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 사람들은 생김새부터, 마음 씀씀이가 다 다르다. 그러니 몇 사람만 모여도 말이 많아 질 수밖에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면 속이라도 편할 것을,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에는 왜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지 모르겠다.

 

세상살이가 어디 쉬운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는 꼭 있어야 할 사람도 있고, 있어서는 안 될 사람도 있다. 요즈음은 딱 그런 사람들이 구별이 되는 듯 하다. 물론 있고 없고는 나름대로의 판단이겠지만. 

 

연리목과 같은 세상은 왜 안 돼?

 

연리목이라는 것이 있다. 연리목은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와 나무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한 부분이 합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나무와 나무가 합해지면 '연리목(連理木)'이라 하고, 가지와 가지가 합해지면 '연리지(連理枝)'라고 한다. 동일한 수목이 합해지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전혀 다른 나무가 하나로 합해지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는 소나무 연리목이 있다. 연리목은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합해지기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세상 인간사 모두가 그렇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같은 부류도 있고, 전혀 다른 부류도 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도 있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어디 한 군데 정도는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공통점이 합해지면, 인간사의 연리목이 된다는 생각이다.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매일 헐뜯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면, 그 어디 세상사는 멋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인가? 요즈음 돌아가는 세상이 그렇다. 그저 뒤숭숭하다. 한 짓을 안했다고도 했다가, 나중에는 생각해보니 한 것 같기도 하단다. 한편에서는 눈물을 흘리는데, 한편에서는 조금은 초연하다.

 

예전 우리의 생활 속에 '목도'라는 것이 있다. 산에서 큰 나무를 베어 들고 오려면 여러 사람이 줄을 묶어 양편에서 들어야 한다. 굵고 큰 나무일 때는 20명이 넘는 사람이 양편으로 갈라져, 나무에 묶은 끈을 어깨에 메고 날라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목도를 하는 사람들은 발을 똑 같이 맞추어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발이 틀리면, 제대로 나무를 옮길 수가 없다. 거기다가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소리 한 자락에서 좀 배워봐

 

오동나무 열매는 감실감실

큰애기 젖퉁이는 몽실몽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갈 때

큰맘 먹고 넘어가 발발 떤다.

 

덜크덩 쿵덕쿵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밤마실 갈까

밤마실 가기에 즐기더니

홍당목 치마가 열두챌세

 

목도꾼들이 사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무거운 나무를 어깨에 메고 내려오면서 하는 소리다. 목도소리라고 하는 이 소리는 힘이 드는 것을,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서 하는 소리다. 또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산에서 힘든 작업을 하는 남정네들이 부르는, 은근한 소리이기도 하다. 우리소리 안에는 그런 은근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 역시 소리도 좀 야해야 제 맛이 나는가 보다. 이렇게 서로가 하나가 되는 소리를 들으면, 연리목이 생각이 난다. 생각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큰 나무를 옮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연리목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가 되는 연리목이 생각이 난다.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 있는 신흥사 경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연리목이 잇다. 이 나무는 연리목 수준을 넘어선다. 줄기가 서로 합해진 것이 아니라, 배롱나무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이 200년이 넘고, 나무의 높이가 5m 가 넘는다. 그런데 어떻게 배롱나무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을까? 배롱나무에 솔 씨가 떨어져 자란 것 같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저 이렇게 상생을 하는 나무라는 것만으로도 희한하다.

 

목도소리에서 인생살이의 참 멋을 좀 배워 보시게나.

 

이 배롱나무를 닮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다, 같은 부류라고 해도 서로가 아웅 거리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다른 수종이 한데 자라는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같은 수종이라도 함께 연리목이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신흥사의 배롱나무와 소나무 같이 살기를 바라지만.

 

울타리 꺾으면 나온다더니

행랑채 달아도 왜아니 나와

담넘어 갈 때는 큰 맘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산중의 기물은 머루다래

인간의 기물은 사랑일세

염천봉 꼭대기 호드기소리

신도안 갈보가 다 모여든다.

 

매일 아침 보는 뉴스도 지겹다. 토막살인, 근친상간, 강제추행, 강간살인... 등. 어떻게 세상에 좋은 소식은 별로 없고, 그저 눈만 뜨고 나면 이상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정작 조용해야 할 사람들만 나와서 난리를 친다. 그런 것 말고 이렇게 좋은 소리나, 연리지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오늘 목도소리 한 번들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제발 국민들을 기만하지 말고, 이렇게 조금은 야스러운 소리를 하면서, 힘없는 국민들을 위해 발 좀 맞추면 누가 머라고 하나?

 

매번 마음도 바꾸고, 말도 잘 바꾸는 사람들. 이렇게 두 나무가 함께 실듯이 세상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바위들이 널려있다. 그리고 한편이 절개한 흔적도 보인다. 이 바위들도 누군가 쪼아내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스스로 세상구경이 하고 싶어 쪼개져 구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위 솟구치는 벼랑위로 성벽이 보인다. 이곳은 왜 이렇게 높은 것일까? 바로 그 위에 서장대와 서노대가 있는 곳이다.

 

만일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면, 적들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은 가파른 비탈이고, 거기다가 높기까지 하다. 옆으로는 숨겨진 암문이 있어, 도대체 어디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조차 분별하기가 힘들다. 그런데다 성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피할 수도 없다. 바로 서노대에서 쏘아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 때문이다.

 

 

바위야 니들은 왜 그곳에 있느냐?

 

이곳은 성벽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비가 오는 날 길도 미끄럽지만, 바위와 소나무들이 성벽 근처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이곳의 바위들은 정말 제멋대로이다. 그저 눕고 싶으면 눕고, 서고 싶으면 서 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제멋대로 생긴 채로 화성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도 바위도 그리고 사람도, 이 구간은 화성을 탐낸다. 비에 젖은 소롯길은 미끄럽다. 겨우겨우 비에 젖은 바위를 의지해 바위틈을 벗어난다. 갑자기 성벽이 급하게 아래로 내리닫는다. 그리고 그 성벽 위에 여장들도 함께 구르듯 한다. 나무들도 덩달아 성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화서문에 무슨 풍각쟁이라도 온 것일까?

 

 

포루의 으스스한 모습에 겁을 먹었을 것

 

급한 경사는 화서문까지 이어진다. 서장대에서 화서문까지의 길이는 630m 정도. 그 거리가 모두 내리막길이다. 조금 가면 서이치를 지난다. 굽은 소나무 한 그루, 치를 넘겨보고 있다. 화성 성 밖의 나무들은 왜 그리도 화성을 탐내는 것일까? 아마 이들도 전화(戰禍)를 피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철옹성인 화성 안으로 피신을 하고 싶음인지.

 

저만큼 서포루가 보인다. 화성의 포를 쏘아대는 5개 포루 중 한 곳이다. 성이 돌출된 치 위에 지은 구조물이다. 그런데 이 서포루의 형태는 색다르다. 딴 곳의 포루가 밑을 돌로 쌓고 그 위에 포사를 설치 한 것에 비해, 서포루는 아래부터 온통 검을 벽돌로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포사 역시 딴 곳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견고한 모습이다.

 

 

저런 서포루의 모습을 본 적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아마도 그 으스스한 모습을 보고, 포를 쏘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치성의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서포루를 지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배터리가 없다고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는 화면이 사라져버렸다. 카메라마저 겁을 먹은 것일까?

 

 

세상은 참 살기 편해졌다

 

잠시 고민을 한다. 이제 화서문까지 남은 거리는 420m. 이처럼 비가 퍼붓는 날 지금까지 잘 견뎌왔는데, 배터리가 떨어지다니. 그러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법. 카메라 대신 지니고 있는 휴대폰을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소형 카메라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신 휴대폰을 꺼내들고 걷기 시작한다.

 

서이치를 지난다. 저만큼 성벽이 휘어진 곳에, 사방이 훤하게 트여있는 서북각루가 보인다. 서북각루 역시 치성 위에 설치한 구조물이다. 서북각루도 예전에는 사방이 모두 판문으로 막혀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돌방까지 마련해 겨울에도 군사들이 따듯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다.

 

 

서북각루 가까이 가니 빗길에 나그네 한 사람이 하염없이 서 있다. 아마도 저 나그네도 나처럼 이 비에 화성 길을 오를 것인지를 고민하는 듯하다. 서북각루를 지나면 소나무 몇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화서문이 보인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 세차진다.

 

9월 4일, 오늘의 발길을 멈춘다. 화서문 옆으로 지나는 차들이, 도로를 흐르는 물을 튀기고 지나간다. 화성을 겉도느라 어차피 다 젖었는데, 누구 탓해 무엇 하리오. 그러고 보니 나도 점점 화성을 닮아 가는가 보다.

서삼치를 지나면 성벽에 큰 통로가 보인다. 통로 앞에는 진달래 화장실과 화성관광안내소가 있다. 화성에서 중간에 밖으로 이렇게 출입을 할 수 있는 곳이 군데군데 있다. 그곳을 지나면 오르막길이다. 서장대를 향해 가는 길. 아마도 그 위에서 호령을 하던 옛 장용영의 장수들은 목소리도 우렁찼을 것이다.

 

성벽으로 달라붙는 적군을 무찌르려면 목소리께나 커야 호령을 할 것이 아닌가. 옛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구간은 전쟁도 피해갔을 것이다. 조금 걷다보니 오르막길에 소나무의 가지들이 앞 다투어 성벽을 오른다. 아마도 화성을 쌓고 전쟁을 했다면, 이렇게 성벽을 기어오르느라 수도 없이 곤경을 치러야 했을 것만 같다.

 

 

 

젖은 풀을 헤치며 걷다

 

갑자기 길이 미끄럽다. 조금은 정리가 되었던 길이 그저 편편한 흙길로 변했다. 비는 계속 뿌려대는데, 밟을 때마다 미끄럽다. 신발 안은 이미 물에 젖어 질척인다. 풀이 무성한 길을 걸으며 좌우를 살펴본다. 아무도 그곳엔 없었다. 그저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알 수 없는 새의 울음소리만이 숲을 지키고 있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걷는다. 자칫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저만큼 성벽이 돌출이 된 치 위에 전각이 보인다. 서포루, 화성에는 두 가지의 포루가 있다. 바로 '포루(鋪樓)'와 '포루(砲樓)'이다. 전자의 포루는 군사들을 보호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고, 후자의 포루는 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난 말 없이 200년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병사들을 보호하고 쉴 수 있는 포루는 모두 5개소가 있다. 휴식공간이기도 한 포루는 성곽에서 돌출된 치성의 위에 올렸다. 휴식공간과 중간 지휘소 역할도 하는 화성의 포루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사면을 개방을 한 형태이고, 또 하나는 입구에 문을 내고 사면을 벽으로 둘러친 형태이다.

 

그 포루로 지나치면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비를 맞고 고고히 서 있다. 성안을 들여다보고 서 있는 소나무는 주변의 시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곳의 성벽은 모두 200년 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축성이 된 그대로이다, 다만 성위에 여장만 새로 올렸을 뿐이다. 그 소나무는 200년 동안 화성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듯하다. 마치 역사를 알고 있다는 듯,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화성의 성벽은 모두 병사들이 위장을 한 것

 

9월 4일, 빗길을 걷기 시작한지 한 시간이 지났다. 그냥 걸으면 얼마나 걸리려는지? 일일이 성돌과 대화를 하다가보면, 언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굳이 시간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성벽을 쌓은 돌 하나하나를 다 어루만지지는 못해도, 눈으로 이야기는 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저만큼 성벽 위로 우뚝 솟은 서장대가 보인다. 이곳이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 위에서 장용영의 대장군이 정조에게 보고를 하고는 했을 것이다. 그 가까이가면 기단만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는 벽돌로 쌓은 부분이 보인다. 검은 벽돌이 비에 젖어 더욱 윤기가 난다. 갑자기 한 무리의 군사들이 성벽을 뚫고 쏟아져 나온다. 혼비백산한 적들은 줄행랑을 치기 바쁘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저 화성의 성을 쌓은 돌은, 돌이 아닙니다.”

“이놈이 정신이 빠졌느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돌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저 돌처럼 생긴 것들은 모두 장용영의 군사들이 위장을 한 것입니다. 성벽이 갑자기 장용영의 군사들이 되어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거긴 움푹 들어간 성벽 안에 교묘히 감춘 서암문이 있었다. 암문은 군수물자를 들이거나,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서장대를 공격하는 적을 급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서암문을 지키기 위해, 가까운 곳에 서포루를 두었다. 서암문을 지나면 갑자기 성이 높아진다. 바로 위에 서장대와 서노대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 주춤했던 비가 갑자기 세차게 쏟아진다. 아마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이곳에서 교전을 했다고 하면, 적은 단 한명도 살아남질 못했을 것이다. 빗속에서 앞이 잘 보이질 않는데, 뒤편에서까지 공격을 받는다면 이길 장사는 없다. 잠시 발길을 멈춘다. 서암문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해본다. 오늘따라 정말로 암문의 성벽들이 장용영의 군사들이 될 것만 같다.

 

 

또 다시 2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누군가 이곳을 돌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도 나처럼 이 성벽과 대화를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 마음 하나 주어 담아 발길을 옮긴다.

‘화성 겉돌기’라고 하니, 사람들은 화성에서 빈둥거리고 노는 줄로만 아는가 보다. 하지만 말 그대로 화성의 겉(밖)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화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안으로 돌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화성을 보다가 보면, 그 밖으로의 경치도 만만치 않게 아름답다. 또한 성이라는 축조물의 특성상 밖이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성곽만 보이는 성벽을 끼고 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성은 밖으로 돌면서 지형지물의 이용이나, 축성의 형태, 또는 주변 경관 등을 논하지 않고는 온전한 성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화성 겉돌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12회 정도로 나누어 돌아보는 화성 겉돌기를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채석의 흔적이 있는 화양루 밖

 

수원시 팔달구 교동 3-3에 소재한 수원중앙시립도서관을 마주보면서 우측으로 조그만 소로 길이 하나 보인다. 팔달산 지석묘군을 향해 오르는 길이다. 이 길 위에는 화성의 남쪽 능선을 지키는 용도가 있고, 그 끝에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자리한다. 숲길을 따라 오르면 여기저기 지석묘군이 있다.

 

지방유형무형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군의 주변에는 바윗덩어리들이 널려있다. 바위에는 돌을 쪼아내기 위해 구멍을 파 놓은 것들이 보인다. 화성을 축성할 때 이곳에서도 성벽을 쌓을 돌을 채석한 것이다. 화양루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널린 바위들의 면이 똑바로 절개된 것들이 보인다. 아마도 돌을 떼어낸 곳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이곳의 바위와 성을 쌓은 돌의 색깔이 비슷하다. 멀리까지 갈 것 없이 바로 그 밑에서 떼어난 돌로 성을 쌓았는가 보다. 화양루를 끼고 성의 서쪽을 향해 걷는다. 이 길로 성길을 따라가면 서장대를 지나 화서문을 향할 수가 있다.

 

밖에서 보는 서남암문 과연 절경일세

 

9월 4일 오후. 비는 더 세차게 퍼 붓는다. 가끔씩 바람도 불어 땀을 씻어주는 것은 좋은데, 우산이 자꾸만 뒤로 넘어가잔다. 그래도 천천히 걸음을 걸으면서 숲 냄새를 맡아본다. 비가 오는 날은 숲은 더욱 더 냄새가 강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성 밖의 소나무들을 본다.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제 멋대로 자랐다.

 

 

 

아마 역사의 진저리를 저리도 몸으로 표현을 한 것은 아닐까? 용도 서편의 담이 유난히 낮다. 지금이야 이곳에 길이 생겼으니 이리 낮지만, 과거에는 이곳 밖으로 급경사였으니 굳이 성벽이 높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빗발이 점점 거세진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어진 소나무 숲에서 짙은 숲의 향이 코를 간질인다. 이런 분위기가 못내 좋아 이 길이 늘 정겹다. 조금 더 걸어본다. 새 한 마리가 비에 젖어 나무꼭대기에서 오글거리고 있다. 어찌 보면 저 새야말로 가장 행복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날개를 툴툴 털고 가장 편안하게 날아오를 수가 있을 테니까.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까닭이지

 

성곽 보수를 하느라 아래 위를 다른 돌로 쌓아올린 곳을 지나치다 보면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치(성 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서삼치, 서쪽에 있는 치 중에서 세 번째 치라는 말이다. 화성을 안에서 돌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서삼치 앞에 늙은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노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먼 옛날 내가 이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다. 저 나무는 그저 성벽을 타고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꽤나 키를 키우고 있다. 앞뒤로 보이는 서삼치의 풍광에서 첫 번째의 발길을 멈춘다. 그저 지나치기가 아쉽기 때문이다. 이런 풍광이 있어,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북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이곳에는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정자 하나거 서 있다. 정자의 이름은 ‘삼기정’이라 하는데, 삼기정은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짓고, 삼기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지은 이는 하연으로 전해진다. 최득지는 세종 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당시 정몽주의 문인이었던 하연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는 도중, 고산읍에 들렀다가 소풍을 나간 곳이 삼기리였다.

 

하연은 이곳이 앞으로 흐르는 만경강과 기암, 그리고 송림이 우거진 것을 보고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여 ‘삼기(三奇)’ 라 송판에 써주었다.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정자에 거니 이것이 삼기정이다. 지금의 삼기리라는 명칭도 이 정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율헌 유허지에 서 있는 삼기정

 

삼기정을 축조한 최득지(고려 우왕 5년, 1379~ 단종3년, 1455년)는 본관은 전주, 호는 율헌이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 장흥교수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환갑을 맞이하던 세종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현 삼기정 건물의 상량에는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三年庚午重建世宗己未創建'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고산현감 최득지가 삼기정을 축조한 것은 세종21년인 1439년이고, 그 뒤 오랜 세월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 오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처음에 이 삼기정을 세운지 벌써 520년이나 지났다.

 

삼기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씩이다. 정자 안에는 하연의 ‘삼기정기문’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이곳의 풍광에 얼마나 빠졌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고산현 동쪽 오리쯤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으니 절벽이 깎아질렀고 그 아래에는 긴 내가 맑게 굽어 흐르고 위에는 노송이 울창하여 푸르렀다. 그 서쪽에는 평평한 들이 펼쳐 있다. 임인년(1422년) 봄에 나는 고산읍에 간 일이 있어 이 언덕에 오르게 되었다. 연하 초목이 모두 아름답게 내 눈앞에 깔려 있는데 수석과 송림이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이에 삼기라 이름 하여 깎은 나무에 글씨를 써주었더니 이에 현감 최득지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가 처음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써 그러한 뜻에서 사양할 수 없이 되었다.

 

생각하건대 사람의 마음은 물건을 보고 감동되는 것으로 눈을 달리하여 보게 된 그 느낌은 더욱 간절했다. 맑은 물을 보게 되니 나의 천부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바위가 엄엄한 것을 보니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를 더욱 높게 하여 이 언덕의 세 가지 물건이야말로 어찌 경치가 아름답거나 찌는 더위에 재미있게 논다는 것 뿐이리요.

 

내가 다른 사람과 소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뒷날에 선비들이 이 언덕에 오르면 느끼고 뜻을 두게 될 것으로 생각 할진대 마음을 삼가 하고 뜻을 길러내는 기회가 족히 되어야 할지라. 또한 목욕을 하고 풍월을 하는 행락도 있을 것으로 전날에 내가 이름을 지은 뜻이 거의 같을지다.」

 

 

 

옛 선조의 마음을 읽어보다

 

정자에 걸려있는 삼기정이란 편액은 강암 송성용이 썼다고 한다. 작은 정자에 올라 주변을 들러본다. 옛날 선조가 느낀 삼기는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곳의 풍광은 아직 옛 모습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바위가 있어, 아마도 과거에는 이곳이 꽤 큰 바위 등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크지 않은 정자 마루에 앉아 선조의 숨결을 느껴본다. 아주 오래 전 내 선대인 하연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이렇게 호흡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만, 이다음에 또 누군가 나의 후대도 우연찮은 기회에, 이렇게 나를 기억할 수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옛 말씀에 ‘후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라’고 하신 것인지. 오늘 또 삼기정이란 작은 정자에서 또 하나의 공부를 한다.


 

하연(1376∼1453)

선조 하연은 경상도 진주(지금의 산청)에서 태어났다. 고려왕조 최후의 충신이었던 정몽주(1337∼1392)로부터 학문을 사사한 하연은, 조선 태조 때인 1396년 과거시험 병과 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많은 요직을 거친 하연은 태종 이방원 시절에는 ‘사헌부 간관(諫官)’으로 일하면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여 임금이 직접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로 인정받은 관료였다.

 

1423년 대사헌, 1425년 경상도관찰사, 143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1436년 예조와 이조 판서를 거쳤다. 70세인 1445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영의정 황희(1363∼1452), 좌의정 신개(1374∼1446)와 함께 ‘조선의 빛나는 삼정승 시대’를 연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세자 섭정을 하고 있던 문종의 스승으로도 활동한 하연은, 좌의정을 거쳐 세종 39년인 1449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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