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문화재청 설명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팔공산 기슭에 있는 원흥사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높이 4m의 거대한 석불입상이다. 원래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04년 이 마을에 살던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불상을 만들어 모셨으며, 그 뒤 딸 청신과 손자 김귀수가 현재의 원흥사를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살찐 모습이며 눈과 입이 작은 편이나 코는 큰 편이다.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으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분명하지 않다. 신체는 어깨와 하부의 너비가 같아 둔한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데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무릎 이하는 땅속에 묻혀 있다. 머리 위에 모자가 얹혀져 있었다고 하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 특이하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는 그 시기마다 삶의 척도를 재는 가치관이 다르다. 지난 과거에 삶을 이 시대에 맞추어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기에 어떤 사람이 어느 시기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그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근본이니 뿌리라는 말을 쓴다. 무슨 시시콜콜한 말이냐고도 하겠지만, 그런 것을 지난 삶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는가 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1호인 절열양정씨지려가 있다. 작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전각에 節烈兩丁氏之閭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전각 안에 걸린 두 사람의 여인

 

말 그대로 하자면 두 사람의 정()씨가 굳건한 마음으로 절개를 지킨 것을 기리기 위해 문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누구였으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한 칸의 정려각은 조선조 후기에 세운 전각이다. 주변은 흙을 조금 높게 돋우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좌우로 갈라 두 사람의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절개와 지조를 지킨 두 사람의 여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정씨이기 때문에 양정씨라고 표현을 했다. 이 정려각은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세웠으며, 그 뒤 순조 19년인 1819년에 고쳐 지었다. 단칸 팔작지붕으로 마련한 양정씨 정려는 그저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지난 47, 장수군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양정씨지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작은 전각 하나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에도 눈길을 떼지말아야 하는 문화재 답사에서는, 그런 소소한 것도 확인을 해야만 한다.

 

죽음으로 가문을 지켜내다

 

이 두 사람의 여인은 정황(1412 ~ 1560)의 후손들이다. 정황은 조선 중기 전북 남원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이다. 자는 계회, 호는 유헌, 시호는 충간으로, 부친은 필산감역 정세명이다. 정황의 후손이라는 이 두 여인의 행적은 정려 안에 걸린 현판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안에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현판과, 뒤편에는 행적을 기록한 현판이 보인다.

 

 

한 사람은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봉변을 당하고, 스스로 물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또 한 사람은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음을 택했다.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의 사상이 죽음으로 몰아갔다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 시대적인 배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정려에 써 있는 글귀를 보면 전각 안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절부라 기록을 하였으며, 사옹원 첨정 권백시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좌측에 적힌 것은 열녀라 적었으며, 성균생원 풍천 노세기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뒤편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뒤편에 걸린 편액에 적힌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음이 아쉽다. 다만 한 여인은 절부로 한 여인은 열녀로 기록해 절열지려라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 두 분의 여인들은 그길이 스스로를 지키고, 가문을 지킨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랜 유교적 사고에서 온 행동이라고 일침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여성은 그길이 최선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각 앞에서서 머리를 숙이고, 두 여인의 명복을 잠시 빌어본다. 아픈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동안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어림잡아 150집 정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찾아갈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더 좋은 집들이 남아있어 발길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들어 우리 고택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 고택이 갖고 있는 비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사람들은 흔히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 등의 문이 작다거나, 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딴 곳으로 내었는가 등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고택에는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윤리적인데서 비롯했다고 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소재한 전북민속문화재 제22호인 권희문 가옥을 예로, 한옥의 숨은 비밀을 찾아본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인 권희문 가옥

 

장수 권희문 가옥은 권희문의 선조들이 조선조 영조 49년인 1773년부터 100년 정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상류가옥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서쪽채 등과 나뭇간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권희문 가옥은 넓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권희문 가옥의 안채에서는 상지삼년계축이월이십묘시주사시상량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66년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전라북도 지방의 가옥 중에서는 보기 힘든 자형 집이다. 고패집으로 지어진 권희문 가옥의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부엌의 벽이 보이고, 안방과 윗방을 드렸다. 그 위에 꺾인 부분에는 세 칸 대청과 한 칸 건넌방이 있으며, 대청 한 칸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안채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기 때문이다. 안채의 뒤편에는 대개 후원을 조성한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을 심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앞쪽에는 비워두고, 뒤편으로는 나무를 심어 놓는 이유는 바람의 소통 때문이다.

 

즉 여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앞마당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럴 때 대청 문을 열어 놓으면, 뒤편 숲에 있는 찬바람이 대청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된다. 뜨거운 열기는 위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자연 뒤편에 있는 시원한 바람을 끌어오게 된다. 그러면 집안이 모두 시원하다. 이런 과학적인 논리를 이용한 것이다.

 

 

안채 안방의 뒤에 놓는 쪽마루의 용도도 바로 이런 논리를 이용해,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안채 앞마당에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하면, 겨울에 내린 눈을 말끔히 치울 수 없어 찬 기운이 오래가게 된다. 눈을 말끔히 치우자면 정원 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안채 안방의 작은 방문은 왜일까?

 

안채의 안방 문을 보면 윗방의 방문보다 작다. 그리고 방문의 아래쪽을 나무로 문양을 내어 꾸며놓았다. 이런 형태를 보고 사람들은 어른이 주거하는 안방이기 때문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방문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기후에 따른 대처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람은 겨울 동안에는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남하하여 한파를 몰고 오고, 여름에는 해양의 무더운 공기로 여름 내내 폭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계절의 온도 때문에 방문을 작게 하고 그 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겨울에 찬바람을 가급적 적게 받도록 하고, 방안의 열기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하기에 이렇게 구성이 된 안방의 문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 안방을 두고, 그 위에 대청과 연결되는 윗방을 만드는 것도 기온과 관계가 지어진다. 즉 겨울에는 따듯하게 안방의 실내기온을 보호하고, 여름이면 대청과 연결된 윗방의 문을 열어 바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건한 사랑채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로도 쓰여

 

권희문 가옥의 사랑채는 숭정기원후계사삼월초십일묘시립주미시상량을해오일중수라는 상량문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1773년 세워지고, 1875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랑채는 안채가 세워진 뒤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상량문에 쓰인 중수연대인 1875년은 사랑채를 이건한 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에는 '의왕서'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산 높고 물이 맑은 곳에 곁들인다.’라는 뜻이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과객들의 숙소와 아픈 사람을 지료하는 곳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방의 상류가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지나던 사람들을 묵게 하였던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뒷문이 딴 곳으로 행한 이유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쪽문을 내어 놓거나, 아니면 사랑채 뒤편에 문을 낸다. 이러한 문은 사랑채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깥주인이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낸 문은 바로 안채를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다. 뒤편에 방향이 다른 문을 낸 작은 마루를 놓거나, 아니면 툇마루를 벽으로 막아 사용을 한다.

 

이렇게 사랑채에서 안채를 직접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적 습속 때문이다. 우리 고택은 그저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풍토에 맞게 집을 지었으며, 용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알고 찾아간다면, 좀 더 고택답사의 묘미가 있지 않을까?

장수군 산서면 면소재지에서 721번 지방도를 이용해 남원시 보절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이룡삼거리를 지나 하월리가 나타난다. 하월리에는 우측으로 사계봉을 두고, 좌측 조금 안쪽으로 폐교가 된 구 계월초등학교가 보인다. 이 계월초등학교는 195541일 개교를 하여, 1995228일 폐교가 되었다. 그동안 계월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수는 1,608명이라고 한다.

 

이 계월초등학교 터에는 지금당(知今堂)’이라고 부르는 서당 터에 다섯 칸의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옆에는 수령 460년의 보호수로 지정 된 은행나무가 서 있어, 이곳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아마도 지금당이 문을 열 때 심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시기적으로 연륜이 같기 때문이다. 지금당은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과거급제의 산실인 지금당

 

지금당은 조선 선조 35년인 1602년에 정유헌 선생을 비롯하여, 활계 이대유, 만헌 정염 등이 서당을 설립하여 유생들을 지도한 곳이다. 이 서당에는 인근의 학동들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많은 학동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였단다. 이 서당에서 학습을 연마한 학동들은 대과에 15, 소과에는 40여명이나 과거에 급제를 시켰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지금당은 1955년 계월초등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지금당이 처음에는 교실로 사용이 되었다. 그 뒤 도서관과 문화관으로 활용을 하였으며, 계월초등학교가 폐교가 된 후에, 장수군의 향토자료로 지정이 되었다. 지금도 과거급제를 한 유생들의 후예들인 창원 정씨, 삭녕 최씨, 제주 양씨, 김해 김씨, 경주 이씨들이 지금당계를 이어오면서 많은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다섯 칸의 협소한 건물에서 많은 인재가

 

토요일. 주말이라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 장수군으로 출발을 하였다. 지난 번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을 답사하고 난 후, 몇 군데 보아둔 곳이 있어서이다. 수많은 지자체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고 다녔지만, 장수군처럼 문화재 안내판을 잘 설치를 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와 같이 문화재 답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고마울 정도로 안내판이 잘 되어있다.

 

산서면에 있는 창원정씨 종가를 둘러본 후, 종가를 안내해주신 마을 어르신이 지금당을 둘러보라고 권하신다. 인근에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지금당은 계월초등학교 건물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지붕은 요즈음 유행하는 기와와 같은 플라스틱 구조물로 올려놓아, 조금은 옛 모습을 잃기는 했지만 그 속내야 어디로 갈까?

 

 

정면 다섯 칸에 측면 한 칸 반 정도로 지어진 지금당이다. 주변은 쇠줄로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반 칸을 툇마루로 놓고, 그 뒤편에는 선생의 휴식공간인 듯하다. 유리가 몇 장 깨어져 조금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다.

 

마루를 놓은 소탈한 교실

 

네 칸으로 된 교실은 마루를 놓았다. 좌우로 창을 내어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아마도 이 창을 통해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꿈을 키웠을 것이다. 벽에는 세 점의 편액이 걸려있다. 벽에 걸린 편액 중 남전유약(藍田遺約)’이라는 말은 아마도 후세에게 학업성취의 뜻을 지켜 전하라는 것인 듯하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한 많은 사람들. 그 중에는 얼마나 많은 큰 인물들이 있었던 것일까? 장수군의 곳곳을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이, 그런 숱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당.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 낸 명당이다. 이러한 깊은 뜻이 있는 곳에서,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체 옛 서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억하려 애를 쓴다.


장수군의 산서면은 태백정간 중 소백산맥의 일맥이 무룡궁재에서 시작하여, 장안령봉을 병풍처럼 펼쳐 놓고 있다. 다시 서쪽으로 뻗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수분치를 이룬 뒤, 줄곧 서쪽으로 뻗어내려 성적산을 이룬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노령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은 양 줄기가, 마치 암탉이 양 날개로 알을 품은 듯한 분지가 있어, 옛 부터 명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 산서면의 오산에서 임실군 성수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침재로 가다가 보면 마을이 나타난다. 초장마을이라고 하는 이 마을은 산서면 오산리의 안마을로 입구 길가 양편에 두 개의 돌탑이 서 있다. 마을을 바라보면서 우측에 있는 탑은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고, 좌측 소나무 아래에 장승 곁에 있는 탑은 할머니 탑인 여탑이다. 탑 위에 뾰족한 돌을 세워 놓은 것이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다. 맨 위에 돌은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권이종이 태어 난 초장마을

오산리 초장마을은 교육자학인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권이종 박사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독일에 파견한 광부 2기에 지원을 했다. 소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준 가족에게 보답하고자, 연장 근무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를 한 권이종 박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을 앞 석비에는 ‘초장마을’ 이란 글씨 밑에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써 놓았다. 권이종 박사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귀국하여 전북대 교수가 됐고, 1985년부터 한국교원대에 재직하다 2006년 정년퇴직했다.


권이종박사가 태어난 초장마을 석비(위). 위에 뾰족한 돌을 새긴 것이 바로 할아버지 탑이다.
   
길가 양편에 있는 누석탑은 오랜 흔적이

초장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초중반사형’이라고 한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곳이다. 이는 풀숲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초장마을’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 마을 인근에는 고인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로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원주이씨와 상산이씨가 들어와 살다가 상산이씨는 모두 이주를 해버리고, 현재 원주이씨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안동권씨들이 마을에 이주를 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누석탑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인 ‘만취정’ 앞에서 만난 어르신은 “저 탑은 우리 어릴 적에도 있었는데 오래된 것인지만 알지, 언제 적부터 있었는지는 몰라” 라는 대답이시다. 첫눈에 보기에도 남탑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탑은 아마 최근에 새롭게 쌓아 올린 듯하다.

마을 공동체를 창출하는 돌탑

돌로 탑을 쌓아 마을 어귀에 놓는 탑은 누석탑, 혹은 할아버지·할머니 탑이라고 부른다. 누석탑이란 돌을 쌓아올려 봉분처럼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 탑은 강원도 일대서부터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가면서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으로 쌓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돌탑 앞에서는 정월 초에 길일을 택해 마을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대보름에 제를 올리기도 한다. 대개는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을 뽑아 제를 올리게 한다. 이 돌탑은 원시형의 신앙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을 쌓을 때는 시멘트 등은 섞지 않으며, 단순히 돌만 갖고 위로 올라 갈수록 뾰족하게 쌓아올린다.

명당이기에 명사가 배출된다는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마을. 산림청과 유한킴벌리가 주관한 녹색마을 찾기에서 선택이 된 것도 다 돌탑 덕분이라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돌탑이 있는 한 마을에는 어떠한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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