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자 전원이 프로의식이 넘치는 열정무대 만들아 즐거움 배가

 

출연자 전원이 말 그대로 프로였다. 프로란 전문가들을 일컫는다. 어떤 분야가 되었던지 프로는 아름다운 법이다. 27일 오후, 수원남문로데오거리에 소재한 남문로데오아트홀 무대에 올려진 20회 재인의 향연무대. 춤과 소리, 굿 등 총체예술무대로 마련된 이 공연의 출연자는 고작 14명이었다.

 

14명의 출연자가 10종목의 굿과 춤, 소리를 감당해 낸 것이다. 한 사람이 많게는 5프로 이상을 소화해내며 꾸민 무대였다. 27일 오전 10시부터 무대를 준비한 출연자들은 오후에 한 차례 무대연습, 또 한 차례의 리허설, 그리고 오후 7시 공연까지 세 번의 공연을 감당해 낸 셈이다. 제인청의 프로그램이 일반적은 무대공연예술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출연자 일인당 두 시간 이상의 공연을 한 셈이다.

 

e수원뉴스 하주성 기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공연은 며칠 동안 퍼붓다시피 한 장맛비로 인해 극장 안은 냄새가 나고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은 끝까지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함께 즐기는 모습이었다. 재인청 기본무로 시작한 이날 공연은 두 시간이 넘도록 진행되었으나 아쉽다라는 말로 이날의 공연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재인들의 무대는 진행부터 모든 것이 다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분들은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는 공동체문화라는 점입니다. 일제가 1920년대 우리문화말살장책을 펼친 것도 우리문화가 바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만드는 공동체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분들은 재인의 향연 공연을 관람하시면서 바로 우리민족의 끈끈한 공동체를 배워 가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회자는 재인의 향연무대는 공부하는 공연이라면서 팸플릿 안에 모든 설명을 다 되어있으니 집에 가져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진행을 보는 순간에도 사회자는 프로그램의 설명보다 공연자들의 특징과 자랑, 그리고 우리문화의 자랑스러운 점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무대를 진행했다.

 

또한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공연관람 시 지켜야할 예절과 어떻게 공연을 관람해아 바로 본 것인가? 등에 대해서 알려주는 시간을 가져 기존의 무대공연에서 보던 진행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진행했다. 그런 색다른 진행을 일일이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관람객들까지 보여 재인의 향연 무대는 말 그대로 공부하는 공연임을 알 수 있는 무대였다.

 

 

최선을 다한 공연자들, 신명나는 무대 만들어

 

이날 무대에 오른 공연은 굿과 춤, 소리 등으로 구분됐다. 굿은 경기 안택굿 명인 고성주의 제석굿과 경기도무형문화재 제58호 안산잿머리성황제 이수자인 김진섭의 신장·대감굿이 순서에 선보였으며 반주에는 피리에 곽승헌, 바라는 전형길이 담당했고, 굿을 진행하는데 도움은 이은애와 전승훈이 도맡았다. 굿을 하는데 있어 장단은 전문적인 굿을 하는 무격이 맡아하게 되므로 고성주 명인과 김진섭 이수자가 번갈아 맡아했다.

 

가장 많은 종목이 무대에 오른 재인청 춤은 재인청기본무, 교방무, 엇중모리신칼대신무, 노들강변, 살풀이춤, 한량무 등이 무대에 선보였다. 재인청 기본무는 어려서부터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 재인청 춤을 사사 받은 고성주 명인 외에 문하생인 김현희, 김미경, 박미애 등이 추었다. 이들 무대에 오른 공연자들은 모두 20년 내외의 춤을 춘 춤꾼들로 말 그대로 춤생춤사한다는 사람들이다. 이미 전국무용경연대회 등에서도 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외에 살풀이춤과 한량무는 고성주 명인이, 교방무와 엇중모리신칼대신무, 노들강변은 김현희, 김미경, 박미애 등이 담당했다. 소리는 남도소리로 조진숙의 심청가 중 심봉사가 잔치에 가는 대목을 불렀으며,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춘향가와 적벽가 이수자인 강승의와 문하생인 양용자, 조진숙, 이정은이 성주풀이 등 남도민요를 관객에게 들려주었다. 추임새를 넣어가며 신명나는 장단을 친 진민구 고수는 전국고법대화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한 판소리 전공을 한 실력자이다.

 

최고의 프로들이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다운 무대인 20회 재인(才人)의 향연. 2시간 20분이라는 긴 시간을 관람석 맨 앞자리에 앉아 끝까지 지켜 본 한창석 수원시 주민자치협의회장은 공연이 빨리 끝나버려 아쉽다고 했다. 이날 공연에는 남문로데오상인회 천영숙 회장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공연이 끝나고 출연자들이 모두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할 때까지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는 멋진 공연이었다. 공연 마친 후 고성주 명인은 최선을 다했가 때문에 모든 것이 완벽한 무대였다고 했다.

 

“32살에 내림을 받았습니다. 그 전부터 이미 신통이 되었는데 계속 거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너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제가 종가집에 종부인데 어떻게 이 길을 걷겠어요. 당시만 해도 무당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할 때인데요. 그리고 시집이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아무도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죠.”

 

사연이 없는 기자(祈子)란 없다. 누구나 내림을 받기 전에 고통을 먼저 받는다. 대개는 이를 무병(巫病) 또는 신병(神病)이라고 한다. 신병은 여러 가지로 찾아온다. 물질적으로 오는 경우는 이유 없이 많던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딱히 돈을 나갈 이유도 없었지만,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시집을 와서 찾아온 신병

 

또 한 가지는 정신적인 신병이다. 헛것이 보이는 환시(幻視) 현상에, 소리가 들리는 환청(幻聽) 현상까지 겹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병원에 가도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함께 찾아오면 그 누구도 버티기가 힘들다.

 

결국엔 내림을 받게 되고 만다. 그리고 나서야 아프던 몸도 나아지고, 우환이 들끓던 집안도 잠잠해진다. 신병을 앓으면서도 계속 내림을 받기를 거부하면 급기야는 인다리현상이 나타난다. 주변에 가족들이 한 사람씩 죽어나가는 것이다. 인다리란 사람으로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병이다.

 

남편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제가 이런 신병이 있다는 것을요. 참 갑갑한 시간이었죠. 결국엔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이 가루가 되는 듯한 고통이 와서야 내림을 받았죠. 세류동에 거주하시던 정종화 선생님께 내림을 받았는데, 당시는 수원에서 가장 잘 불리는 분이셨어요.”

 

 

신혼 초부터 이상한 것들이 보여

 

23세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혼 때 시집의 조상을 보았다고 한다. 종가집이다 보니 집안에 식솔들이 많아 새벽 4시면 일어나 밥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 있더라는 것. 세를 들어 사는 집 손자가 말썽을 피우고 도벽이 있어 할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마당을 서성이는 줄 알았다고 한다.

 

저는 선을 보고 두 달 만에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시집을 와서부터 시집의 조상님들을 보기 시작했죠. 그 할머니한테 아이가 속을 썩이느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보이지 않고요. 대개 시어머님이 시장을 저녁에 가는데 그날따라 일찍 장을 보러 가자고 하시데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시할머니 제사다라고 하시잖아요. 제가 본 할머니가 바로 시할머니였던 것이죠.”

 

그런데 시할머니 제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하더라는 것이다. 살아서 잘해주지 죽은 다음에 잘해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더니 억울하고 분하다라는 말이 튀어 나왔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너무 몸이 아파서 내림을 받았지만, 남편은 사람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눈물로 점철 된 시간이 흘렀다.

 

 

재주는 신령이 주지 않아요.”

 

남들은 신을 받고나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고 했는데, 신을 받고나서도 고통은 가시지를 않았다. 벌써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세 번이나 변한 것이다. 그동안 남편도 사업에서 손을 땠다. 그리고 지금은 임영복 소장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시집을 왔을 때 큰 농장을 운영했어요. 연무동에서 갈비집도 크게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비가 오고 물이 넘치면서 쪽박 하나가 그 물에 둥둥 떠다니더라고요. 한 마디로 쪽박을 찬다는 뜻이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12거리 전수소 임영복(, 59)소장. 굿판에서 만난 그녀는 굿이 남다르다. 요즈음 들어 선거리 굿을 한다고 하면 소리 지르고 껑충대고 뛰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임영복 소장의 굿채는 남다르다. 품격이 느껴진다. 곱게 걷고, 소리 잘한다. 그런 임영복 소장이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5-15 자신의 자택 지하에 연구소를 개설했다.

 

 

경기지방의 굿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성주기도도차서(巫堂城主祈禱圖次序)에 기인한다. 그런 굿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는 옛말처럼, 제대로 굿채를 익힌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주를 모든 기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요즘 기자들의 굿을 보면 저것이 과연 굿인가 할 정도로 민망할 때가 있어요. 굿은 장단, 사설, , 소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종합예술입니다. 거기다가 신탁인 공수까지 곁들여야죠. 그런데 그런 채가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12거리 전수소를 열고 1:1로 재주를 알려주려는 것이죠.”

 

굿판에서 만난 임영복 소장의 굿은 아름답다. 장단 잘 치고 소리 잘한다. 풍부한 문서까지 익혔다. 그래서 늘 굿판에 불려 다닌다. 이런 만신들을 보고 청배만신이라고 한다. 벌써 10년 세월 그렇게 팔도를 다니면서 굿판에 섰다. 그 재주를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언제 또 그 신명나는 굿을 볼 수 있을지.

 

굿판이 들썩인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어깨가 절로 출썩인다. 그 중에는 잘한다’, ‘좋다라고 추임새를 넣는 사람들도 있다. 18일 오후 6시부터 수원시 장안구에 소재한 만석공원에 마련된 수원시 제2야외음악당에서는,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가 주관하는 경기안택굿한마당이 열렸다.

 

오후 6시부터 3시간이 넘게 계속된 경기안택굿의 각 거리와,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서 전해진 제인청 춤이 무대에 올랐다. 경기도 안택굿에서는 굿을 하기 전에 먼저 대문 앞에서 풍물패들이 지신밟기를 한다. 풍물패들이 한바탕 무대 위에서 풍장을 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버나잽이의 접시돌리기로 한껏 달아올랐다.

 

 

쌀쌀한 날씨에도 구경꾼들 신바람 나

 

낮에는 조금 덥다고 느끼는 날씨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찬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계절이다. 하지만 객석에 앉은 관람객들은 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는다. 순서가 연이어 계속되면서 시간이 흐른다. 오후 830분 경. 날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안택굿의 굿거리 제차 중에 창부거리가 시작이 되었다.

 

창부는 무격들이 섬기는 예능의 신이다. 무격들에게 재주를 주고, 노래와 춤을 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격이다. 하기에 창부거리에서는 재미난 재담과 소리로 흥을 돋운다, 경기도 안택굿은 재미있다. 각 거리마다 딴 굿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보인다. 이렇게 뛰어난 예능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안택굿이지만, 전통 경기도 안택굿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요즈음은 그저 대충 굿이 유행한다. 지역적 특색도 별로 없고, 소리나 춤 등도 없다. 거의 공중으로 껑충껑충 뛰며 악이나 박박 쓰는 그런 굿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굿이 특징이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해서 굿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도, 그렇게 지역적으로 특성이 있는 굿을 지키고자 함이다. 굿을 종교가 아닌 전통문화예술로 접근하자는 시도이다.

 

관중을 사로잡는 창부굿

 

잽이라는 악사들의 음악이 흐드러지게 울려댄다. 피리, 대금, 해금과 장고, 바라 등이 조화롭게 흥겨운 가락을 만든다. 먼저 무대에 창부의상을 입은 임영복(. 54) 무녀가 등장을 했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흥겨운 노랫가락조로 소리를 뽑아댄다. 잠시 후 남무인 고성주(, 60)가 술상을 차려들고 무대로 나왔다.

 

 

경기도의 안택굿이 딴 굿과는 다르다는 것은 창부거리에서도 구별이 간다. 경기도 안택굿의 창부굿에서는 창부가 둘이다. 남창부와 여창부가 서로 재담을 풀어가면서 관중을 흥이 나게 만든다.

 

거기 창부는 어디로 오셨소?”

난 저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재주를 배우러 가려고 천안삼거리를 거쳐 이곳까지 왔소.”

한양은 무엇 하러 가시오.”

거긴 춤 선생도 소리선생도 많다고 하기에 재주 배우러 가오.”

그 양반 참 몰라도 너무 모르네. 여기 수원이야 말로 효의 도시요. 예능의 도시요. 거기다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있소. 산 좋고 물 맑은 이런 곳에 어찌 재주 많은 선생이 없단 말이요. 굳이 한양까지 갈 필요 없소

 

 

남녀가 풀어나가는 대화에 관중석에서는 맞소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두 무격은 꽹과리를 치면서 소리를 멋지게 풀어나간다. 경기도의 안택굿에서만 볼 수 있는 굿의 모습이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김헌선 교수의 사회로 세 시간이 넘게 진행된 경기안택굿한마당. 한 관람객은 연신 소리를 치면서 구경을 하는 바람에 목이 아프다고 한다.

 

경기안택굿이 이렇게 재미난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춤과 노래 등이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요. 창부거리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으면서 하는 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았어요. 우리 지역에 이렇게 대단한 굿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이렇게 재담이 뛰어나고, 춤과 소리가 어우러진 안택굿은 하루 빨리 문화재로 지정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제는 이런 굿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2~3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얼른 지정을 해서 보존해야죠.”

자장가에 숨은 힘

 

우리소리의 힘은 어디까지 일까? 그 해답은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예전 부모님들의 품안에서 자라난 시대는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지금처럼 패륜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시대에 따른 불효야 있었겠지만, 그 불효라는 것이 지금의 패륜과는 차이가 있다.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하게 변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소리를 잃어버린 후다. 어머니의 살가운 정이 느껴지는 자장가를 잊고 난 후 아이들이 변한 것이다.

 

얼마 전인가 며칠 사이에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연이어 접했다. 후배를 시켜 가족들을 죽인 사건. 강남에서 살고 싶어 어머니와 누나를 방화를 죽게 만들고, 본인은 그 시간 딴 곳에 놀라가 있었다는 얄팍한 머리를 쓴 사건이다. 더구나 출타 중이던 아버지를 범인으로 몰아가려고 했다는 이야기에 정말 어의가 없다. 며칠 후 술이 취해 어머니를 괴롭힌다고,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또 발생 해 세상을 경악시켰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왜일까?

 

 

자장가를 잃은 세대, 정이 없어

 

그저 우리 것은 모두 불량품이나 골동품 정도로 알고 있는 사고, 외국의 것이라면 ‘개똥도 보약’이라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이 나라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다. 남이야 잘못 되어도 관계없다는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물론 가정교육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교육현실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인성을 제외하고 주입식 교육에 치중한 사회가, 이런 불행한 아이들을 양산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음악교과서에 우리 전통에 대한 내용은, 고작 몇 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교육이 정체성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는 교육이라는 중요한 사안을 놓고도, 자리배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필요로 할 것인가?

 

‘우리’라는 개념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국제화만 부르짖는 정책. 그리고 제나라 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남의 나라 말부터 가르치는 정책. 이런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황폐화시킨 것이다.

 

 

 

어머니의 자장가에는 모든 교육이 들어있어

 

그 자손이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주시며 왼팔 왼젖을 물려놓고

양인양친이 그 자손의 엉둥이 허릴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아 금자동아 은이로구나 금이로구나,

만첩청산의 보배동아 순지건곤의 일월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 효자동아,

동네방네 귀염동아 일가친척의 화목동아

둥글둥글 수박동아 오색비단의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색동아

은을주면 너를사고, 금을준들 너를 사랴

 

회심곡의 한 부분이다. 이런 소리를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재우면서, 또는 등에 업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불러주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잘못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아이들은 잠재적으로 이 소리를 기억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충신이고 효자로, 동네방네 사랑을 받는 예의가 바른 아이로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리는 잠재적인 기억으로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잠재적인 기억이야말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따스한 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듣고 자란아이, 나쁘게 될 수 없어

 

소리는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검증이 되지 않은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어느 누구는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슬프게 되어버렸다. 누구는 무명시절 ‘쨍하고’를 부르더니 그야말로 쨍하고 해가 떠버렸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지도 모르는 말을 떠들어 대면서 연신 건들거리고 사는 아이들이, 과연 온전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오륜가를 들어보소. 부모 없는 자식 없고 임군 없는 신하 없다.

부모 공을 알려거든 제 자식을 길러보고, 군의신충 모르거든 효양부모 옮겨가리.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이면 임군에게 충성한다.

존장을 존대하고 친구 간에 신 지켜라. 부부간에 화목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이러고야 사람이지 저마다 사람이냐. 철모르는 짐승의 기특함을 들어보소.

 

오륜가(五倫歌)의 사설 중 일부분이다. 오륜가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갈 도리를 알려주는 소리다. 이런 좋은 소리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나쁜 일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게 모르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 새를 보고 개구리를 보고도 그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바로 어머니의 따스한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다. 어머니의 자장가는 그저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부르는 소리다. 특별한 곡조도 없다. 아이에게 사랑을 가득 담아 소리를 할 뿐이다. 그 소리 안에는 어린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러한 소리를 일어버린 요즈음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황폐화 되어있다. TV에서는 선정, 폭력이 난무하고, 컴퓨터 게임에서는 살인과 폭력이 저질러진다. 이런 것을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제는 모두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삶의 소리, 사랑의 소리, 어머니의 가슴에서 울려지는 살가운 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피부로 맞닿는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은 그 따스함을 온전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재인청에 대해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자칫 재인청이라는 곳이 어떤 특정한 전통예술을 하는 것처럼 포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던지 재인청에 속한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고 한 때는 모든 전통예술분야를 총괄하던 곳이 재인청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집단

 

재인청은 무부(巫夫)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다. 재인청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고려조부터 전해진 교방청(敎坊廳)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조직이면서도 그 안에 화랭이, 광대, 단골, 재인 등 수 많은 예인들이 속해 있었으며 아주 엄한 규제가 있었다.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과 전라도에도 있었으며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재인청의 수장은 대방이라고 하였으며 3도(경기, 충청, 전라)의 재인청을 당시 화성재인청에서 총괄을 했던 관계로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대방의 선출은 3명을 추천을 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사진 / 고 이동안 선생. 구글검색 자료 인용)

 

 

까다로운 규제속에 생활을 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서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3만 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재인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까다로운 규제 속에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재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끊임없는 학습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경기도 화성은 수많은 전통 예인들이 태어난 고장이다. 그 중에서 재인청을 기반으로 한 많은 예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해 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인간문화재이셨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14세 때 남사당패들을 따라서 부모들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가출을 강행했다. 그런 가출이 인연이 되어, 일생을 춤과 발탈로 한 생애를 보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많은 학습을 한 예인이며, 다양한 끼와 재주를 발산한 스승이셨다.

 

고 이동안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서 그의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히는 대신 서방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글공부 마다하고 광대의 길로

 

12살 때까지 그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통감을 4권까지 배웠다. 아버지가 시키는 글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공부보다도 할아버지가 부는 피리나 젓대를 몰래 가지고 놀거나 어름타기(줄타기) 흉내를 내며 노는 것에 더 재미가 팔려 있었다. 그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그는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이동안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그는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갔다.

  

14세의 어린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 이재학에 이끌려 화성집으로 끌려온 그는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광대 수업을 받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황금정에 있는 광무대에 취직을 하게 됐다. 여기서 앞으로 가기, 장단줄, 허궁잽이, 화장사위 등 17가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어름타기를 배웠으며 장단에 맞춰 줄 위에서 살판(공중회전)을 하는 법도 배웠다. 이곳에서 춤선생 김인호(일명 복돌)와, 경기 잡가와 발탈의 명인 박춘재를 만나게 됐다.

 

김인호로 부터는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북)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 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서는 줄타기를 전수받게 되었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무>,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등 30여 종에 이른다.

 

(주) 살풀이 춤의 사진지료는 어려서 부터 이동안 선생에게서 직접 재인청 춤을 사사한 고성주와 문하생들

 

고 이동안 선생의 춤은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 내노라하는 무용인들에게 전수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동안 선생이 발탈로 지정을 받게 되자 많은 춤꾼들은 이동안 선생의 춤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운학 이동안 선생의 춤. 어릴 적부터 파란만장한 생애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그의 춤은 이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안의 재인청 살풀이

 

운학 고 이동안 선생에게서 옥당 정경파 선생에게 전승이 된 살풀이는 현재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8호이다.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이 경기살풀이는 두개의 수건을 이용해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승무와 함께 지정된 살풀이춤은 무속 음악 가운데 살풀이라는 무악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경기도 재인청의 무부들은 원래 도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도살풀이를 추어왔다. 그러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처음에는 긴 천을 갖고 추었으나, 후에 그것을 반으로 갈라 두 개의 천을 이용했다고 한다.

 

원래 무당들이 신내기리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춤인데, 후에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교방 예술로 발전하여 춤의 내용이 한층 예술적으로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기법과 형식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살풀이춤은 고운 머리에 비녀를 꽂고 흰 저고리와 치마에 버선, 그리고 옷고름이 늘어진 복장에다 흰 수건을 가지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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