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이야기, 알고 보면 흥미롭다. 옛 고택 답사를 하면서 옛 집에서 보는 것들이 비단 굴뚝만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굴뚝도 굴뚝이지만 옛 집에는,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볼거리들이 많이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은 굴뚝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굴뚝이 그냥 연기를 빼는 용도로만 사용이 되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굴뚝을 보면 나름대로의 형태에서 그 지역적 특색이나, 집 주인의 성품, 심지어는 그 집안의 가세를 짐작할 수도 있다. 왜 굴뚝에서도 그런 특색이 있다고 보이는 것일까? 물론 추론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장굴뚝이다. 아래는 속초 김근수 가옥의 담장 안에 연도를 뺀 굴뚝이다, 아마도 심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른 굴뚝의 형태

굴뚝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고 앞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러한 굴뚝은 강원도 동해안 등 3 ~ 4월 심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굴뚝을 별도로 조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담장 안에 연도를 이어 굴뚝을 만든다. 굴뚝도 상당히 견고하게 쌓는 편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들은 바람으로 인해 굴뚝이 넘어가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위는 경기 양평의 이항로 생가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전북 고창의 인촌생가의 낮은 굴뚝이며, 아래는 익산 가람 이병기 생가의 굴뚝이다. 내룍이라 그런지 굴뚝이 낮게 조성이 되었다.


서해안 인접 지역 역시 상당히 견고한 굴뚝을 조성한다. 이곳도 바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내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굴뚝들이 나타난다. 지역으로 보면 경상도 지방의 굴뚝이 화려하고 크다. 이렇게 화려하게 굴뚝을 조성하는 것은, 이 지역의 고택들이 상당히 넓고, 큰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굴뚝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집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경기도 지역과 충청남도 지역의 굴뚝들은 대개가 낮다. 집이 넓다고 해서 굴뚝을 높게 만들지를 않는다. 이런 것은 그 지역의 특징이다. 이렇게 낮은 굴뚝을 조성한 것은, 일기가 비교적 순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는 서천의 이하복 가옥의 굴뚝이다. 아래는 부여 민칠식 가옥의 굴뚝이다. 큰 집에 비해 낮은 굴뚝을 조형했다. 


가세에 따른 굴뚝의 형태

집안의 가세를 보려면 광을 보라고 했다. 오래도록 권력을 잡았던 집인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작은 집이 있는가 하면, 안채나 사랑채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상당히 큰 집들이 있다. 이런 경우 그 집의 굴뚝을 보면 상당히 높게 축조가 되었다. 바로 부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만 같다.



위는 강원도 강릉 지역이 대표적인 선교장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경남 거창의 정온 생가의 굴뚝이며, 아래는 함양 오담고택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게 조형되었다.


또 오랜 세월동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든 집들을 보아도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그만큼 많은 불을 땠다는 것이다. 많은 양을 불을 때려면 아무래도 낮은 굴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뚝의 형태는 단순히 불을 때고 그 연기를 뿜어대기 위한 용도만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200여 채 이상의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면, 굴뚝 하나에도 그 집안의 내력이 함께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는 서산 김기현 가옥의 굴뚝이며 아래 좌측은 전주 학인당의 굴뚝이고, 우측은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고 화려하게 조성이 되었다.


집안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하기 위한 조형물인 굴뚝. 아마도 지금까지 보아온 고택의 몇 배를 더 답사를 하고나면, 나름대로 ‘굴뚝의 미학’ 정도 한 권쯤은 쓸 수 있지는 않으려는지. 그래서 고택답사의 발길은 늘 바빠진다.(연재 끝)


강릉 선교장. 우리 전통가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고택이다.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가선대부 이내번이,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해와 1703년에 건립한 집이다. 벌써 300년이 지난 고택이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교장은, 안채, 열화당, 행랑채, 서별당, 동별당, 곳간채와 솟을 문 앞에 따로 떨어져 선교장의 품위를 높이는 정자인 ‘활래정’으로 꾸며졌다. 10대에 걸쳐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으로 유명한 선교장. 그 앞에 서 있는 활래정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정자일까?


100년이 지난 뒤에 건립한 활래정

활래정은 선교장을 짓고 난 뒤 100여년이 지난 1816년에 건립이 되었다. 선교장 안에 있는 사랑채인 열화당으로서는 아마도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했었는가 보다. 앞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선교장의 멋을 한층 더 높게 만들고자 했던 마음이 그대로 반영이 된 정자이다.

서쪽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 그 물을 그대로 경포호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선교장의 동별당보다 아래편에 연못을 파고, 그 물을 가둔 것이 오늘 날 활래정이 있게 만들었다.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활래정에 잠시 머물다가, 경포호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활래정은 항상 맑은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고 표현을 해야 맞을 것이다.



손님을 맞는 다실도 겸해

활래정이 딴 정자보다 운치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다실을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 정자나 그 안에서 차 한 잔 마시거나,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활래정은 다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석축으로 쌓은 연못의 한편에 세 칸을 걸쳐 놓고, 한편은 물 위에 뜬 듯이 장초석을 받쳐 띄워놓았다.

ㄱ 자 형의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하고, 사방을 창호를 달았다. 사방 어느 곳에서나 주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자 밖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고, 모두 난간으로 둘러 멋을 내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갖은 수초들을 심었다. 계절마다 연못 속에 있는 수생식물들이 피우는 꽃들이 활래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활래정은 축대 위에 걸친 부분에는 두 개의 연결된 방과 한 칸의 누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꺾인 부분의 연못 위에 장초석을 받친 방은 큰 누마루를 깐 방이다. 겨울에는 따듯한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여름이면 누마루방에서 시원한 경포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장봉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에 시 한수를 띄워 보낼 수 있도록 꾸민 정자이다.

정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다

그런 아름다운 정자에서 괜한 술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는지, 그저 차방을 만들고 차 한 잔에 온갖 정담이 오고갔을 것만 같다. 이번 1월 30일 답사 때와 2007년 2월 6일의 답사 사진을 비교해 본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연못 안에 수위뿐이다. 그 때는 장초석의 일부가 물이 차 가려져 있었다.



해가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 선교장과 활래정. 그래서 이 집이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지켜내는 후손들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언제 날이 풀려 활래정의 연못에 꽃이 가득한 날, 활래정에 올라 향이 가득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것은, 바로 옛 모습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 내보고 싶어서이다.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 선교장은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교장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전주사람 이내번이 1703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강릉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집을  ‘선교장(船橋莊)’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뱃머리와 같은 형태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선교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당, 정자 등 상류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한다.


현 선교장의 건물가운데 1700년대 초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이 안채는 선교장의 건물들이 비교적 화려한데 비해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바깥주인이 사용하는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또한 담장 안에 자리한 열화당은 사랑채로, 순조 15년인 1815년에 이후가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선교장


설을 며칠 앞둔 1월 30일에 찾아간 선교장. 연신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간 날씨가 강원도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래서인가 선교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10대 300년에 걸쳐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전통가옥. 선교장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각각의 건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각 건물들은 모두 떨어져 구성을 하였으며, 일각문이나 담 등으로 구분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다 연결이 되어있는 듯하지만, 그 건물들은 각각 떨어져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교장은 여러 대에 걸쳐서 보수가 되고 새로 증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건물들은 처음부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기존의 건물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다.





“입장료 내고 들어왔는데 볼 것이 없네.”

“그러게 어디를 가나 다 볼 수 있잖아. 서울 가면 이런 집 천지인데”


선교장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들의 말이다. 볼게 없다는 말에 어이가 없다. 물론 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궁궐에 비교를 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 고택은 아무리 작은 집이라고 해도 그 집에서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런 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1703년 이내번이 제일먼저 지었다는 안채(위)와 공부장으로 사용한 서별당(가운데) 그리고 집안으로 들이는곡식을 받던 '받재마당'이 있는 연지당(아래)

‘이런 것을 모르면 재미없지’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문화재를 볼 때는 미리 안내판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교장을 가면 먼저 이런 것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우선은 미로처럼 길이 나 있는 선교장의 일각문은 모두 몇 개인가를 세어보는 재미이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일각문의 개수를 아이들과 함께 세어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다.


선교장은 건물마다 그 쓰임새가 다르다. 그리고 선교장을 돌아보면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건물과, 그 아래 있는 건물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집 전체에 있는 굴뚝의 개수를 알아보는 것이나, 일각문을 사이로 각 건물들에 따른 아래채의 방의 개수, 그 방의 용도를 알아보는 것 등도 선교장의 둘러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위)과 여운형 선생이 영어를 가르쳤던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였던 동진학교로 사용이 되었던 곳간채

우리 문화재를 둘러보는 재미는, 그 어떤 것에도 비교를 할 수가 없다.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특히 고택 답사를 할 때는 그 집이 자리를 한 지형이나, 그 지역의 풍속 등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어디를 가나 다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시는 없다. 고택구경, 아이들에게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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