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9) - 공심돈

공심돈, 우리나라의 많은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축조물이다. 1796년 3월 10일 완선한 서북공심돈. 공심돈이 완공을 한 이듬해인 1797년 3월 서북공심돈을 둘러 본 정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서북공심돈은 그 건축물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710호로 지정이 되었다.

원래 화성에는 모두 세 곳의 공심돈이 있었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그리고 남공심돈이다. 하지만 현재 남공심돈은 사라지고, 동, 서북공심돈만이 남아있다. 공심돈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동향을 살피고,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공심돈의 형태는 특이하게 조성해, 마치 화성 안에 작은 고성(古城) 하나가 자리를 잡은 듯하다.


화서문 곁에 축조된 보물 제1710호인 서북공심돈과(위) 창룡문과 동장대 사이에 서 있는 동북공심돈(아래)

치성 위에 올린 특별한 구조물 서북공심돈

보물로 지정이 된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은 그 모양이 각각 특색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꾸며졌다. 치성 위에 올려놓은 서북공심돈은 아래 치성은 돌로 쌓았으며, 그 위에 상부벽체는 벽돌로 쌓았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전각을 올려놓았다.



화서문 곁에 서 있는 서북공심돈은 그 안이 비어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꾸며졌다. 그러나 화성에서 출입이 제한된 곳 중 한 곳인 서북공심돈은 커다란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서운하다. 화성 안에서도 독창적인 형태로 조성이 된 서북공심돈, 아마도 정조는 이 축조물을 보고 만족하였던 것 같다. 모든 이들에게 마음껏 구경을 하라고 한 것을 보면.


3층으로 축조된 보물로 지정이 된 서북공심돈

둥근 고성을 연상케 하는 동북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은 바로 동북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은 연무대와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세워져 있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을 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을 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이 된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를 하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는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 인듯하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 있다.




화성의 공심돈을 처음으로 짓고 난 당시에도 이렇게 공심돈의 위에 올라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공심돈 위로 오르면 주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는 길 벽면에는 총안이 나 있다. 주변 어디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천혜의 작은 요새이다.

아름다운 공심돈에 매료당하다.

서북공심돈은 1796년 3월 10일에 완공을 하였으며,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19일에 완공이 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 그리고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에 오른 동북공심돈. 그 위에서 주변을 살펴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심돈을 축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선조들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전쟁을 하기 위한 성곽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길을 떠나지 못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지금의 모습들이 왠지 낯설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7) - 봉돈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이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는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년 6월 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를 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로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독립된 축조물 봉돈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이 된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피운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햇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6) - 서남암문과 용도

‘화성(華城)’,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알면 알수록 대단한 성이다. 어느 한 곳도 화성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성을 축조할 수 있었는지, 그저 혀를 내두를 판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의 성은 성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난 그 사람들에게 한 마디로 이렇게 묻는다. “성을 제대로 알기는 하는가?”라고.

중국과 수도 없이 많은 국경에서의 전쟁을 한 고구려. 그 고구려에 왜 그 수십만의 수나라나 당나라 군사들이 형편없이 패하고 돌아갔을까?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성이 그만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축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성은 그런 각 시대의 성곽에서 좋은 점만 모아서 축조가 된 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화성의 모습이다.


산으로 오르는 적군이 다시 놀라다

화성은 4대문으로 공격을 하거나, 성벽으로 공격을 하기에는 어렵다. 어디라도 비빌 언덕이 없기 때문이다. 성 주위를 맴돌던 적은 한 곳의 빈틈을 발견하게 된다. 성벽보다 더 높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이다. 그곳으로 오르면 성 안으로 총과 활을 쏘고 불을 날릴 수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적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성벽에 가까이 접근하면 여지없이 성안에서 날아오는 총탄과 화살에 맞아죽기가 일쑤다. 그래서 일부러 팔달문에서 멀리 떨어진 쪽을 향해 팔달산의 능선을 향해 오른다. 쉴 새 없이 적들은 능선을 향해 올랐다. 나무숲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오른 능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함소리와 함께 수많은 총알과 화살이 날아온다.



서남암문의 위에 놓인 포사(위)와 용도에서 바라 본 암문, 그리고 암문으로 오르는 성벽과(붉은 선) 용도가 놓인 산등성이(노랑색 선)

고개를 숙이고 능선을 향해 치닫던 적들이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어본다. 놀랍게도 그 능선을 따라 또 다른 성벽이 있다. 바로 서남암문에서 길을 따라 화양루까지 가는 '용도(甬道)'가 있었던 것이다. 용도란 말 그대로 길을 따라 양편으로 담을 쌓은 것을 말한다. 팔달산의 반을 갈라 쌓은 성 끝자락에는 이 용도가 있어, 남부 능선으로 올라오는 적을 막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용도와 서남암문, 그리고 서남각루

팔달문에서 성벽을 따라 남부 능선으로 오르면 그 정상부에 서남암문이 있다. 이 서남암문 위에는 주변을 경계하는 ‘서남포사(西南舖舍)’가 자리한다. 한 칸으로 지어진 이 포사에서는 주변 경계는 물론,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적이 공격을 하면 깃발을 이용하거나, 포를 쏘아 신호를 했다. 이 포사는 항시 장병들이 기거를 하기 때문에, 온돌로 꾸미고 사면을 판문으로 막았다.



포사 아래 문이 바로 서남암문이다. 이곳은 안과 밖으로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성가퀴를 설치하였으며, 화성의 암문 중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가 된 곳이다. 암문을 빠져나가면 능선을 따라 양편으로 성벽을 쌓고 여장을 올린 용도가 나타난다. 이 용도는 능선의 끝까지 나 있으며, 그 끝에는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설치되어 있다.

준 지휘소인 각루

용도 끝에 자리한 각루는 준 지휘소이자,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서남각루가 서 있는 곳은 능선의 끝이자, 용도의 끝이 된다. 이곳에서 양편으로 돌출된 성벽은 양편 모두가 치의 역할을 하고 있어, 용도동치와 용도서치와 함께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게 축성이 되었다.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18세기 동, 서양을 통 털어 가장 완벽한 군사시설이라고 화성을 극찬하였겠는가?



용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 서남각루는 화양루라고 부른다. 각루의 양편 끝에도 둘출이 되어 치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서남각루는 한편은 바닥이 돌로 되어있고, 한편은 장초석을 놓고 기둥을 올려 마루를 놓았다. 언제나 이곳에서 군사들이 주변감시를 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 올라 성안을 공격하겠다고 죽자 사자 능선으로 오른 적군들. 그들은 능선에 버티고 있는 용도로 인해, 또 한 번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저 병사들은 땅에서 솟아났느냐?"

화성은 실제로 축성을 하고 난 뒤 전쟁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화성을 시물레이션으로 전쟁 장면을 제작한다고 하면, 정말 장관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것도 화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 장용위의 군사들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할 것이다. 화성은 그만큼 수성(守城)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적이 성으로 밀려왔다. 4대문을 아무리 깨트리려고 공성무기를 총 동원했지만, 문 앞까지 다가서지도 못했다. 겨우 옹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무기를 움직일 공간이 없이, 옹성 안에 들어 온 병사들이 전멸을 당했다. 그것이 바로 화성이다. 적들은 이번에는 방법을 바꾸었다. 성벽을 타고 오르기로 한 것이다.


화성의 서암문. 성벽 안에 감추어졌다.

앞뒤에서 공격하는 성안의 병사들.


긴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성벽을 오를 수가 없다. 여장에 걸친 사다리는 긴 창을 이용한 성안의 병사들에 의해 제거가 되고, 뒤에서도 화살이 날아왔다. 성벽이 돌출된 치성에서 쏘아대는 화살이다. 앞뒤로 협공을 당하는 적은 성을 오르기를 포기하고 만다.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번에는 후미진 곳을 찾아냈다. 그리고 성 앞으로 조금씩 지형지물을 이용해 다가들었다. 성벽에 줄을 던지고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뒤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적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한 무리의 장용위 군사들이 나타난다,


암문의 문은 계단을 내려가 성벽 아랫쪽에 나 있다. 암문 여장에서 내다 본 바깥

“도대체 어떻게 저 많은 병사들이 어디서 나왔단 말이냐. 저 병사들은 땅에서 솟아난 병사들이란 말이냐?“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성 밖은 자신의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딴 곳에서 지원군이 올만한 길도 모두 차단을 했다. 그런데 어디서 저 많은 군사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저 군사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이냐?”

화성에는 암문이 있다. 현재는 네 곳의 암문이 남아있다. 이 암문들은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적의 눈에 잘 띠질 않는다. 그곳은 전쟁이 나면 무기를 공수하거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통로이다. 거기다가 몰래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의 적의 배후를 공격하게 된다. 성으로 접근을 했던 적들은 혼비백산을 할 수 밖에.


북암문의 바깥과 안

화성에는 처음으로 축성을 하고 난 뒤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다. 현재는 4개의 암문이 남아있다. 동문에서 남문 사이에는 암문이 없다. 그리고 남문에서 서장대를 오르는 산꼭대기에는 서남암문이 있다. 서남암문의 위에는 주변을 관찰하는 ‘포루(鋪樓)’가 있으며, 앞으로는 용도(甬道)가 시작되는 곳으로 그 끝에는 화양루가 자리한다.

암문은 철판으로 문 바깥부분을 덮었다.

벽돌로 쌓은 아름다운 암문

서장대의 남쪽에는 서암문이 있다. 팔달산 남쪽 기슭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이 암문을 찾아내기가 쉽지가 않다. 암문이 연결되는 곳은 가파른 비탈로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이 암문을 통해 쏟아져 나온 병사들이 뒤를 공격하고 난 후,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고 생각을 해보자. 모골이 송연하지 않겠는가?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방화수류정 옆에도 암문이 있다. 북암문은 화성 전체구간 중에서 유일하게 좌우의 성벽을 벽돌로 쌓은 곳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3월 27일에 완성이 되었다. 이 북암문 앞에는 연지가 있다. 요즈음 연지는 한창 보수공사 중이다. 만일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면, 적군의 시신으로 메워질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혼자 놀란다.



동암문

그리고 동장대 가까이 또 하나의 암문이 있다. 바로 동암문이다. 동암문은 북암문보다 이틀 빠른 정조 20년인 1796년 3월 25일에 완성이 되었다. 만일에 대비해 4대문 외에도 후미지고 적당한 곳에 마련한 암문. 이 암문이 있어 적들을 물리치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이러한 많은 구조물들이 적절하게 자리를 하고 있어,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기도 하지만, 최고의 성이란 찬사를 받는가보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쓴다. 무덤을 ‘유택(幽宅)’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곳에 영혼이 쉬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구조나 형태가 달라진다. 선사시대에는 고인돌이나 동굴 등에서도 사람의 뼈가 발견이 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초기 형태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무덤의 형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서 널무덤이 유행한다. 널무덤이란 땅을 판 후 그 안에 주검을 넣고 널을 덮는 형태이다. 여기서 말하는 널이란 돌로 된 것을 말한다. 널무덤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전해지며, 그 뒤에 고인돌과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무지무덤, 독무덤 등이 나타난다.


가장 많은 묘의 형태인 고인돌

고인돌 등 돌을 이용해 무덤을 만든 형태는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규모 분묘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산청군에 소재한 전 구형왕릉의 묘처럼 많은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석묘 등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분묘의 역사는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이후에 나타난 무덤의 형태로 보인다.

그 이전의 묘의 형태인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는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인근 여러 나라에서도 이런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들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있다. 현재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과 육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고인돌이 발견되는 곳을 보면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능지대나 바닷가 등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물을 사용해야 하는 인간들의 생활 때문에 이런 곳에서 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물이 있는 곳에 인류가 집단으로 서식을 하였고, 그런 곳에 고인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형이라고도 한다. 커다란 돌을 양편에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는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삼면은 커다란 돌로 막고, 입구는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가벼운 돌을 쓴다고 한다. 전라북도 고창군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 지역이다. 고창지역 고인돌은 2003년에 205개 군집에 1,665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이후 2005년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1,327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으며, 2009년 군산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유산으로 등제된 고창고인돌유적을 제외한 174개 군집에 1,124기가 보고되었다. 따라서 최근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185개 군집에 1,600여기이상이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고창 고인돌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작은 안내판에 ‘도산리 고인돌 1km’라고 적혀있다. 이 도산리고인돌은 특별하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좁은 농로를 따라 들어간 곳은 한창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곳에 꽤나 거대한 탁자형 고인돌 한 기가 보인다. 이곳 고인돌은 아름답다고 하여, 많은 책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

‘망북단’이라는 슬픈 이름도 가져

이 도산리 고인돌은 석축 위에 놓여있으며 주변에는 커다란 돌들이 널려있다. 그 중 한기가 탁자형으로 서 있는데, 굄돌의 높이는 어른 키만하다. 그리고 위에 올린 탁자형의 덮개석은 길이가 3.5m 정도에, 정면 입구의 길이도 2.5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의 두께도 50cm나 되는 거대한 돌이다.

이 탁자형 고인돌이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한 이 고인돌을 ‘망북단’이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때 이 마을의 의병장인 송기상(1612 ~1667)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기상은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적을 향해 진군을 하던 중 삼전도의 굴욕적인 패배가 알려지자, 이곳으로 되돌아와 평생을 ‘망북통배’(임금이 계신 궁을 향해 날마다 곡을 했다는 뜻)를 했다는 것이다.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의 손길이로 짐작하시길... 

한 의병대장의 통한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도산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1981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고창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자, 사적 제391호로 승격이 되었다. 지난날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고산리 고인돌. 주변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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