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지동 벽화골목은 2년 째 조성 중에 있다. 첫해에는 창룡문을 나오면 주차장을 지나 게이트 볼 장에서 시작하는 1번 골목이다. 1번 골목의 벽화 길은 350m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해는 제일교회 아래쪽에 680m에 그림을 그렸다. 1번 골목 중간에는 빈집 하나가 볼썽사납게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동 마을만들기를 전담하다시피 한 지동주민센터 기노헌 총괄팀장이 이 집을 주인에게 무상 임대를 하여 구조변경을 하였다. 이 집의 용도는 되살림 발전소라 명명을 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집을 수리하기 시작해, 이제 그 개관일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315일 오후 이곳을 찾아보았다.

 

말끔히 단장을 한 되살림 발전소의 외부

 

말 그대로 되살림일세.

 

되살림 발전소앞에는 일꾼 몇 사람이 무엇인가 열심히 페이퍼로 갈아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마침 실내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던, 지동벽화길 조성 총 감독인 유순혜 작가가 대답을 한다.

 

마을에서 못쓴다고 내다가 버린 것을, 잘 갈아내고 색을 입혀 리폼을 하려고요. 그래서 되살림 발전소 가구로 사용할 겁니다. 쓰레기도 줄일 수 있고, 되살림의 의미도 있고요.”

 

그리고 보니 되살림 발전소라는 것은, 모든 것을 되살린다는 말이다. 주민들의 생활을 되살리고, 이웃 간의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살린다. 또한 여러 가지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 때문에, 땅에 떨어진 지동의 과거의 정체성도 되살린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감이 있고 그래도 이웃 간에 사랑이 넘치던 지난날의 생활로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지난 해 낡고 흉물이던 집을 늘리고 고치기 시작했던 때 

 

공방으로 꾸며 주민들의 소득에 보탤 것

 

지동주민센터 기노헌 팀장은 이 되살림 발전소에 공예품을 만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는 대답이다.

 

이곳은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으로 꾸밀 것입니다. 지전공예나 가죽공예, 섬유공예 등을 주민들에게 가르쳐, 그들이 직접 제작을 해 판매를 할 수 있도록 하려고요. 마을 어른신들 중에서 한 종목에 5명 정도를 선정해 교육을 시키고,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예품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판매를 해서, 그 수익금으로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실내 페인트 작업

 

판매소도 이 되살림 발전소를 비롯하여, 제일교회 일층에 들어 설 북카페와 판매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판매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원은 축제가 많습니다. 그런 곳에 공예품을 진열해 소득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제대로 마을만들기 사업만이 아니고, 정말 되살림 발전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순혜 작가는

 

이미 모든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이 되살림 발전소가 개관을 하게 되면, 바로 교육에 들어가려고요. 이곳에 와서 주민들에게 공예를 가르칠 선생님들도 다 선정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드는 공예품은 우리만의 고유한 모델을 만들어 브랜드화 시킬 것입니다 라고 한다.

 

버려진 가구를 가져다가 페이퍼로 갈아내고 있다. 리폼을 해서 사용하겠다고 

 

앞으로 되살림 발전소는 주민들의 사랑방 겸 공방으로 거듭 나, 화성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할 것으로 보인다. 지동 되살림 발전소가 개관을 하는 날은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함께 하고 싶다.

선소유적지. 사적 제392호인 선소유적은 여수시 시전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선소유적은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게 한 거북선을 최초로 건조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인 1591년, 이곳 여수에 전라좌수사로 부임을 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는 선조 26년인 1593년 8월부터, 선조 34년인 1601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이곳은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수군이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배를 만들고 숨겨두었다는 굴강

그리고 보니 벌써 선소유적을 다녀온 지가 꽤나 시간이 흘렀다. 10월 10일 여수를 답사하면서 다녀온 선소유적. 선소유적 입구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표석으로 삼았다는 벅수가 나란히 한 쌍이 서 있다.

이곳 선소유적은 지도상으로 보면, 가막만의 가장 북쪽에 조선소가 있다. 현재 이곳 선소유적지 안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과 칼과 창을 만들던 ‘대장간’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칼과 창을 갈고 닦았다는 ‘세검정’과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등을 돌아볼 수가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이 말은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한 수군의 거점인지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곳 선소는 나라를 구하는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선소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바닷물을 돌로 쌓은 방파제가 있다. 입구는 좁게 만들어 놓아, 배를 숨겨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굴강’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조선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군사항만 시설이다. 여기에서 고장난 배를 수리하거나, 군사물자를 배에 싣고 내린 곳이라고 한다.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를 흡사 작은 만처럼 조형을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선소주변에는 승리의 함성소리가

선소의 중심부에 마련된 직경 42m(면적 1,388㎡)정도의 굴강. 거북선 두 척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굴강은, 깊이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서 바닥까지는 5~6m 정도가 된다. 북쪽으로 난 굴강의 입구는 폭이 9m 정도에 이르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축대는 자연선과 깬돌로 막쌓기를 하였다.

이충무공 선소 유적지는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1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7종에 94개, 자기류 2종에 13개, 기타 4종에 18점이 출토되었다. 1985년 2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5종에 21개, 자기류 4종에 387개, 기타 4종에 44개가 발굴이 되었다.





이곳 굴강에서 서남방향으로 20m 부근에는 ‘세검정(洗劒亭)’과 군기고가 현재 복원되어 있다. 항상 검을 닦고 갈았다는 세검정. 그 마루에 앉아 앞으로 보이는 바닷물을 바라본다. 400여 년 전 해전에서 승리를 하고 난 거북선과 수군들이 이 세검정 앞을 지나면서, 승리의 환호로 이곳이 떠나갈 듯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선조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던 이곳 여수 선소유적. 그곳 세검정 마루에 걸터앉아 자리를 뜨질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함성이 그립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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