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란 예전 작은 양철로 된 용기에 설탕과 소다를 넣어 연탄불에 올려놓으면 설탕이 녹는다. 그것을 철판 위에 붓고 비행기, 짐승 등을 조형한 강철로 만든 틀을 눌러 그 모형대로 따내던 또뽑기 놀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달고나는 전혀 다르다. ‘달빛아래 고색(古色)을 배경삼아 놀자꾸나.’가 달고나란다.

 

그렇다고 매번 달이 뜰까? 안 뜨는 날은 마음에 달을 하나 만들면 된다. 고색은 수원 화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방화수류정 앞에 조성한 용연이 놀이터이다. 한 마디로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앞 용연에서 한번 놀아보자는 것이다. 13일 토요일 8, 용연 주변에는 1,000명 정도의 관람객이 무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용연 안에는 작은 인공섬이 있다. 그 섬에 가교를 설치하고 무대를 마련했다. 그 무대에서 한 시간 정도를 질펀하게 놀자는 것이다. 노는데도 격이 있다. 한 마디로 여긴 노는 물이 다르다. 수원문화재단에서 913일부터 1011일까지 매주 토요일 밤에 마련한 달고나는 국악과 다양한 장르를 결합시킨 공연이다.

 

남사당놀이와 춤이 결합된 젊은 놀이판

 

13일 오후 8시부터 무대에서 조명이 켜지면서 함께 태평소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12명의 젊은 남녀들이 무대 위로 올랐다. 이 친구들 쉴 새 없이 춤을 추어댄다. 오빠는 강남스타일로 시작한 춤은 온갖 걸그룹들의 춤과 2000년대 박남정의 춤까지 정신없이 이어진다. 넌버벌 퍼포먼스 <The Club >이 만들어가는 무대이다.

 

 

이 친구들 복장을 보니 클럽께나 다녔던 친구들이다. 춤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시간여행으로 조선조 말기 남사당까지 이어진 놀이판은 결국 진도북춤과 소고춤, 그리고 난타와 버나, 살판 까지 들고 나왔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흥이 난다. 장단에 맞추어 손뼉을 치다가 손바닥이 얼얼한지 손을 흔들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참 재주도 많다. 클럽에서 노는 날라리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하는 양을 보니 풍물께나 접한 친구들이다. 한바탕 춤을 추고 난 뒤 한 젊은 처자가 호주전통 악기인 디저리두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디저리두 연주를 하는 동안 무대 위에 슬그머니 북을 갖다 놓는다. 두드림의 미학이라는 난타를 해보겠다는 심산이다.

 

 

이 사람들 어쩔 것이여? 밤새 놀아봐?

 

난타연주가 끝나자 사물패가 먼저 장단을 치면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층이 진 아래무대에 젊은 처자 둘이 북을 메고 나온다. 진도북춤 한 판을 신바람 나게 출 모양이다. 난장을 펼칠 남사당의 장단에 진도 북춤 한판이라. 기대를 하게 만든다. 춤을 추는 선이 아름답다. 뒤편 방화수류정에서 예전 정조대왕도 이렇게 용연의 춤을 즐기지는 못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도 든다.

 

탈을 쓴 이매가 나와 춤을 춘다. 춤이라고 하기보다는 젊음의 몸짓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 몸에 익으면 제대로 된 몸짓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버나잽이가 접시를 돌린다. 커다란 버나 하나를 들고 나온 친구가 사람들을 웃긴다. 이 친구들 나이에 비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 줄을 안다.

 

 

다시 처자 둘이 소고를 들고 나왔다. 사물에 맞추어 소고춤을 멋들어지게 춘다. 조금은 미숙한 면이 더 미소를 짓게 만든다. 살판을 하는 땅재주꾼들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무대에서 재주를 펴는 사람들도 즐겁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열두발 상모가 무대에 올랐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좁은 무대에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는 상모가 몸을 치감는다.

 

그래도 관객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미 이 젊은이들의 놀이판에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어디 밤새 한 판 벌려봐라는 소리들을 하지만, 1초도 쉬지 않고 이어진 클럽 판의 무대는 꼭 한 시간 만에 조명이 꺼져버렸다. 마음속에 아쉬움만 남겨 놓은 채.

남사당은 1900년대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으로 흔히 유랑집단(流浪集團)의 한 류파로 본다. 남사당이란 소리와 술, 몸을 팔던 여자들의 집단인 사당패에 비교하여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연희자 십 수 명이 있는 유랑예인집단으로, 일정한 거소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여자 1∼2명이 낀 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와서야 있었던 일이다.

 

남사당패들은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 등 6가지 놀이로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서운면 청룡리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하였다. 안성남사당패가 유명해 진 것은 〈바우덕이〉라는 여자꼭두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성남사당패의 꼭두쇠인 바우덕이는 사내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미모와 옹골찬 소리가락, 줄타기 재주가 당내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당대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예인 바우덕이

 

남사당 최고인 꼭두쇠 바우덕이(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기 때문에 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는 남사당패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로 안성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 등 온갖 남사당 기예를 익혔으며, 뛰어난 기량으로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걸판지게 떨쳐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미색을 겸비한 총기로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앙받은 바우덕이는 꼭두쇠로 활동하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남사당패의 전성기를 이루어냈다. 남사당패의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동짐꾼 등 40~50여명으로 구성되어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놀이를 행하였다.

 

남사당패의 조직

 

꼭두쇠는 패거리에서 대내외적으로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조직된 패거리는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일사불란하고 엄격하였다. 50명 안팎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그 충원방법으로 고아나 가출아 등을 받아들였고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부모의 승낙을 얻어 받아들이거나 유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곰뱅이쇠는 꼭두쇠를 보좌했는데, 곰뱅이란 남사당패 은어로 <허가>란 뜻으로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 보았다. 뜬쇠는 각 연회분야의 선임자로서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놀이의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을 두게 되며,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뜬쇠들의 판별에 의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연회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1가지씩 기예를 익힌 뒤에 가열이 되는데 이들은 가열이 되기 전까지는 여장(女裝)을 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남사당패는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는 없으며,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 노자와 이밖에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빌려주고 해우채를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였다.

 

 

안성 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기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해 김복만 - 원육덕 - 이원보 - 김기복으로 이어졌고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면서 끈질긴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본래 남사당패의 풍물놀이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하여 진풀이, 무동, 벅구놀이, 채상놀이, 선소리 등의 몸재주와 묘기에 소리(산타령, 새타령, 모찌는 소리, 논매는 소리등)까지 곁들이니 훌륭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풍물이란 우리나라 특유의 민중 음악이며, 남사당패에 의하여 떠돌이 판굿 모임에 맞게 놀이판이 풍부하게 짜인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 풍물놀이는 남도 농악에 비해 무동의 수가 많고 5무동을 비롯한 3무동, 4무동, 단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지며 최고의 기량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7무동이 있어 뛰어난 기량을 떨치고는 했다. 현재 안성의 남사당은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단장/김기복)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사당의 연희종목

 

남사당 놀이판에는 놀이 전에 줄타기의 줄을 매고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마당 한가운데에 버나․살판․덧뵈기 등을 연희할 멍석을 5∼6장 깐다. 여기서 벌어지는 <남사당놀이> 6종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⑴ 풍물 : 첫 번째 놀이인 풍물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무동(새미)․채상(열두발 상모) 등을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더하였다. 인사굿부터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터․당산벌림․양상치기․허튼상치기․오방(五方)감기․오방풀기․무동놀림․네줄백이 등의 판굿을 놀고, 판굿이 끝난 다음에는 상쇠놀이․징놀이․북놀이․장구놀이․시나위․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을 한다.

 

 

⑵ 버나 : 버나는 쳇바퀴·대접․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하는데, 단순히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성(劇性)이 짙었다. 돌리는 물체에 따라서 대접버나․칼버나․자새버나․쳇바퀴버나 등으로 분류된다.

 

 

⑶ 살판 : 오늘날의 덤블링을 연상케 하는 살판은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자반뒤지기․팔걸음․외팔걸음․외팔곤두․앉은뱅이․팔걸음․수세미트리․앉은뱅이․모말되기․숭어뜀 등의 순서로 논다. 살판쇠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잽이의 장단에 맞춰 정해진 차례대로 곤두질을 치는 것이다. 살판이란 말은 곤두박질을 할 때 불을 가득 담은 화로를 안고 재주를 넘다가 죽는 수도 있어 ‘살판이냐, 죽을판이냐’를 가늠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전한다.

 

 

⑷ 어름 : 어름이란 줄타기를 말하는데, 남사당패의 어름놀이는 초청에 의해 관가나 양반집에 불려 다닌 <광댓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 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연했기 때문에 민중 취향으로 짜였다. 어름산이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줄 위에서 가창(歌唱)하고 잽이의 장단에 맞춰 진행되는 것으로 버나․살판의 경우와 같다.

 

 

⑸ 덧뵈기 : 덧뵈기는 다른 지역 탈놀음에 비해 의식성(儀式性)이나 행사성(行事性)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갈구와 흥취에 영합하였다.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4마당으로 짜여 있는데, 먼저 첫째마당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마당에서 외세(外勢)를 잡고, 셋째마당에서는 내부 모순을 불식하고, 끝마당에서 외래문화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⑹ 덜미  :맨 마지막 순서이며, 한국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남사당패들은 <덜미>라 부르고 있다. 이는 <목덜미를 쥐고> <몽둥이를 쥐고> 놀린다는 장두인형(杖頭人形)을 뜻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지배층의 지배구조와 그 횡포에 대한 저항,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통해 외래종교의 비판, 서민들의 우직한 염원(念願) 등을 희화화(戱畵化)한 것으로 40여 개의 인형과 10여 개의 소도구에 의하여 각기 독립적으로 연관된 2마당 7거리를 놀았다. 2마당 7거리는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 짓고 하는 거리) 등인데, 채록 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참 굿판 한번 후련하다. 한바탕 뛰고 났더니 가슴에 케케묵어 뭉친 덩어리가 시원하게 뚫려버렸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얼마나 신이 나게 뛰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참 그리고 보면 이런 굿판을 잊은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방송을 하면서부터 찾아들어간 굿판. 전국을 다니면서 정말 오랫동안 굿판에서 생활을 했다. 웬만한 굿판은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도 내노라하는 굿판은 빠트리질 않았으니 말이다.

 

흔히 우스갯말로 ‘굿’은 ‘good' 이라고 한다. 좋다는 뜻이다. 그 굿이 좋지가 않았다면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을 존속이 되어 왔을리가 없지 않을까? 혹자는 우리 굿을 종교적으로 박해를 하기도 한다. ’미신‘이나 ’혹세무민‘이라는 것이다.

 

 

일제의 잔재를 이용하는 인간들

 

종교란 각자의 심성대로 가는 것이다.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지 그것은 각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아니라고 해서 폄하하거나 박해를 할 필요는 없다. 알고 보면 우리 굿은 참 많은 시대를 박해를 받았다.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그들이 바로 하늘을 위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위치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의 위치가 이 땅 밖에서 유입된 종교로 인해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했다. 고려 때와 조선조 때는 도성 밖으로 축출되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바로 우리네의 굿이다. 일제 때는 ‘미신’이라는 용어를 써서, 우리 굿을 박해했다. 굿은 일개인의 치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굿도 있고 나라굿도 있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문화말살 정책을 펴면서 수많은 우리 마을의 제당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는 ‘새마을 운동’을 한다고, 많은 마을의 제장들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는 끈끈하게 굿이 자리하고 있다. 굿은 곧 ‘좋은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속풀이 굿, 이것이 정말 굿이다.

 

2012년 3월 28일(수).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에서는 ‘고성주의 봄맞이 진적굿’이 열렸다. 진적이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을 위하는 굿이다. 대개는 1년에 한 번이나 3년에 한 번을 하지만, 고성주는 일 년에 봄, 가을 두 차례씩을 한다. 봄에는 ‘꽃맞이 굿’으로 가을에는 ‘단풍맞이 굿’으로 행한다.

 

 

고성주의 맞이굿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벌써 이 맞이굿은 오래전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송이 되기도 했다.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해온 맞이굿은, 28일 아침 일찍부터 집안에 웃음소리와 음악으로 넘쳐났다. 피리, 대금, 해금의 악기소리와 장고, 징, 바라 등의 타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이 맞이굿의 하이라이트는 텃대감을 놀 때이다. 아마 이런 굿은 전국 어딜 가도 볼 수가 없다. 마당에는 돼지족발과 떡시루, 그리고 막걸리를 한 동이 갖다 놓았다. 그 앞에는 종이를 태워 물에 풀어 놓는다. 검뎅이다. 이 집 텃대감 놀이에서는 모두가 서로 얼굴에 검뎅칠을 한다. 그리고 서로 쳐다보고는 웃어댄다.

 

 

 

수양부리들도 다 대감이 되는 굿판

 

이집의 텃대감을 놀릴 때는 희한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모두가 다 남쾌자 하나씩을 걸치고 나온다. 모두가 다 대감쾌자를 하나씩 입고 있다. 이 집의 맞이굿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녀의 인도에 따라 집을 한 바퀴 돌아서 지하실로 내려간다. 지하실은 평소에 고성주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연습실이다.

 

이 지하 연습실로 들어간 일행들은 온통 난리를 친다. 소리 지르고 춤추고, 징과 바라, 잘고 장단에 맞추어 너 나 할 것 없이 온통 뛰어논다. 과거 우리네 맞이굿인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에서 ‘답지저앙’을 하고 ‘수족상응’을 했다는 것이 바로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뛰고 났는데 어찌 속풀이가 안 되었을까? 전안으로 들어온 일행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다.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 한 마디로 잘 놀았다는 것이다.

 

“올 일 년도 이렇게 시원하게 속풀이를 했으니 잘 될 것 같네요. 그저 굿판에서 이런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굿판에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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