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용주사천보루 (龍珠寺天保樓)’.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정조 14년인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세운 절이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용주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그 전각의 배치나 규모 등이 다르다. 이것은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찰로사의 모습보다는 궁의 한 면을 옮겨놓은 듯한 형태로 꾸몄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기에 용주사는 절의 입구인 출입문도 일반적인 문이 아닌 삼문으로 조성하였다.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인 1790년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천보루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새 날개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이다. 천보루의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쾌성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팔정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석조기둥으로 받친 천보루

 

천보루는 좌우에 있는 요사채인 동편의 나유타실과 서편의 만수리실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의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용주사가 딴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이렇게 천보루를 받치고 있는 석주는, 용주사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회랑과 자연스럽게 연결해

 

천보루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다. 바로 동쪽에 나유타료(那由陀寮)’와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용주사의 창건당시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인데, 천보루는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중앙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천보루와 연결이 되어있는 회랑인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의 건물양식을 그대로 받아 조성한 것이다. 특이하게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대웅보전에서 바라보면 차우 김찬균의 글씨로 쓴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조의 마음이 담긴 홍제루에서 배워라

 

밖에서 보면 천보루요, 안에서 보면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 진 것이다. 이 누각은 원래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홍제루란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정조의 호인 백성을 사랑하는 홍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호인 홍제는 <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에서 따온 것으로, 넓고 큰마음과 굳센 의지를 뜻한다.

 

 

용주사를 다녀온 지는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 새롭게 이 천보루를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세월호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실종자들을 향해 거북한 소리를 해대는 모자라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천보루를 지나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뭇 낮아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 땅의 모든 높은 자리라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용주사를 찾아 홍제루를 지나면서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깊게 머리를 숙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를 찾아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한 기가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을 그리 어렵지가 않다. 큰길가서부터 석불입상까지 안내판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석리의 석불입상은 부처로 표현을 하였다. 마을 안에 버티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지나가면서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높이 4,32m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두 덩어리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허리 아래까지가 한 개의 네모난 석재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밑으로 발까지가 또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사각석주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봄눈 사라지듯 사라졌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그 정도로 안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석불입상의 수인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 표현을 한 손 모양이,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해 보인다.

이러한 투박한 모습의 석불들이 고려시대 경기, 충청지방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발의 발가락이 뚜렷하게 보이게 조성한 아래로는, 꽃부리를 위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진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가 있다.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는 이 연화대좌는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찬 돌속에 편안한 온기가

석불입상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팔각의 보개석을 이고 있다. 이 석불을 보면서 저 보개석이 인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입상의 커다란 짐을 올려놓은 까닭은, 인간의 수많은 고통을 저리 부처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계신 것이나 아닌지. 그 고통을 이고도 저리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억만겁 세월, 스스로를 달굼 질한 수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어석리 석불입상은 네모난 얼굴에 뺨과 턱이 둥글게 표현이 되고, 눈은 길게 꼬리가 뻗어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 그리고 입 주위를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생명이 없는 찬 석재를 갖고도, 저리 온화한 미소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미륵입상을 조성한 석공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모난 석주처럼 보이는 석불입상. 커다란 돌을 갖고 이렇게 깎아내고 다듬기까지, 석불을 다듬은 장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보면 절로 마음속에 고통을 잊게 된다. 아마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이 바로 부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각은 사라지고 주추만 남아

석불입상 주변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 난 장초석이 서 있다.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이 선돌들은 주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불입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미륵불이 유난히 많다.

그것은 통일신라 후기에 일어난 궁예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한 궁예가 미륵정토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쏟아내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생각으로 인해 잠시 세상의 고통을 잊는다. 아마도 석불입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행복이, 결국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 한 자락 내린 것이나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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