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적극적인 선행

 

방생(放生)’이란 살생에 대비되는 말로 잡은 물고기나 새, 짐승 등의 생물을 놓아 주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불전의 범망경 梵網經이나 금광명경 金光明經에 보면 살생이나 육식을 금하여 자비를 실천하도록 하는 뜻에서 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부터 불교에서는 방생계를 조직하여 방생회를 베풀고 있다.

 

방생은 살생과 반대적인 개념의 용어이다. 살생을 금하는 것이 소극적인 선이라면, 방생은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른 생명을 구해주는 방생은 생명체를 자연으로 환원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날 불자들이 하는 방생은 금광명경 권4 유수장자품에서 기인하고 있다.

 

 

물고기를 살린 유수장자에서 비롯

 

유수장자는 물이 말라붙어 물고기가 생명을 잃게 되자 두 아들과 함께 물이 말라붙은 늪에 물을 가득채우고 먹을 것을 주어 물고기를 살려냈다. 방생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하지만 중국 북송 때 연수선사의 이야기에서 방생의 참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연수선사는 출가를 하기 전 창고지기였다고 한다.

 

연수선사는 창고지기를 하면서 창고에 있는 공금으로 사람들에 의해 죽음에 처해 질 물고기 등을 사서 방생을 했다는 것. 그러다가 공금을 사용한 것이 들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풀려난 연수선사는 출가를 했고, 출가 후에도 낮에는 방생을 하고 밤이면 귀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연수선사가 정진을 하면 새가 품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방생을 해야

 

방생은 누구나 다 선을 베풀기 위해 해야만 하는 선행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방생을 해야 한다고 적석도인은 칠종방생에서 이르고 있다.

1. 무자식은 반드시 방생을 해야 자녀를 얻는다.

2. 자식을 잉태하면 반드시 방생을 해서 산모를 보호하야 한다.

3. 방생을 하여 많은 복을 지어야 한다.

4. 뜻을 이루고자 하면 미리 방생을 하여 자선을 행하라

5. 계를 받기 전에는 반드시 먼저 방생을 행하라

6. 복록을 받고자 하면 먼저 방생으로 선을 베풀어 복을 쌓아라

7. 염불을 하기 전 미리 방생을 하여 자비심을 일으켜라

등을 말하고 있다. 방생은 죽을 목숨을 살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반드시 행할 선이라는 것이다.

 

 

방생회를 위해 주천강을 가다

 

방생은 일 년 내 어느 때라도 가능하다. 대개 정월 보름을 맞이해 방생을 행하는 것은 일 년 동안의 무해무탈을 기원하고, 평안을 위해서이다. 12일 오후 방생을 하기 위해 20여명이 주천강을 찾았다. 날이 따듯하다고는 하지만 강바람과 일찍 해가 떨어지는 산 속을 흐르는 물가라 바람도 차고 거세다.

 

미리 준비한 미꾸라지를 물에 놓아주고, 먹을 것을 위에 뿌려준다. 유수장자의 행함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찬 물에 들어간 미꾸라지들이 움직이지 않더니 이내 바위틈 사이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촛불과 향을 켜고 열심히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서원을 비는 사람들. 한편에서는 일일이 호명을 하면서 축원을 해준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정초의 방생으로 인해 사람들마다 한 가지 서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두 시간여 만에 끝난 방생회지만 죽을 생명을 살렸다는 기쁨과, 한 가지 서원을 이룰 수 있다는 마음으로 회장을 정리하고 돌아섰다. 오늘 자연으로 환원한 생명들이 오래도록 그 자연에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미륵당집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하던 곳이다. 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곳은 계획을 세워 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녔으니...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다.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잘 아신다는 분이 이렇게 알려주었으니, 주변만 맴돌 수밖에.

 

 

주변을 돌면서도 당집을 발견 못해

 

몇 번을 파장동 직원들과 통화를 하고 난 후에야 바로 눈앞에 있는 당집을 발견했으니, 답사를 하면서도 이런 경우는 또 생전 처음이다. 당집 앞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었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고 부르던 것을, 누군가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부른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굳게 닫힌 문, 까치발로 보다

 

그런데 문제는 미륵당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는 것이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미륵님 미륵님, 선이라도 보세요?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을 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을 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가 힘들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을 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향민을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다 마을을 떠난 듯하다. 매일 수백 대의 버스가 앞으로 지나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미륵당 석불.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모처럼 틈을 내어 찾아간 수원 파장동 미륵당 석불. 생긴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 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영험한 미륵조차도 버려두는 것인지.

백제탑의 우아하고 선이 아름다운 점과, 신라탑의 장중하고 무게가 있는 이점만을 골라 탑을 조성하였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에 소재한 오층석탑이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무량사는 고려 초기에 대중창을 하여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인조(서기 1623~1649) 때 진묵대사께서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무량사를 찾은 날은, 절 경내에 하얀 눈이 꽤 많이 쌓여있다.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만 치워놓았을 정도이고, 탑 주변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오랜 기억에 남아있는 무량사

 

무량사는 인연이 깊은 절이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1993년이었으니, 올 해로 20년 째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왔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명창이신 고 박동진 선생님과 동행을 했었다. 판소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들린 곳이었기에, 남다른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도 무량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다만 김창진 명창이 10년 세월을 득음을 위해 독공을 했다는 삼성각 앞에, 또 한 채의 요사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무량사는 늘 정겨운 곳이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답사를 위해 찾아다니지만, 가끔은 너무나 많은 변화로 인해 당황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려전기의 균형 잡힌 오층석탑

 

무량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물인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이 일렬로 서 있다. 맨 앞에는 보물 제233호인 석등이 서 있고, 그 뒤편에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그 뒤편에는 외부를 중층으로 지어진 보물인 극락전의 웅장한 자태를 볼 수가 있다.

 

눈이 쌓인 한 겨울의 오층석탑. 이 무량사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한 탑이다. 이 탑은 백제탑의 아름다움과, 신라탑의 장중함을 이어받아 조성한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기단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을 했다. 기단부에 조성한 석재의 면을 둥글게 깎아내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한 마디로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런 점이 안정감이 보이기도 한다. 몸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덮개석인 지붕돌과 몸돌의 줄어드는 비례가 알맞아,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지붕돌의 넓이가 몸돌에 비해 넓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이 탑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낮은 몸돌을 지붕돌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 어디한 곳 흠잡을 데가 없어

 

무량사 오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와 신라의 문물이 합쳐 낸 문화의 극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두 고대국가의 서로 다른 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석조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무량사 오층석탑은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든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마저도 추운 줄을 모르니 말이다.

 

기단부 상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서로 다른 돌을 이용해 표현을 했다. 그리고 아래지석과 위 덮개석의 면을 둥글게 깎아, 석재가 주는 딱딱함을 없앴다. 그 위에 몸돌은 층이 올라 갈수록 줄어들면서, 적당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아랫면을 홈을 내어, 몸돌이 겉돌지 않게 조성을 하였다. 몇 장의 돌을 이용해 지붕돌을 조성하였다는 것도 특이하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아있다. 몸돌이 이층부터 차츰 줄어든다가나, 받침돌의 면을 둥글게 조성한 것들이 그러하다. 아마도 이 오층석탑을 조성한 장인이 백제와 신라의 많은 탑을 돌아본 후, 이 탑을 조성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무량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운 선의 정점은, 바로 지붕돌의 처마 끝에서 보인다.

 

 

한 장의 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양편의 처마 끝이 날아오르듯 위로 적당히 솟아있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많이 치솟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게 솟아오른 처마 끝. 그저 석탑 하나에도 이렇게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 있었던 선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이런 감탄이 끝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발길이 닿는 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는지.


왜일까? 한옥의 추녀마루가 들린 듯한 모습. 그리고 날아갈 듯한 곡선.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한 눈물이 흐른다. 아마도 그 아름다움이 마음을 동하게 해서인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웃긴다’라고 표현을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이해를 할 수 없으니, 웃기는 일은 맞는 듯하다.

한옥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부분은 상당히 복잡하다. 내림마루에서 추녀마루로 흐르는 선은 가히 예술이다. 어찌 그 딱딱한 목재와 기와만을 갖고도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인지. 그래서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집에서도 볼 수 없는 곡선

한옥의 처마선. 그 아름다움의 끝은 바로 굴곡진 선이다. 그 끝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듯 올려져 있다. 마치 그 끝에 몸을 실으면 하늘 저 끝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 선은 세상에 어떤 집에서도 표현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한옥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오늘 비가오는 날,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바라보다가 새삼 그 아름다움에 젖어버렸다. 말도 형용할 수 없는 처마의 아름다운 선. 울컥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른다. 아마도 저 선에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내일은 또 다시 한옥의 선을 찾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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