투박하다. 신라의 석불처럼 섬세한 면은 떨어진다. 머리에 쓴 옥개석은 팔각형이며, 육계는 나발이 있다. 양귀는 큼직하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를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으로 하였으며, 눈은 가늘게 반개를 해 감은 듯하다. 코는 우뚝한데, 인중이 짧아 입과의 사이가 멀지 않다. 입술은 두툼하고, 목은 굵게 표현해 삼도가 뚜렷하다.

이러한 안면의 코와 입이 가깝게 표현한 것은, 멀지 않은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석탑에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얼굴과 흡사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처리를 했는데, 옷 주름 등은 모두 약식으로 처리되었다. 얼굴을 중점적으로 공을 들여 조성을 한 것에 비해, 나머지 부분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선은 발끝까지 통으로 되어, 굴곡이 없이 조각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의 공통적인 점이다. 이런 점을 보아 미륵리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미륵리 석불의 팔의 모습도 형체만 겨우 살렸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들어 손등을 보이게 했으며, 복부 위에 대고 손바닥을 위로하여 둥근 물체를 들고 있다. 둥근 물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석불의 조성한 내력으로 보아 무엇인가 간구를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누가 조성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이 석불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전문적인 석공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견줘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어깨 위 부분과 그 아랫부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어깨 위의 돌은 흰색을 띄고 있는데 비해, 아랫부분의 돌은 검은색이 많이 나타난다. 6개의 돌을 쌓아 조성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이보다 더 큰 거대석불을 조성할 때도 일석, 혹은 이석 정도로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을 처음으로 조성한 사람이 마의태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뒤편에 만든 석굴의 형태도 그렇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석굴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마의태자가 이 석불입상을 조성했다고 하면, 석굴암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마의태자 조성설에 무게를 두어

정확한 문헌이 없이 구전으로 전해진 마의태자의 조성설(造成說). 마의태자는 신라의 부흥을 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신라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다. 휘가 김일이며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로 불린다. 이 마의태자가 신라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길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충주를 거쳐 원주를 지나 인제 설악산 기슭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 지리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현재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인 미시령을 중심으로, 북쪽은 금강산이고 남쪽은 설악산이 된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마의태자가 충주에 도착하여 미륵대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다. 이런 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일행이 따르고 있었으니, 그 중에 석공기능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석굴암을 따른 석굴을 조성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또 하나 석굴암에 조성된 본존불은 백색의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다. 미륵리 석불입상의 얼굴이 백색인 이유는 그런 점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의 이 지역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불상을 건립한다고 했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연 중앙의 뛰어난 기능을 가진 석공들이 아닌 향리의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년대나 조성 경위 등을 알 수 없는 미륵리 석불입상. 그런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미륵입상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석굴을 보면서 그저 감탄을 할 수밖에. 언젠가는 이 전설에 얽힌 이야기가 밝혀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