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에 자리하고 있는 남한산성. 이 산성에는 모두 4개소의 문이 있다. 물론 성마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련하고, 각기 그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동문이나 북문과 같은 이름들로 부르지만. 남한산성의 북문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그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였다.

 

남한산성에는 원래 4개소의 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 내에는 동문과 남문, 그리고 수구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북문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성을 개보수할 때, 새로 신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북문을 전승문이라 이름을 붙인 것일까?

 

 

패전의 아픔을 잊지 말라는 ‘전승문’

 

남한산성의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 부른 이유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적과 대치를 하고 있던 남한산성 내의 군사들은, 영의정이던 김류의 주장에 의해, 300명의 군사들이 북문을 나서 적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성문을 나선 병사 300명이 수많은 적을 기습공격을 한다고 해서 이기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성문을 나선 병사들은 적의 계략을 말려들어 변변한 전투 한번을 못해보고 몰살을 하고 말았다. 이는 ‘법화골 전투’라고 한다. 이 북문을 나선 병사들이 법화골에서 패전한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 내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던 병사들. 그들은 45일간이나 남한산성 내에 머물면서 청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 북문의 기습공격이 실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오랜 시간을 버티거나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는 않았을까? 군사 300명이 적에게 몰살을 당한 것이 최대의 전투로 기록이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기록은 아픔 그대로인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항복을 하러 나가는 인조의 모습은, 왕세자의 스승인 정지호가 쓴 『남한일기』에 잘 묘사 되어있다. 아마도 당시 인조와 세자의 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묘사를 한 듯하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와 마골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독촉하였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수행원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그 뒤를 따랐다. 뒤따르던 문무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였다.」

 

인조는 일만 삼천여 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을 갖고 남한산성에서 청의 20만 대군과 대치하면서 항전을 펼쳤으나,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 항전 45일 만에 삼전도에 나아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이렇게 항복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북문의 기습공격의 실패와, 1637년 1월 26일, 평안도 감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사 유림이 지휘하는 조선군 5천명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다가, 강원도 김화에서 청의 용골대와 마골대가 이끄는 수만 명의 병사들에게 패전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승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북문인 전승문. 누각에 오르니 아래로 가파른 언덕이 펼쳐진다. 저 곳을 지나 청의 군사를 공격하겠다고 병사들이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 가파른 언덕 밑에 청군의 군영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 140년이나 지난 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인 것도 당시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이다.

 

전승문은 성의 북쪽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성벽은 딴 곳과는 달리 경사가 지게 축성을 하였다. 성문 앞으로는 가파른 비탈이 펼쳐진다. 성문 문루 위에서 좌측을 보면 산등성이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성을 쌓았고, 우측으로는 평평한 길이 나 있다. 아마 이 북문을 빠져나간 병사들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전승문. 이 문 위에서 지난날을 가억해 본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패전을 했겠지만, 이 전승문의 실패를 거울삼았다면, 이와 같은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성문에 덧붙인 철판을 만져보면서, 역사의 아픔은 어찌 그리도 빨리 잊히는 것인지. 오늘 이 북문에 올라서 그 슬픔을 되새겨 본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은 조선 왕조의 치욕과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조선조『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치욕의 아픔을 지닌 산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이런 일로 인해 남한산성은 조선조 역사에 치욕의 성이 된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 내의 시설로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등이 있다. 이 중 광주시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동문을 찾아보았다. 동문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문이다. 현재 동문 앞의 오르막길은 일방통행으로 갈라져 있고, 그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문이 서 있다.

 

 

수문, 제11암문과 함께 있는 동문

 

동문은 그 옆으로 수문이 나 있고, 수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 있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서 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하기에 이 문을 통해 우마차가 다닐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문의 편액에는 ‘좌익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익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동문은 조선조 선조 때 보수를 하였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을 하였으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를 하였다. 동문 밑으로 현재 길을 내느라 성곽이 터진 아래편으로는 수문이 숨어 있다.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의 능선을 따라 축성을 하였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남한산성의 지형상, 산성 내의 모든 물은 대부분 이 수문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갔을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한의 문이 되어버린 동암문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가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원래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하여 축조한 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성의 귀중한 요소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 이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위에 축조를 했으므로,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고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보내던 문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그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남한산성의 곳곳을 뒤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한산성 전역을 돌아보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내는 것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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