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백성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수원화성 구조물

 

수원화성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현재의 장소로 옮긴 후 축성한 성이다. 정조대왕은 부친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천봉하고 난 후 쌓은 성이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요, 후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기위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곳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축성하였으며, 가장 강력한 군대인 장용외영을 이곳에 주둔시켜 자신의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요새로 삼았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20만 덩이의 석재, 53만장의 기와, 69만장의 벽돌, 26천주의 목재, 1845명의 장인이 거중기 등 각종 기구를 시용하여 1794년부터 28개월 만에 완공한 자연친화적인 성이다. 수원화성은 성을 축성하면서 각 공사구간별로 책임을 맡은 모든 장인들의 이름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을 제작하여 성벽에 부착함으로써, 자신이 축성한 곳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후대에 누가 그곳을 책임지고 축성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화성 시설물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 있어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시설물 중 연도와 굴뚝이 서 있는 곳이 있거나, 곳곳에 눈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19일이 우수인데 16일 아침부터 기온이 떨어지면서 눈이 날리기 시작한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눈보라가 치는 날 수원화성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남수문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지휘소 겸 인근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팔달문과 남공심돈·남암문(두 곳은 현재 유실되었다) 남수문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보라가 몰아쳐 눈을 뜨지 못할 정도지만 남수문에서 동남각루를 항해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치는 중에도 확인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각루는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함께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를 돌아보니 연도와 굴뚝이 보인다. 연도와 굴뚝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온돌방이 있다는 뜻이다. 동남각루를 돌아 뒤편으로 가니 아궁이가 있다. 수원천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으로 인해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추울 것을 염려해 온돌방을 놓은 것이다. 이런 온돌방은 서북각루에도 굴뚝과 온돌방이 보인다. 수원화성의 구조물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물들이 눈에 띤다.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동남각루를 지나 봉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눈보라가 더 심하게 친다. 며칠 안 있으면 우수인데 꽃샘추위인 듯하다. 항상 입춘이 지나고 나면 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닥친다. 동삼치를 지나 공사 중인 동이포루를 지난다. 그리고 봉돈을 앞에 두고 밖에서 인을 들여다본다.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출입이 자유로웠을 때 봉돈 안에도 병사들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창문은 까치살창을 내어 환기를 도왔다.

 

·포루 등을 거쳐 창룡문을 돌아본 후 동북노대를 지난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곳으로 동북노대는 동장대와 동북공심도 가까이에,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소재한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복노대를 거쳐 관람이 중지된 동북공심돈에 도착했다.

 

동장대인 연무대를 돌아본 후 동암문을 지나 높은 곳에서 군사들이 적을 관찰할 수 있는 동복포루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심하게 치기 때문인가?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 동복포루 역시 높은 곳이 자리하고 있다.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인 동북포루는 정자와 같은 형태로 이층으로 올리고 아래편에는 군사들이 눈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또한 이 공간은 숨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비밀공간이기도 하다.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은 1794(정조 18) 10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인 화홍문 역시 군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평소 같으면 꼼꼼히 돌아보아도 4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인데, 눈보라를 맞으며 걷다보니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바람도 점점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거세진다. 더 이상 돌아본다는 것이 어려울 듯하다. 화홍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생각해 본다.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화성의 시설물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게 만든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의 시설물들. 그저 겉으로 보고 걷기보다는 그 시설물에 얽힌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어보자. 정조대왕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기 때문에 그 시설물들이 한결 돋보이는 듯하다.

 

15년 전 촬영한 자료에서 만난 동북공심돈 내부

 

수원화성 창룡문과 연무대인 동장대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원형의 구조물이 있다. 지금은 안전문제로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기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된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몇 년 전 개방을 했을 때 들어갔던 동북공심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나 병사들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으로 보인다.

 

화성의 전각에는 추위에도 병사들이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나선형의 통로 끝에는 계단으로 조성해 공심돈 위에 마련한 전각으로 오른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옛 자료 정리하다가 만난 동북공심돈의 모습

 

20, 일기예보에서는 수원에도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것이라고 한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몇 곳을 돌아보리라 마음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창룡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동북공심돈 앞으로 날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데도 몇 사람의 관광객이 지나치고 있다.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장안문과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돌아와, 2004824,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촬영한 수원화성 자료를 검색해본다.

 

15년이 지났다. 15년 전에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촬영한 자료에는 서장대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 전의 자료가 들어있어 나름대로 소중한 자료로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자료CD 안에 동북공심돈과 봉돈의 내부 등을 꼼꼼히 촬영해 놓은 자료가 들어있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동북공심돈의 내부, 당시 무더운 복중에 땀 흘리며 돌아본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의 내부모습이다.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자료보관의 중요성을 깨닫다

 

15년 전의 소중한 수원화성의 자료가 담긴 CD를 보관하고 있는 것은, 30여 년 전부터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하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관하고 있는 자료 CD3,000장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CD에 담을 수 없어 몇 년 전부터는 외장하드에 담아놓고 있다.

 

그렇게 자료를 보관하는 버릇을 들여놓은 것이 결국 지금은 소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 자료를 남겨놓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더 나이를 먹어 여행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조용히 앉아 책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하나가 수많은 자료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겨놓은 많은 자료들을 보면 언제니 든든하다. “책을 써도 100권은 쓰겠네요.” 집을 찾아와 자료를 본 지인이 하는 말이다. 그런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새삼 자료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문화재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을 한다고 하지만 복원이란 자체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뿐 원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돌아본 동북공심돈. 지금은 안을 들어갈 수 없지만 옛 자료로 만나본 동북공심돈의 내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과거에 기록해 놓은 지료는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화성의 주변이 정리가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는 가운데, 유독 남수문에서 창룡문 구간인 지동구간이 가장 늦은 듯하다. 이미 장안문 외곽부터 창룡문을 거쳐 동일치 사이는 주변이 모두 정리가 되어, 화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성의 외곽을 따라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탐방로가 생겼다.

 

지난 해 4월에 문화재청은 관보에 문화재법 제 27조 및 제34조 규정에 따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0-66번지 등 167필지 13,520를 사적 제3수원 화성의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는 사항을,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예고한 바 있다.

 

예고사항을 보면

. 대상문화재 : 사적 제3호 수원 화성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일원

. 보호구역 추가지정 면적 : 167필지 13,520(지번별 면적조서 붙임)

. 추가지정 예고사유

성곽 연접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여 무분별한 개발을 방지하고, 지형을 회복함으로써, 수원 화성의 역사 문화환경을 보호하고자 함.

. 관리단체 : 수원시 등이다.

 

 

보호구역 안에 창룡문로 7길 폐쇄해야

 

문제는 일부가 문화재 보호구역 안에 들어가 있는 도로의 이용이다. 창룡문로 111번 길은 창룡문 주차장 위에 게이트볼 장부터 성벽으로 난 길을 따라 성벽 밑으로 지하도로가 있는 홍련사 까지다. 이곳부터는 창룡문로 7번 길로 바뀌어 봉돈, 동이포루 앞을 지나 동삼치 앞가지 이어진다.

 

문제는 이 도로는 일반 차도가 아닌 문화재 보수 등을 위한 차량들이 이동을 하는 도로로 알고 있다. 다만 그 도로에 인접한 거주자들은 이 도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창룡문로 7번 길이 주변을 이용하는 많은 차량들의 주차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평소에도 30대가 넘는 차들이 이 길을 주차장으로 이용한다.

 

 

더구나 뻔질나게 이 길을 이용하는 많은 차들을 볼 수가 있다. 문제는 이 길이 차량에 소통되는 도로가 아닌, 한편이 막혀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지동 순대타운 앞에서 오르는 길은 막혀있고, 이곳을 이용하려면 창룡문 주차장부터 일부러 이곳까지 차를 끌고 들어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주차 공간으로 많은 운전자들이 시용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봉돈 외벽 균열 심각해, 차량 진입 막아야

 

현재 수많은 차들이 주차를 하거나 이동통로로 사용하고 있는 창룡문호 7번 길은 차도가 아니다. 지난 해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구역을 지정 고시 할 때 이 길은 빠져 있었다. 이 말은 이미 창룡문로 7번 길은 문화재구역 안(기 조경 공사가 끝난 외곽 산책길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에 포함이 되어있다고 버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차들이 주차를 하기 위해 이동을 하는 창룡문로 7번 길에는 화성의 봉돈이 소재하고 있다. 현재 봉돈은 외벽에 길게 균열이 보이고 외벽을 쌓은 벽돌은 부식되어 쪼개져 있는 상태이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도 해도 보기가 좋지는 않다. 아마도 이런 균열이나 부식된 벽돌의 형태가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차령들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화성은 사적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보수를 한지가 오래 된 시설물들이 지금도 상당수가 보수를 요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화성의 주변 정비를 소홀이 해 화성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면 당연히 예방을 해야 함이 당연하다. 창룡문로 7번 길의 용도를 정확하게 알아본 후 거주자 외의 차량들은 출입통제를 함이 마땅하단 생각이다.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되고 있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는 제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6.15.-25)에서 현지시간 22일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키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수원 화성을 비롯해 두 곳의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는 등 모두 11종목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 자연, 복합) 목록 등재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21개국으로 구성된 정부간위원회로서, 우리나라는 2013-17년 임기 위원국(2013. 11월 위원국 당선)으로 동 위원회에 참여 중이다.

 

 

정부는 이번 위원회에 나선화 문화재청장을 수석대표로 하여, 외교부, 문화재청, 주 유네스코대표부, 주 카타르대사관, 경기도청, 경기도 광주시청,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관계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했다.

 

신라 문무왕 때는 주장성으로 불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웅장하고 거대한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 인정해

 

이번 등재 결정 과정에서 세계유산위원회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남한산성의 문화유산이 17세기 초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당시 일본과 중국의 산성 건축 기술을 반영하고 서양식 무기 도입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 방어 기술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체제의 변화상을 잘 나타내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계곡을 따라 성을 축성한 형태나,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 등을 등재 조건으로 꼽았다. 또한 산성 안에 행궁의 복원 등 주요시설물이 보존되어 있는 것도 선정의 이유라고 밝혔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 인접 지역의 개발 행위를 적절히 통제하고, 주민들이 유산 관리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추가로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경기도 등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남한산성의 체계적 보존관리와 활용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이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 남한산성의 종합계획을 보면, 유산의 중장기적 종합 발전 계획 수립과 정기 모니터링 체계 구축, 세계유산 전문 연구·교류 기능 강화, 지역주민 참여 촉진 등을 통해 남한산성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보호·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겠다는 것. 또한 본성의 미정비구간인 제1남옹성 등에 대한 정비를 조기 완료하고, 훼손된 여장을 전면 보수하겠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인해 경기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과 남한산성 두 곳의 성곽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낭보가 전해지자 수원에서도 수원화성의 미연결 구간인 팔달산에서 내려오다 끓긴 팔달문과의 구간과, 팔달문과 남수문 구간의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의 복원을 서둘러야 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에 소재한 사적 제207호인 홍, 유릉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능침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있는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인 1897년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기존의 역대 어제실과는 다르게 조성해

 

고종황제의 능침인 홍릉을 바라보고 그 좌측에 보면 어제실이 있다. 어제실이란 홍릉에 제를 모실 때 제관들의 제사 준비와 휴식을 하기 위한 공간이다. 고급스런 사대부가의 살림집처럼 마련한 제실은 행랑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로 마련하였다. 이곳은 능참봉을 파견해 능을 관리하게도 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함에 따라 모든 제도를 혁신하였다. 이에 따라 능의 구조와 돌로 만든 석물의 배치 등도 달라졌으며, 재실의 건축 또한 많이 달라졌다. 하기에 홍릉과 유릉의 어제실은 기존의 왕릉에 딸린 재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유릉의 경우에는 홍릉의 재실보다 더 웅장하게 조성하였다.

 

 

석물을 많이 사용한 어제실

 

어제실의 문을 들어서면 앞에 7칸의 전각이 보인다. 이 전각을 장대석을 이용해 세 칸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7칸으로 된 건물을 마련하였다. 전각을 바라보고 좌측에 두 칸의 방을 드리고, 중앙에 두 칸은 대청을 꾸몄다. 우측으로는 세 칸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맨 우측의 방은 마루방인 듯하다.

 

이 건물은 벽을 돌과 벽돌을 이용해 꾸몄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양편으로 모두 자로 꺾어지었는데, 좌측은 두 칸의 광과 방,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나열했다. 우측 역시 좌측과 똑 같은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우측의 담장에는 작은 문을 내어 제관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뒤편에도 9칸의 건물이 있어

 

중앙에 제관들이 사용하는 전각 뒤편으로도 9칸으로 된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이 전각 역시 한 칸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자로 지은 이 집은 좌측에 두칸을 내달아 부엌과 방을 드렸으며, 이어서 두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두 칸의 대청과 한 칸의 방이 있다.

 

이 건물 역시 외벽은 돌과 벽돌로 조성하였다. 일반적인 역대의 재실보다 그 규모가 더 커졌음은 물론 장대석으로 높이 쌓아올린 후에 맞배지붕의 전각을 지어 황제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많은 왕들의 능침에서 보아오던 제실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꾸며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의 어제실. 보기에는 더 웅장하게 지어진 어제실이지만, 그 안에 고종황제의 슬픔과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역사의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를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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