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1495-1에 소재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67,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8001,0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2m, 가슴높이의 둘레가 16.27m로 마을 인삼밭의 중앙에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전체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일부 가지는 부러질 염려가 있어서 받침대로 받쳐져 있다. 주변에 인삼밭이 있어 걱정스러운 것은, 농약을 심하게 뿌리는 인삼밭이 있어, 자칫 은행나무에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지팡이가 변해 이 나무가 되었다고?

 

가을이 되면 노란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반계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그동안 반계리 은행나무는 지나칠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다. 늘 그 멋진 나무를 보고 오면,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이다.

 

522() 찾아간 반계리 은행나무. 멀리서 보아도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작은 동산만큼이나 커 보인다. 아우들과 함께 찾아간 반계리 은행나무. 한 나무임에도 몇 그루가 모인 것처럼 중앙을 비워 놓고 가지가 솟아 있다. 중앙에 빈 공간은 장정 한 사람이 앉아보아도 남는 면적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땅 속에서 솟아 난 가지가 퍼져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살던 성주 이씨의 한 사람이 나무를 심고 관리하다가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큰스님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물을 마시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 지팡이가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고목에 대한 전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뜬금이 없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전국에 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에는 왜 흰뱀이 살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이런 전설이 터무니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주민들이 위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 반게리 은행나무는 가을에 단풍이 한꺼번에 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정말 이 수령이 맞나요?

 

반계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반계리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다. 은행나무 안에 들어가 팔을 벌리고 앉아있는 아우는 마치 은행나무에서 기를 받는 듯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옛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자네는 늙지 않을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스님?”

! 이 사람아 매일 그렇게 오래된 나무, 천년 세월을 뛰어 넘은 석불과 석탑. 그런 것들을 만나면서 그 기운을 받고 살았으니 늙지를 않지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다. 글쎄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우리 문화재가 좋아서 20년이 넘게 전국의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찾아다닌 문화재를 담은 자료가 벽면 하나를 채우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농 삼아 이야기를 한다.

 

 

 

아마 저 CD 불 지르면 바로 죽어 버릴걸요

 

방안 가득 체우고 있는 문화재를 담은 자료를 보고 지인들이 하는 말이다. 웃고 말지만 정말 그럴 것이란 생각이다. 가끔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쓸 때마다 생각을 한다. 이런 은행나무가 알려준 세상사는 방법이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 변치 말라는. 아마도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나지 않았다고 하면 어찌 그 오랜 세월을 문화재를 만나러 전국을 돌아다녔을까?

 

나무 한 그루에서 배운 세상살이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가 늘 고맙기만 하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정말 고맙소. 그 자리를 지켜주어서. 인간이란 것들은 아침저녁으로 잘도 변하는데, 그렇게 천년 세월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소.”

스님이 한 분 계시다. 가끔 답답할 때 전화라도 드리면, 곧잘 우스갯소리를 해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시고는 한다. 나잇살깨나 먹어 세상을 살다가보니 사는 것이 점점 버거워진다. 아마 물질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부담이 더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며칠 째 감기몸살로 인해 사람이 늘어져서인가? 괜한 우울증이 걸린 듯하다.

전화를 드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맑은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린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일까? 스님께서야 세상 놓는 공부를 하신 분이시니, 머 세상에 좋고 나쁘고도 없으실 것만 같다. 문안인사를 드리고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었다,

“스님,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이유를 모르겠네요?”

스님 잠잠하시다. 딴 때 같으면 바로 한 마디 하시는 분이시다. 농담 삼아 한 마디씩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은연 중 세상살이 공부를 알려주시고는 하시는 분이라,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을 한다.

“하감독님(스님들은 예전 프로덕션에 있을 때 호칭을 지금도 쓰신다) 요즘 많이 힘든가보네요. 그러니까 곡차 좀 조금씩 하라니까요”
“곡차는 머 좋은 사람하고 만나면 한잔씩 하지만, 요즈음은 거의 안마시고 지냅니다.”
“그럼 곡차 부족인가? 하하... 아마 길 위로 나가면 곧 나아질 병인 것을. 요즘 바쁘다고 답사를 오래 안가서 그런 것 같네요.”
"그렇지가 않아요. 영 죽겠다니까요“
“그럼 죽어야지. 사람이 죽을 때를 잘 가려야 세상을 잘 살다가는 것이라는데”

늘 이런 식이다. 답답할 때 전화를 드려도 시원한 해법은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농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보면 어느새 속이 조금은 풀려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세상살이 한 번 이야기 해 볼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전화를 주셨을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렇게 심각하게 말씀을 시작하면 열띤 법문을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말을 피하고는 하는 나이다.

“세상살이를요?”
“예, 이 세상에는 딱 세 종류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요”
“세 종류라뇨?”
“첫 번째는 부모님을 잘 만나 살아생전에 돈 걱정 안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은 절대 굶지는 않을 테니, 자신들의 생은 살아갈 수가 있겠죠.”
“예,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두 번째는 무슨 사람들입니까?”
“두 번째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잡스 같은 사람들이죠. 실력이 남보다 출중해 자기 스스로가 이룰 수 있는 사람들도 살아남을 수 있죠. 우리나라 같은데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고 하네요. 아이티산업 쪽에는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개발을 해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공감이 갑니다. 세 번째가 정말 궁금하네요. 세 번째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세 번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특별한 공부를 했다거나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이 사람들이 사실은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고, 세상을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죠.”

이쯤 되면 이 세 번째 부류라는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스님은 세 번째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구분을 지은 것일까? 대답을 듣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바빠지니 재촉을 할 수밖에.

“세 번째는 바로 쓰리기통에 거꾸로 처박아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실패를 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가 있으니까요. 아마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만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이네요. 특히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더 더욱 그렇죠.”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해있을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잠시 생각을 놓고 있는데, 말씀이 이어지신다.

“요즈음 젊은 부모님들 정말 큰일예요”
“왜요? 요즘 젊은 부모님들 아이들 잘 키우잖아요?”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바보로 만들고들 있어요. 그 부모님들 재산이 무척 많아요? 아님 아이들을 남보다 출중하게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하나요? 그것이 아니라면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 하는데, 받자만 하고 키우고 있으니, 그 아이들이 자랄 때 쯤엔 세상이 정말 험해질 텐데, 아이들이 어떻게 헤쳐 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 때까지 그 부모님들이 명을 버틸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무조건 받자를 하면, 아이들이 어려서 부터 부모님께 의지하는 마늠만 키우는 것이예요. 아주 어릴 적에는 사랑으로, 그리고 조금 지나면 스스로 일을 처리하도록 가르쳐야죠. 아이들 그렇게 키우면 부모님들이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긴 통화가 끝났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혹 나도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부류는 아니었을까? 오늘은 정말 이 말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만 할 것 같다.


세상 머 있어. 그냥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가슴 속에 묻어 둔 말을 하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복 받은 인생이란 생각을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고 살다가 보면, 깊은 병이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인생이란게 머 있어. 그냥 사는 거지”

하긴 누구나 다 자신만의 소중한 삶이 있다고 하지만, 그 소중한 삶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다. 성공을 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는 부를 축적하거나, 아니면 명예를 얻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이 성공을 한 것일까? 사람들은 제각각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성공한 삶일까? 늘 그것이 궁금하다.


인생살이에서 세 번째 스카우트가 되다

세상을 살면서 ‘스카우트’라는 말을 들어보았다. 이번에도 스카우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려는 가는 모르겠다. 벌써 세상을 살면서 세 번째인 듯하다. 남들이 말하는 스카우트와는 좀 다르다. 하지만 있던 자리에서 ‘필요한 사람’이기에 데리고 왔다니, 이런 것도 스카우트라고 보아야 할까?

나이가 60이 넘어 이렇게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리를 옮겨놓고 나서도 조금은 걱정스럽다. 나를 필요로 하는 데서, 과연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죽어라고 일을 해보아도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기대를 했던 분들에게 더 실망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필요한 곳이 있다

사람마다 제각각 성정이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능력도 다르다. 그 능력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발휘할 곳이라면, 기대를 해봄직도 하다. 하기에 사람마다 각기 필요한 곳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두고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보다.


자리를 옮겼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옮겨 온 곳이다. 이곳에서 과연 내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으려는 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 갖고도 행복하다. 아직은 처음 시작하는 것이라 몸이 피곤할 수도 있다.

인생은 60부터 라는데...

자리를 옮긴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을 한다. 그리고 차분히 노후대책을 세우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하다. 그래서 그냥 살다가 후에 어디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숨죽인 듯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세상 머 있어. 그냥 살다가 가는 거지”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참으로 세상 편하게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의 속이 과연 편안한 것일까?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속이 더 타버렸을 것만 같다. 그저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지.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인생은 60부터 라고” 그 말이 나에게는 적격인 듯하다.

모처럼 옮겨 온 자리에서 창밖을 보니 멀리 지리산이 바라다 보인다. 이렇게 날이 좋은 날 천왕봉이라도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마지막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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