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남과 나눌 수 있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다고 한다. 꼭 가진 것이 많아서 나누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야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나눌 수는 없다. 일 년에 몇 차례 자신의 이웃들을 위해 마음으로 나누며 사는 사람이 있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거주하는 고성주씨(, 60)가 바로 그이다.

 

올 해만 해도 벌써 몇 차례 인근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한 여름 더위가 시작되던 초복에는 삼계탕 200그릇을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대접을 했다. 전날부터 그 더위를 이겨가면서 불을 떼고, 200마리의 삼계 닭을 사다가 끓였다. 지동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집으로 초청해 삼계탕 대접을 한 것이다.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아

 

마음에 여유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 그 복중에 200명 분의 삼계탕을 끓여 사람들에게 대접을 할 수 있겠는가? 심성이 착하다고 해도 그렇게 가정에서 사람들에게 대접을 한다는 것이 결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어르신들을 모셔 대접을 하고는 한다.

 

16일에 고성주씨의 마당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마당 가득 쌓인 절인 배추들. 그 전날인 15일에 모두 절여놓았다가 김장을 하는 것이다. 고성주씨는 무속인이다. 스스로 만신이라고 자청을 한다. 경기안택굿 보존회의 회장인 그는, 자비를 들여 매년 안택굿을 이어가기 위해 무대에 올린다. 그렇게 바삐 살아가면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대접을 한다. 이 집은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에는 지동 벽화골목에 조성 된 시인의 벽에 글을 쓰기위해 지동을 찾아 온, 수원시인협회 회원 25명에게 삼겹살을 대접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고성주씨가 김장을 하는데 자그마치 배추 700포기를 한다는 것이다.

 

독거노인들께 나누어 줄 김치

 

배추 700포기는 배추 값만 해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김장을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

저희 동네에는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매년 30분 정도에게 김장을 해서 나누어 드리고 있어요. 그분들에게 10포기씩만 갖다드린다고 해도 300포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주어야 하고요.”

 

 

그래서 700포기나 되는 김장을 한다는 것이다. 고성주씨가 이렇게 해마다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 자신이 만신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이웃에게 베푸는 일이 곧 자신의 수양부리(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고성주씨는 아범, 어멈이라고 부른다. 나이가 많아도 수양부리들은 고성주씨에게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다. 이것은 과거 단골네들의 습속으로 고성주씨는 이 시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단골이다)들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매년 이렇게 많은 김장을 하시고 나면 몸살을 앓아요. 그래서 말리고는 하지만 한 해도 가르지 않아요. 혼자 사시는 분들이 김장을 하지 못하면 한 겨울 동안 무엇으로 사시느냐고 걱정을 하죠.“

 

 

김장을 통에 담던 한 수양부리의 말이다. 그렇게 매년 나눔에 익숙해져 있는 고성주씨. 커다란 통에 김치를 꾹꾹 눌러 담는다. 그것이 모두 독거노인들께 나갈 통이라고 한다. 이틀 동안 배추를 절이고 속을 버물리고, 김장을 마친 시간은 해질녘이 다 되어간다. 700포기 김장을 하기 위해 사용한 용기들만 해도 엄청나다.

 

해마다 이렇게 나눔을 연례행사처럼 하고 있는 고성주씨. 김치를 담은 통을 들고 이집 저집 찾아다닌다. 독거노인 분들이 사시는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올 한해 나눔의 마무리인 김장. 700포기 김장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연말이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전화로 혹은 이메일로 인사들을 한다. 일 년 동안 잠잠하던 사람들도 연말이 되면 조금은 궁금해지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연말과 새해가 되면,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원하기도 한다. 누구는 건강을, 누구는 금연을, 또 누구는 대박의 꿈도 꾼다. 하지만 세상사 그리 만만치는 않은 듯.

연말과 새해, 요즈음 시쳇말로 ‘가는 해 붙잡지 않고, 오는 해 막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세월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진시황제도 가는 세월을 막아보려고 동남동녀 오백 인을 배에 태워 불사약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황천길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경북 영주에 있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모습

(恨)이 배어있는 ‘위리안치지’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만 할까? 다음 뷰에 송고를 한 글 중에 ‘위리안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 형벌 중에 가장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이 ‘위리안치’라는 형벌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고,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있다.

‘위리안치’란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 사람을 가두어 두는 형벌을 말한다.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이곳 집 한 채 주변에 없는 벌판에서 형인 수양의 욕심으로 인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위리안치를 당한 곳이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하지만 형의 왕좌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위리안치를 당한 것이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처형이 된 순흥으로 유배 당하는 모습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거사를 일으켜 수양을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가장 극악한 형벌 중 하나인 위리안치

다시 설명하지만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위리안치를 당하면 허허벌판 돌 웅덩이 안에 갇혀 처형이 되기를 기다린다.

위리안치지는 처형을 당할 때까지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그러나 그 ‘옥(獄)’이라는 곳이 일반적인 옥과는 다르다. 주변에 인적이 없는 벌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어 둔다. 안은 발을 뻗을 수조차 없는 곳이다. 누울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웅덩이.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온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곳이다. 아마도 처형을 당하기도 전에 미리 기암을 하지나 않으려는지 모르겠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가시가 돋은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위리안치지 주변은 가시가 많은 탱자로 울타리를 쳐놓아 나갈 수가 없다.

마음의 '위리안치’에서 벗어나자

이러한 위리안치는 꽁꽁 갇혀있는 곳이다.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 이런 위리안치지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걸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위리안지치에 갇힌 사람들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집과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만일 내 마음 어딘가에 꽁꽁 닫힌 곳이 있다면, 과감히 마음의 벽을 허물고 벗어나야만 한다.

가는 해와 오는 새해. 우리 마음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둔 위리안치는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 소통과 화합을 말로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위리안치지에서 툴툴 털고 나오는 자유를 만끽하자. 스스로의 마음을 위리안치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행복일 수 없으니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연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그 중 연리목이나 연리지를 보면, 꼭 무엇인가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연리목이란 나무와 나무가 결합이 되는 것이고, 연리지란 가지와 가지가 결합이 되어 한 나무처럼 자라나는 것을 말한다. 남원 선원사에 가면 어미나무와 아들나무에 대한 가슴 저린 나무가 있다.

아들나무를 위해 속을 다 빼준 어미나무. 아마 우리 세상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이 나무를 보고 어머니를 그리며,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던 것도 정말 사무치는 그리움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나무에게서 배우는 애틋한 어머니의 사연. 과연 사람들은 그 나무에게서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까?


자식나무를 살리려고

과학적으로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러나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그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무의 수령을 보아도 상당히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원사는 신라 때 창건된 절이다. 언제 부터인지 현재 일주문 옆에는 큰 고목 한 그루와 작은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나무는 늘 큰 나무에 가려 햇볕을 제대로 받고 자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세상이 흘러 튼 나무는 점점 더 실하게 자라는데 비해, 그 옆에 자라는 작은 나무는 늘 잎이 실하지 못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생육이 원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나무를 어미나무와 자식나무라고 불렀다.


담장 안에 있는 나무는 속이 텅 비어버렸다. 담밖의 가지에 걸쳐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어미나무의 가지 하나가 자식나무의 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태풍이 친 것도 아닌데, 어상하게 어미나무라는 큰 나무가 자식나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어미나무는 점점 자식나무 쪽으로 기울어졌고, 자식나무에게 연결된 가지는 자식나무의 한 줄기처럼 단단히 붙어버렸다.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하게 어미나무의 밑 둥이 비어가는 것을 보았다. 자식나무에게 자신의 속을 다 내주고 있는 어미나무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어미나무의 속은 완전히 비어졌다. 그 어미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자식나무는 잘 성장을 하여 커다란 느티나무로 변했다. 그 가지에는 여전히 어미나무의 가지를 붙든 체. 지금은 기운이 없는 어미나무가 자식나무에게 기대고 있는 형상이다. 늙고 병든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자식의 모습과 같은 향상으로.


속이 텅 빈채로 살아가는 어미나무

연리목에게서 배우는 어머니의 헌신

“사람들도 저렇게 자식을 키우죠.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은 다 똑 같아요. 자식을 위해 속을 저렇게 썩이는 겁니다. 저런 부모님의 마음을 자식들이 알고 있다면, 다시는 속을 썩이는 일이 없을 겁니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의 이야기다. 늘 저 나무를 보면서 어미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 나무가 그렇게 속이 비어버린 까닭은 바로 자식을 위해서다. 속이 다 비어버린 고목. 껍질만 남은 나무는 벌어진 껍질 사이로 담이 보일 정도이다. 그렇게 자식을 위해 속을 비어버린 어미나무다.


속이 빈 어미나무. 껍질만 남아 갈라진 곳으로 담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참담한 마음이다. 우리 어머니도 저런 희생의 마음으로 날 키웠을 텐데. 이제 후회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에게서 배우는 어머니의 마음. 내일은 꽃 한 다발 사들고 찾아뵈어야겠다. 괜한 눈물이 흐른다. 낙엽이 쌓인 모습때문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