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생각해보니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질기기도 하다. 17일 오전 막히는 길을 이리저리 돌고 돌아 여주로 향했다. 여주군 북내면 서원리에 사는 아우를 오랜만에 만나보고 싶어서이다. 아우는 이곳에서 정착을 한 지가 벌써 20년 세월이 훌쩍 넘었다. 처음 아우네 집을 찾았을 때는 마을에 달랑 아우네 집 밖에는 없었다.

 

전 민예총 경기지회장을 맡았던 서종훈(, 52)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 벌써 20년 세월을 훌쩍 넘겼다. 당시는 대전에서 방송 일을 할 때였으니, 참 세월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예전 PC통신 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마치 친 형제처럼 그렇게 지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왕래를 하면서 살아 온 세월이 벌써 이렇게나 지났으니, 그동안 둘 사이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한이 없을 듯하다.

 

 

설치미술, 도자기, 그리고 화가

 

아우는 가끔 설치미술도 하고 행위예술도 한다. 물론 전공은 그림이지만, 아우네 집은 3대째 전해지는 도공의 집안이기도 하다. 전통 가마를 만든다고 해서 대전서부터 여주까지 참 뻔질나게 찾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공주대 학생들과 함께 토요일마다 여주로 올라가 망생이라는 흙덩어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전통 가마를 만들기도 했다.

 

사람 좋아하는 아우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고는 한다. “아우는 그냥 아무데나 던져 놓아도 살아서 올 것 같다늘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그만큼 세상사람 누구나 다 포용을 할 수 있어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아우네 집에는 늘 많은 객들로 북적이고는 했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면 그 자리에서 휴지를 길게 풀어 멋들어지게 살풀이 한 판을 출 수 있는 멋을 지닌 사람이다.

 

 

섭지코지를 그리다

 

몇 년 만에 아우네 집을 들렸다. 변함없이 작업실에 앉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아우. 서원리 맨 위편 양평군 양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작업실은 넓은 편이다. 한편에는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집 작업실에는 온돌방이 함께 달려있다.

 

피곤할 때면 늘 이 집을 찾았다. 그리고 술 한 잔 마시고 뜨끈하게 불을 땐 온돌방에 올라 누워있으면, 온 몸에 찌든 피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꼭 그래서만 이 집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 아우네 집에서 몇 달 동안 기거를 한 적이 있다. 바로 현재의 작업실이 그곳이다. 그래서 이 작업실은 나에게는 아픔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찾아 간 곳이라 차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전시실을 둘러보니 전시실 안이 온통 섭지코지그림으로 가득하다. 섭지코지를 그린 많은 그림들은 각기 계절과 시간, 크기 등이 모두 다르다. 그런 섭지코지의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제주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섭지코지만 그리고 있다고 한다.

 

더 많은 작품 그려 전시할 계획이라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섭지코지의 아픔. 섭지코지는 4,3 양민 학살 때 252명을 학살한 곳이다. 이우의 그림 중에 여명이 밝을 무렵의 섭지코지 그림이 눈에 띤다. 섭지코지의 그림 위에 많은 반점이 있다. 학살당한 양민들의 눈물인지, 아니면 그들이 흘린 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그림 앞에 서면 싸한 아픔이 밀려온다.

 

 

오래 머물 수가 없어 바로 작업실을 뒤로 했지만, 그런 그림 속에 배어있는 아픔 때문인가 발길이 무겁다. 작업실 앞에 마련한 작은 연못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의 소리도, 더운 5월의 한 낮의 뜨거움을 삭이지는 못하는 듯하다. 아우와 20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 변한 것이라고는, 얼굴에 늘어난 주름뿐이다. 인연이란 참 질긴 것인지?

413() 여강길 걷기가 열렸다. 이날 여강길을 걷는 사람들은 우만리마을회관을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부라우나루터-우만리나루터로 돌아오는 길을 걸었다. 우만리나루에는 서종훈(, 52. 전 민예총경기지회장)이 깎아 세운 장승과 솟대가 서 있고, 앞에는 간단한 고사상이 차려졌다.

 

장승제는 남한강 물을 정귀영(여주중학교)교사가 떠다가 그 물을 올리고 장승제를 지냈다. 장승제는 간단하게 20여분 만에 마쳤는데, 축문을 읽고 모인 사람들이 장승에 배례를 하고 그쳤다. 장승제에 여강길 걷기를 마친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도착하자 풍물패(대표 김미진)들이 길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인도를 했다.

 

 

1972년까지 나룻배가 다녔던 우만리나루

 

우만리나루는 여주읍 우만리 우만이마을에서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를 연결했던 나루이다. 우만리나루는 마을의 명칭에 따라 우만이나루라고도 불렀다. 나루터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보호수 1기가 있어 여름철이면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1972년 홍수로 나루가 없어지기 전까지 우만이나루에는 20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와 최대 10명까지 승선할 수 있는 거룻배가 각각 1척씩 있었다고 한다.

 

이 나룻배는 우만이마을에서 관리하였으며, 강천면의 적금리와 굴암리, 가야리의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할 때 사용을 하였다. 또한 여주읍 우만리와 멱곡리 주민들이 강천면으로 땔감을 구하러 갈 때 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우만이나루는 원주장에서 소를 구입한 소장수들이 우만이나루를 경유하여 여주장과 장호원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특히 여주장으로 가는 소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만이나루의 마지막 사공은 작고한 송부성씨였는데, 나룻배를 자주 이용하는 주민들에게서 1년에 겉보리 1말과 벼 1말을 거두었는데, 볏가마를 지고 다니면서 받았다고 한다. 곡식을 내지 않는 승객은 요금을 내었는데, 1970년경 배삯은 편도에 300원이었다고 한다.

 

배를 건조하고 수선하는 비용은 모두 사공이 부담하였다. 배의 수명은 약 10년이었으며, 여주장에서 송판을 구입하여 목수에게 맡겼다고 한다. 송부성 사공은 부라우에 거주하던 목수를 불러서 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하루 세끼를 제공하고, 하루 일당으로 쌀 1말을 주었다고 한다. 거룻배의 경우 1주일 내외, 나룻배는 보름 이상 걸렸다고 한다.

 

 

붉은 바위가 있는 부라우나루

 

여주읍 단현리 60-7 일대에 고려 때부터 조성이 된 나루. 한 때는 소금배가 드나들기도 해서 강원도 지역으로 오가는 상인들이 줄을 잇던 곳이다. ‘부라우나루는 여주읍 단현리 부라우마을과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지역을 연결하던 나루이다. 나루 주변에는 붉은 기운을 띤 바위들이 있어 단암(丹岩)’ 이라고 부른데서 부라우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나루는 마을에서 약 25m의 나지막한 고개 너머 급경사를 이룬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강가로 돌출한 바위가 거센 물결을 막아주지만 홍수가 나면 나루터 주변에 가까이 있던 가옥들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고도 한다. 이 마을로 들어서는 고갯마루에는 민참판댁 외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인근의 능현리는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는 여흥 민씨의 집성촌이었다.

 

지난 해 616일 무더운 날 찾아간 부라우 나루터. 강가 바위 위에는 육모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주춧돌이 있었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정자 주변 암벽에는 단암(丹嵓)’ 이라고 새긴 각석이 남아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남한강을 오가는 나룻배는 단현리 부라우마을에서 관리하였는데, 길이는 15m 내외로 약 40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해 616일 부라우나루굿 모습

 

부라우나루는 1975년경부터 사용을 하지 않았다. 부라우나루는 주로 여주군 강천면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하기 위해 부라우나루를 건넜고, 단현리 부근 주민들은 남한강 건너 강천면에서 땔나무 채취를 하기 위해 나루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소장수들이 원주장에서 소를 구입하여 부라우나루를 건너 여주장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단현리 부라우마을의 고갯마루에는 99칸의 민참판댁이 있었다고 전한다. 민참판댁 옛터에서 조금만 걸으면 남한강이 나오는데, 강가의 바위 절벽위에 침석정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위 위에는 침석정의 기둥자리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각형 홈이 3개가 남아 있다. 이곳 남한강의 마을사람들은 단강(丹江)’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단암 때문인 듯하다.

 

 

장승, 엣 기억을 더듬다

 

우만이나루에 세워진 장승은 여주군에서 제작비를 대고, 북내면 서원리에서 작업을 하는 서종훈 작가가 제작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강길을 걷는 날에 맞추어 장승제를 지낸 것이다. 우만이나루에 서있는 장승은 장승4기와 솟대 12본이다. 아마도 이 장승과 솟대들은 우만이마을의 평화와 죽어가고 있는 여강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이 될 것이다.

 

우만이나루에 서 있는 장승. 그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공동체를 되살리는데 일조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월이나 10월 상달이 되면 이곳에다 떡 한 시루와 물 한 동이 떠놓고 비손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고함치는 옛 기억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서원리에 가면 이름조차 낯선 갤러리가 있다. <물맘 갤러리>라는 작은 이정표 하나가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서 있다. 이 안내판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첫 번째 만나는 집이 바로 물맘갤러리이다. 갤러리의 주인 서종훈씨(남, 50세)는 현재 민족예술인총연합의 경기도지회장이다.

이 갤러리 안에는 못쓰게 망가진 보습, 쟁기, 삽, 쇠스랑, 호미. 그리고 옛날 숯을 넣어 곱게 한복 선을 주름잡던 다리미 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생명을 얻어 전시가 되고 있다. 두 번에 걸쳐 사람들과 공동작업을 통해 전시회를 갖기도 한, 이 폐농기구의 새 생명전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폐농기구가 주는 의미

폐농기구는 단순히 고철이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피땀이 배어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들이 그 안에 녹아있다. 쇠스랑, 쟁기, 호미 등, 이런 것들을 이용해 힘들게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 농기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먹고 사는데 이용한, 생명의 원천이었다. 그 안에는 가족의 생명이 함께 한다. 그래서 창고에 넣어두고 녹이 슬었지만, 버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런 폐농기구가 창고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새 옷을 입었다. 아버지의 모습으로, 꽃으로, 그리고 또 아름다운 산천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전문적인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 것도 있지만, 집에서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들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 그림 하나마다 뜻을 둔다. 그것은 곧 어제와 오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가교역할을 한다. 생명을 불어 넣은 사람들은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기에 이 농기구들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망가지고 부수어진 농기구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면서, 스스로의 생명줄을 이어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강에 꽂힌 괭이가 주는 아픔

여주는 남한강이 가로지른다. 은모래금모래의 추억은 여주사람들 누구나 다 갖고 있다. 어릴 적 그곳에서 수영도 하고, 모래밭에서 두꺼비 집도 지었다. 그래서 강변을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런데 그 맑은 물에 커다란 괭이 하나가 떡하니 박혔다. 무슨 의미일까? 보는 이마다 제각각 의미부여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배라고 한다.

강심에 배를 띠운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한다. 그도 맞다. 어떤 이는 이것이 무분별하게 파헤쳐지는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 말도 맞다. 폐농기구가 주는 의미는 그래서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아름다운 경치에 어울리지 않는 괭이 한 자루. 그것은 곧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든다.

아버지의 땅엔 무슨 일이

아버지의 땅. 삽 한 자루에 깊게 골이진 얼굴. 옆머리는 이미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아버지는 이 땅에서 무엇을 헸을까? 그 위에 이빨이 다 나가버린 삽 한 자루가 덜렁 놓여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한 마디로 이렇게 피눈물 나게 농사를 지었다. 삽날이 다 닳아빠지게 고생을 하면서 농사를 지었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부채 뿐은 아닐는지.

그렇게 힘든 세상을 살다가 보니 귀밑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손가락 마디는 굳은살이 박여 제대로 굽어지지도 않는다. 그런 세상을 살아오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이, 그리고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이 마음 아프다. 날이 빠진 삽이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직도 땅을 떠나지 못하신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엉겅퀴의 어린순은 나물을 해서 먹는다. 그리고 엉겅퀴의 뿌리는 약용으로 사용하는 등 볼품없는 풀이지만 많은 곳에 사용을 한다. 엉겅퀴는 지혈을 하는데 특효가 있으며, 각종 출혈에 좋다. 특히 폐결핵에 뛰어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요법에서는 엉겅퀴로 술을 담으면 신경통과 요통의 특효약이라고 한다.

이런 엉겅퀴가 날이 나간 쇠스랑과, 자루가 빠진 낫과 함께 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작가는 이 엉겅퀴가 많은 약효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란다. 농사를 짓다가 뼈가 갈라지고,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긴 상처. 몸도 마음도 찢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엉겅퀴를 그렸다. 그리고 답답한 나머지 논두렁에 앉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망가져버린 폐와 간을 위해 엉겅퀴를 그렸다. 그래서 망가진 농기구는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힘이 되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병든 우리네들

옛말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는 말이 있다. 적은 일을 괜히 크게 벌려 낭패를 본다는 뜻일 게다. 요즈음 우리 사회기 그렇다. 그저 순탄히 넘어갈만한 일을 괜히 크게 벌려놓고 감당을 하지 못한다. 작은 호미 하나로 할 일이 있고, 가래로 할 일이 따로 있다. 그런데 호미를 써야 할 일을 괜히 가래를 들고 나오기도 한다. 정말 정신이 없다.

녹이 쓸어 쓸 수 없게 된 낡은 호미에 오방색을 칠했다. 오방색은 우리의 방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온누리를 상징한다. 자연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변화가 되어간다. 물은 흐르는 대로 흘러간다. 그 물은 자연이다. 호미 안에는 그런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리미와 쇠스랑

쇠스랑은 세발 쇠스랑과 네발 쇠스랑이 있다. 같은 쇠스랑이다. 흙을 일구고 덩어리진 흙을 잘게 만들어 밭을 편편하게 만들 때는, 따비, 쟁기, 가래 등을 사용한다. 쇠스랑도 이때 사용하는 농기구다. 논둑을 뒤엎고 흙을 긁어모을 때도 사용한다. 쇠스랑은 우리 농기구 가운데 많은 일을 감당한다. 이 자루도 없는 녹 쓴 쇠스랑이 꽃줄기가 되었다. 이제는 쇠스랑을 쓸 일이 많지가 않다. 모든 것을 기계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쇠스랑이 대신 꽃을 피웠다.


다리미가 있다. 안에다 벌겋게 단 숯을 집어넣고 다림질을 한다. 다리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듯한 물은 생명의 물이다. 거기서 많은 물고기들이 산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다리미는 뜨겁다. 온기가 있다. 그래서 다리미를 이용했다. 지금은 저런 다리미를 사용하는 가정은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다리미다. 그 다리미가 생명을 살린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폐 농기구둘이 전시가 되어있다. 여기에는 우리사회의 병든 모습이, 그리고 망가진 우리네의 농촌이, 멍들어버린 농사꾼의 마음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치유하기 위한 작업을 한 것이다. 그 폐 농기구들을 둘러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될까? 어찌보면 그 망가지고 녹쓴 모습이 우리 민초들은 아니었을까? 다시 눈 여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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