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50에 소재한 보원시지. 보물 제12호인 서산 보원사지 석조 (瑞山 普願寺址 石槽)’는 서산 보원사 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기도 하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과 팔각형, 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 일석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조의 형식을 보인다.

 

 

크기가 거대한 보원사지 석조

 

보원시지 석조는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 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이 석조는 안쪽과 위쪽에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칠게 다듬은 자국이 그냥 남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조는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적 제316호인 보원사지는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보원사는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석조는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창건된 보원사의 석조이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 석조

 

석조란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용기를 말하는데, 그 용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금당 앞에 자리를 한 석조는 승려들이 예불을 들이기 위해 금당에 오를 때 손을 정갈하게 씻기 위한 것으로 사용했으며, 그 외에도 목욕을 하거나 마실 물을 담아두기도 했다. 또는 음식을 조리하기 전에 씻을 때 사용하기도 했다.

 

보원사지 석조는 장방형의 것으로, 길이 3.48m, 너비 1.75m, 높이 0.65m의 크기이다. 이 석조는 당시 보원사라는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좋은 유물이다. 석조의 벽 두 곳에 커다란 갈라짐 현상이 일어 깨어져 있는 보원사지 석조. 오랜 세월 속에서 자연스런 훼손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좀 더 일찍 우리 문화재에 대해 신경을 썼더라면 더 완벽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서이다.

 

 

각종 보물들이 즐비한 보원사지

 

보원사지에는 몇 기의 보물이 남아있다. 그 중 법인국사 보승탑비의 기록에 보면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고 했다. 그런 기록을 유추해 볼 때 보원사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지에는 보물 제102호인 석조를 비롯하여, 보물 제103호 당간지주,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과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보원사지 가까이에는 국보인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손꼽힌다. 석조 하나가 주는 고찰의 의미. 문화재란 그것으로 인해 그 문화재가 갖는 역사적인 면들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소중하다. 그런 문화재를 작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란 생각이다.

‘탑비(塔碑)’란 옛 고승들이 입적을 한 후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고, 그 옆에 승적기를 새긴 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탑비’는 광종의 명에 의헤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워진 법인국사에 대한 기록을 적은 비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안에 소재한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옛 보원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보원사 터에는 보물 5점과 함께 많은 석재들이 있으며, 주변에는 국보인 용현리마애삼존상 등이 남아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신과 관계하는 꿈을 꾸고 난 탄문

 

법인국사 탄문의 탄생일화는 신비하다. 국사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귀신과 관계를 맺는데, 한 중이 홀연히 나타나 금빛 가사를 주고 갔단다. 이 날 탄문의 어머니는 임신을 하였고,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법인국사의 자는 대오이며, 성은 고씨이다.

 

 

 

 

 

탄문은 15세에 출가할 뜻을 비쳐, 북한산 장의사 신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925년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을 하자 안산을 기원하니, 태어난 이가 바로 광종이다. 949년 광종이 즉위하자 대궐에서 법회를 베푼 후에 새로 낙성을 한 귀법사의 주지와 왕사가 되었다.

 

광종 25년인 974년에 법인이 은퇴를 청하자 광종은 국사로 임명을 하였다. 그가 서산 보원사로 길을 떠나자, 광종은 친히 왕후와 태자, 백관 등을 대동하고 개경 교외까지 그를 배웅하였다고 한다. 보원사로 온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국사가 된 이듬해에 기부좌한 자세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75세, 법랍은 61세였다.

 

 

형식에 치우친 듯한 귀부와 이수

 

법인국사의 탑비는 경종 3년인 978년에 세웠다. 대개 거북이의 몸과 용머리를 가진 비의 귀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를 거치면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의 탑비받침인 귀부 역시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용의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 머리인 이수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귀부의 등에 새겨 넣는 문양이 없이 밋밋하게 구성을 하였다.

 

또한 비 머리인 이수의 용 조각도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형태는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단순하다. 거북의 앞발도 일반적으로 땅을 박차고 나가는 힘이 있는 표현이 아니라 형식적인 표현을 하였다. 하지만 이 법인국사 탑비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거의 훼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산 보원사 터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 보승탑과 법인국사 탑비. 아마도 이 탑비는 법인국사의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978년에 이 탑비를 세우고 ‘법인’이라는 시호와 ‘보승’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기 때문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보원사지. 보원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 중 보물 제104호인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세워졌는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수많은 문화재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상당히 번창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은 보원사지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추정하고 있으나, 보원사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근 용현리에서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무게감을 더하고 있는 오층석탑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탑 중 하나이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조성한 오층석탑은,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겼다. 하지만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해 사장상의 모습은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윗기단은 양편에 양우주를 돋을새김하고 가운데는 탱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옆면에는 팔부중상을 2구씩 각 면에 새겼는데, 조각은 세심하지는 않지만 힘이 있어 보인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무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팔부신장은 인도의 고대불교 이전부터 있던 신격이불교에 수용된 신들이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중상

 

팔부신장은 흔히 ‘명중팔부’ ‘천룡팔부’ 등으로도 불린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신장은 경전의 내용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경전상으로도 여래팔부중과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을 말한다.

 

 

 

 

즉 천과 용, 야차와 건달바, 아수라와 가루라, 그리고 긴나라와 마후라가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은 건달바, 비사사, 구반다, 벽협다를 비롯해 용과 부단나, 야차와 나찰 등을 말한다. 석탑의 기단부나 불화 등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팔부신장은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에 조각된 팔부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계 양식을 모방한 고려석탑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양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이며 귀퉁이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의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이 지역은 옛 백제지역이기 때문에, 그 지역의 석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머리장식받침인 네모난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 듯 하지만, 장중하고 기단과 몸돌의 균형이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때이다. 문화재 하나를 소개하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야하는 나로서는, 보원사지와 같은 곳이 정말 즐거울 수밖에 없다. 오층석탑 주변에 즐비하게 널려진 보물들과 석재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힘들게 걸어 온 길의 피로를 잊는다.

 

날이 갑자기 추워지면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단풍들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스러져 간다. 그런 단풍들이 아쉬워 연일 단풍을 보려는 사람들로, 단풍이 절경이라는 곳은 만원이란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자리한 상왕산 개심사. 가을 단풍이 그리운 사람들에게는 제몫을 다하고 있는 곳이다. 일주문에서 돌로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발밑을 간질이는 낙엽들과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단풍, 붉다고 단풍은 아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단풍이다. 개심사의 단풍은 바로 그런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다. 개심사는 백제 때의 절이다. 혜감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개심사는, 대웅전 기단이 백제 때의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조 성종 6년인 1475년 소실이 된 것을, 성종 15년인 1484년에 중건한 것이다.


깔린 단풍을 밟고

일주문을 지나 상왕상 개심사로 가려면 10여 분을 걸어야 한다. 오르는 길에 만나는 돌계단을 밟으면 소리가 난다. 바로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때문이다. 지천으로 깔린 낙엽이 이리저리 뒹굴면서 발아래서 소리를 낸다.

주변은 온갖 색을 자랑하는 단풍들이 들어차 있다. 천천히 가을을 느끼며 오르다보면 어느새 입구에 들어선다. 연못 가운데로 난 길을 걸으면 별천지다. 그래서 가을에 개심사를 찾는 사람들은, 또 다시 다음을 약속하는가 보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이 된 대웅보전은 백제 때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주변의 단풍과 어우러져 또 다른 가을을 이야기한다



자연을 닮은 개심사


개심사가 좋은 것은 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심검당과 종각, 무량수각의 기둥들을 보면 제멋대로다. 굽어진 나무들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하나도 뒤틀림이 없이 버티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자연의 조화다. 자연 그대로를 사용한 전각들이 있어 개심사의 가을이 더 아름답다


어디를 가도 낙엽이 그대로 쌓여있다. 치우지 않은 낙엽이 있어, 개심사의 가을이 더 풍성해 보인다. 명부전을 지나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에 보면 환상적인 낙엽 길을 걷게 된다. 누가 이 아름다운 자연을, 둔한 머리로 표현을 할 것인가?



널브러진 나무가 하나 누워있어 마음이 편해진다. 만일 저 나무를 누군가 치웠다면 이리 아름다운 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을. 멋대로 놓아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치장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마음대로 놓여있는 것들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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