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시란 임금님의 시를 말한다. 조선조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정자가 있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변 무릉리. 정자 앞에는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있고, 작은 정자에는 요선정이란 현판과 함께, 모성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임금을 그린다는 뜻인가 보다.

요선정(邀僊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15년에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회원들이 지은 이 정자는, 앞으로는 저 아래 계곡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자 앞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석탑 1기가 있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 빼앗길 뻔하다

더욱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쓴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가치를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은 정자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요선정에 걸린 어제시는 숙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원래는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다.

그 후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시골의 촌부들이 지켜낸 어제시

일개 촌부들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소중한 어제시 현판이, 수주면에 거주하는 원씨(元氏)·이씨(李氏)·곽씨(郭氏)의 3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숙종임금의 어제시 현판이 일본으로 건너갈 위기에 놓인 것을 많은 돈을 주고 돌려받은 무릉리 요선계원들. 그들이 진정한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요선정으로 오르는 숲길 입구에 있는 작은 암자에 차를 대놓고, 주천강 옆으로 난 숲길을 오른다. 강바람인지 바람 한 점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난다. 예전에는 요선계원들이 지켜 온 어제시를 이제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지키고 있는 것인지.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는 수많은 석탑. 그 많은 탑들의 형태는 다 제각각이다. 시대와 지역, 혹은 장인에 따라서도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렇게 다양한 석탑을 답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석탑 중에는 조각이 화려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밋밋하면서도 장엄한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 크기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어느 것은 작지만 정말로 화려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북 정읍시 은선리에 가면 백제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은, 고려 탑이 한 기 서 있다. 도로에서도 보이는 이 탑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곡마을이라는 곳에 자리한다. 뒤편으로는 예전에 석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된 듯하다.


‘그 참 묘하게 생긴 탑일세.’

은선리 삼층석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으로 그 형태가 묘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인 석탑처럼 몸돌이나 지붕돌 들이 정형화가 되어있지 않다. 그저 얼핏 보면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듯 조성을 한 듯하다. 이 은선리 삼층석탑의 높이는 6m 정도가 된다. 단층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층의 몸돌은 2m가 넘게 높이 서 있고, 이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이 삼층석탑은 이층 탑신(몸돌)의 남쪽 면에 두 개의 감실을 새겨 넣었다. 일반적으로 하나씩만 새기는 것이 보편적인데, 감실을 나타내는 문짝을 두 개씩이나 새겼다는 것도, 이 탑이 색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이 은선리 삼층석탑은 지붕돌을 평면으로 처리를 해서, 그것이 지붕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없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

이 탑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석탑과 흡사하다. 전체적으로는 모습이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 백제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 제16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은선리 삼층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탑의 형태로, 그 변화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탑이다.

지난 주 찾아간 은선리 삼층석탑. 주변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발길을 미끄럽게 만든다. 탑 주변에는 아무도 들린 사람들이 없는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발목까지 빠진다. 눈이 빠진다고 해서 답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이런 날일수록 더 열심을 내야한다는 생각이다.



지대석은 눈 속에 묻혀 정확한 모습을 알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위에 선 기단부는 판석을 세워 양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탑이 약간 변형이 되었는지, 한편은 양우주의 표현이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도 무게 때문에 약간 변형이 된 듯하다. 기단부 위에 놓인 지붕돌은 평평하다. 그냥 넓은 판석을 올려놓은 것만 같다.

두 장씩의 돌로 쌓아 올린 탑

일층 몸돌은 길게 세워져 있다. 중앙에는 두 개의 판석을 붙였음을 알 수 있게 가운데에 금이 선명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지붕돌은 아래를 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평평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층서 부터는 급격히 몸돌이 좁아진다.



지붕돌은 사면에 일자로 금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네 장의 판석을 시용한 듯하다. 보기에는 밋밋한 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견고한 석탑의 장중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제 지역의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당시 이 지역 석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수많은 석탑들. 그 다양한 형태를 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답사가 힘들어진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힘이 부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면서 각각 그 나름의 특징들을 알아가는 것이 민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공부는 답사를 마치는 날까지, 다 배워지지 않을 듯하다.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84번지, 학성산에 위치한 ‘인취사’. 2월 13일, 일요일에 찾아간 인취사는 그리 넓지 않은 길을 구불거리며 들어간다. 인취사 주변은 온통 연꽃이 즐비한 곳이다. 연꽃축제로 더 알려지기도 한 이 절은, 백제 무녕왕 18년인 518년에 창건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창건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주지 ‘창암스님’은 극락전에 모셔진 삼존불 등에 넣어둔 절의 내력을 적은 복장물들이 다 도난을 당해, 절의 중창 년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신다. 인취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인취사(咽嘴寺)’라고 나와 있고,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지금과 같은 ‘인취사(仁翠寺)’로 적고 있다.


축대 밑에 자리한 연꽃단지

인취사를 둘러본다. 현재 주지인 창암스님이 이곳에 부임해 축대를 새로 쌓고, 안쪽에 있던 종각을 축대 앞으로 끌어내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반듯하게 쌓은 축대 밑에는 고무 통을 나란히 땅을 파고 묻어, 그곳에 연꽃을 심어 놓았다. 봄이 되면 각종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 볼만 하다는 곳이다.

넓은 마당의 뒤편으로는 삼존불을 모신 극락전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공양간이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을 딴 용도로 사용했을 것 같다. 공양간 좌우편 끝에는 요사가 자리하고, 그 중간에 석탑 2기가 서 있다. 그저 넓은 공간에 듬섬듬성 서 있는 탑이며 전각들이, 조금은 휑한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산비탈에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시원한 정경이 펼쳐진다.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석탑 2기

인취사에는 옛 석탑이 2기가 서 있다.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 보호철책 안에 서 있는 이 석탑은 모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앞에서 산 쪽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것은 오래된 것이나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른쪽에 서 있는 탑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 석재로 구성한 이 석탑은 기단 갑석위에 삼층 석탑이 올려 진 상태로 있다. 기단갑석은 한 편이 떨어져 나가 상태이고, 탑신과 옥개석인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탑신인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아래서부터 4-3-3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2단의 굄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삼층석탑은 비례가 맞지를 않는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깊게 떨어지고 있으며, 옥개석 끝의 반전도 그리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이고 있어, 전체적인 탑의 모습을 가늠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5층으로 추정되는 인취사 석탑

탑의 맨 위에는 부정형의 돌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탑도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절을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모아 놓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단갑석의 크기가 탑의 크기에 의해 맞지가 않는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아래 이층부분이 유실된 듯하다. 기단부가 없어지고 갑석만 남아있는데, 그 갑석의 크기로 보아도 그렇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취사 삼층석탑. 비록 문화재자료이기는 하나, 그 또한 소중한 고려시대의 유산이다. 이런 탑 하나에도 공을 들여 조성을 했을 당시 장인의 마음과 손길을 기억해 내는 것은,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2월의 찬바람에 올라간 인취사. 넓은 절터에 부는 한줄기 바람이 탑을 돌아 저 밑 연꽃마을로 사라진다. 곧 꽃피는 춘3월이 돌아오면 인취사는 각종 아름다운 연꽃으로 단장을 하게 될 테고, 그 바람 한 점이 꽃을 재촉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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