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번지에 소재한 실상사. 지리산 청왕봉을 마주하고 있는 실상사는 신라 말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에 절을 세울 때 그 중 한 곳이다. 실상사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숙종 때 전각 36동을 새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다시 불탄 것을 일부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높인 절이다. 경내에는 부속암자인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픔격을 말해준다.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37호인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이 동 서 탑은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다.

 

문화재의 보고 실상사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홍척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곳 실상사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국보 제10인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제33호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제34호인 탑비도 자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보물 제35호인 실상사 석등과 제36호인 부도,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 응료탑과 제39호인 탑비,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제41호인 철조여래좌상, 보물 제420호인 청동은입사향로와 제421호인 약수암 목조탱화,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인 석장승 등 그야말로 문화재의 보고라 아니할 수 없다.

 

실상사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면, 천왕봉을 중심으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반선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 속세의 모든 번뇌를 씻어줄 것만 같은 절집이다. 넓지 않은 경내를 돌아보면, 곳곳에 남아있는 선조들의 예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상륜부가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석탑

 

실상사의 동, 서 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우주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탱주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신라시대의 탑 중에서도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고 있는 탑이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말 실상사를 처음 창건할 때 함께 조성한 탑으로 보인다. 높이 5.4m의 이 동서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쌍탑 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아름다운 탑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진다. 벌써 120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자리에서 오롯이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았을 실상사 동서탑. 그 탑이 있어 실상사가 그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12월 11일 답사 첫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남원을 출발하여 인월을 거쳐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실상사로 가다가 보면 일성콘도 입구 못 미쳐, 냇가 옆에 정자가 서 있다. ‘퇴수정(退修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525에 소재한 퇴수정의 앞으로는 만수천의 맑은 물이 흐른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5호인 퇴수정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이다. 박치기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나 수양을 하기 위한 정자라는 뜻으로, ‘퇴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정자는 단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아한 모습 그대로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다.


1870년 박치기가 심신 단련을 위헤 세웠다는 퇴수정.
 
사각형 주추를 놓은 정자

퇴수정은 만난 처음부터 마음에 든 정자이기도 하다. 정자를 찾아 내려가는 길에는 ‘개인소유의 땅이니 출입을 금지한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러니 어찌하랴, 길을 돌아 냇가로 내려가는 수밖에. 앞으로는 암석을 타고 넘으며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몇 그루의 노송이 가지를 내리고 있다.

12월 초겨울에도 이렇게 운치가 있는 곳이라면, 한 여름 이곳을 찾았다면 아마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만 같다. 장대석 기단을 쌓고 한편으로 정자로 오르는 계단도, 장대석 돌로 놓은 것도 특이하다. 정자 가까이 가서보니 주춧돌이 모두 사각형이다. 이런 것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여서 지은 정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장대석 돌로 계단을 놓고, 네모난 주추를 사용했다.

돌계단을 밟고 정자에 오르니, 측면과 뒤편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둘러있고, 만수천을 흐르는 물은 소리가 맑기만 하다. 정자는 누마루를 깔고 중앙 뒤편으로 판자로 두른 방을 한 칸 마련하였다. 원래 문이 없었는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절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슴 가득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자 앞을 가로지른 노송의 가지는 금방이라도 냇물로 들어설 것만 같다.


정자 앞을 흐르는 만수천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수많은 편액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정자에는 여기저기 벽면마다 수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어느 정자를 가보아도 이렇게 많은 편액이 걸린 곳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만큼 퇴수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이 12월의 초겨울. 글이라도 좀 쓸 줄을 알았다면, 나라도 한 두 어자 적고 가지 않았을까?

정자 안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찬바람이 옷깃 안으로 파고들지만, 그 바람이 대수랴. 이렇게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는 정자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다본다. 저 맑은 물에 세상에 찌든 마음을 훌훌 털어내어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누마루를 깔고 뒤편에 판자방을 들였다. 수많은 편액들이 벽에 걸려있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이럴 때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저 이곳에 몇 시간이고 서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적시고 싶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하지만 내년 꽃피는 시절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가는 발길을 붙잡는 여울진 곳으로 흘러드는 물소리가, 유난히 높게만 들린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청아한 젓대의 소리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창건된 남원 실상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불상 역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처음으로 실상사를 짓고 난 뒤 모셔졌다는 철조여래좌상. 당시 선종사찰에서는 직접 철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높이 2.69m의 이 철불은 그 중 가장 오래된 철불이다. 현재는 전각을 새로 짓느라 임시 전각에 모셔놓았다. 보물 제41호인 이 철조여래좌상은,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고수머리로 조성해 놓았다. 머리의 중앙인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보물 제41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균형 잡힌 몸매가 당시 철불의 조형미를 알게 해

이 찰조여래좌상의 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지만, 석불처럼 길게 늘어지지는 않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으나, 목이 짧아 조금은 답답한 모습이다. 이렇게 목이 짧게 표현된 것이 철조여래좌상의 흠이다. 이마와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이나, 굳게 다문 입 등의 묘사가 뛰어나지만, 짧은 목으로 인해 근엄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이전의 모습은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비해, 통일신라 후기의 실상사 철불은 조금은 딱딱하게 표현이 되었다. 양 어깨에 갈친 법의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육중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철불이란 특성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틀을 만들어 조형을 해야 하는 철제조형물이라 조형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손과 발을 새로 제작해

철불의 어깨선은 부드럽고 가슴도 적당하게 처리되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 주름은 가슴 밑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한편으로 치우치면서 U자 형으로 주름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당시 철불의 조형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무릎아래는 새로 복원을 한 것이다. 발은 모두 발바닥이 위로 보이게 가부좌를 하고 않았으며,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대로 복원을 한 것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에서, 조금은 느슨해진 9세기의 불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조형된 것으로 의미를 있다고 하겠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 실상사 동종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 동종

실상사 경내에는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가 있다. 높이 123㎝, 입 지름 83㎝의 동종으로 현재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이다. 이 동종은 조선조 숙종 20년인 1694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실상사 보광전 안에 자리한다. 이 동종은 머리 부분인 용뉴에는 용이 발톱을 세워 종을 붙잡고 있는 형상이 있으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간략화 되어 용의 꼬리를 감은 모습이다.

종의 어깨선을 따라가면서 유곽을 새겼으며, 몸통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이란 글을 새겨 넣었다. 네 개의 유곽에는 각각 꽃무늬를 세 줄씩 아홉 개를 새겨 넣었다. 유곽 사이에는 꽃가지를 손에 든 보살입상을 새겨 넣어, 조선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동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용뉴와 몸통에 새겨진 보살입상

몸통 위쪽에는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흔히 동종에서 나타나는 넝쿨을 둘러쌓은 문양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아마 이런 형태의 모습은 조선조 후기로 넘어가면서, 범종의 구성이 많이 간략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몸통 중간에 새겨진 비천인상을 보아도, 이전의 동종에서 보이는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종에 새겨진 비천상 등이 딱딱한 느낌을 준다.

실상사에 있는 두 점의 철제문화재. 그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조나 소조에 비해 흔하지 않은 철조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실상사이기에, 몇 번을 찾아갔어도 또 둘러볼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소재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처음으로 창건을 한 절이다.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실상사는, 이미 그 역사가 1,200년 가까이 된 고찰이다. 실상사는 홍척스님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실상사에는 옛 실상산문답게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보물 제35호인 석등은 실상사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등으로 장명등이라고도 부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화사석을 받치는 받침돌, 그리고 화사석을 덮는 지붕돌로 구분을 한다. 그런데 이 실상사 석등은 팔각기둥의 전형적인 간주석과는 달리, 장구의 형태인 고복형 간주석을 지닌 석등이다.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

받침돌의 고복형 간주석, 석조미가 일품

실상사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 밑으로 3단의 받침을 쌓고 있다. 받침부분은 모두 3단으로 구성을 했는데, 아래받침돌과 위덮개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아래받침돌과 위덮개돌의 귀퉁이에 조각한 귀꽃이 색다른 석등이다. 지대석은 밑에 팔각의 넓은 돌을 놓고 그 위에 안상을 새긴 팔각의 돌을 올려놓았다.

지대석 위에는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귀꽃 위로는 두 장의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다. 중간 받침돌은 일반적인 팔각형이 아닌, 장고통과 같은 형태로 둥글게 조각한 간주석을 놓아 특이하다. 간주석에도 띠를 둘러 앙련을 조각하였으며, 위에 연결된 조각은 흡사 네 잎 크로버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어 색다른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장구통처럼 생긴 간주석과(위) 기단부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에도 두 장의 커다란 앙련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 큰 규모로 조형이 되어, 석조계단을 조성해 놓고, 그 위로 올라가 불을 붙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집혀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아름답게 조형이 되었다.

화사석과 머릿돌도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어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화사석의 창을 보면 한 면은 크고, 남은 면은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불을 붙이는 창을 크게 낸 듯하다. 창 하나를 내면서도 조금 더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듯하다. 화사석 위의 덮개석인 지붕돌은 날렵하게 경사가 졌는데, 팔각면의 끝에도 귀꽃이 자리하고 있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실상사 석등의 간주석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형태로 팔작지붕의 날렵함을 지녔다. 그리고 돌출된 꽃모양인 귀꽃을 조각하여 멋을 더했다. 덮개석 위에 얹은 머리장식은 화려한 무늬를 새겼으며, 이 머리장식에도 화려한 무늬와 함께 귀꽃을 조각해 붙였다. 실상사 석등은 받침돌, 덮개석, 머리장식이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모두 귀꽃을 놓아 뛰어난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사대의 뛰어난 석조미술품

이러한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형태이다. 실상사 석등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다양한 석조물 조형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원형 그대로를 거의 보존하고 있는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 벌써 천년 세월을 서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화사석과 귀꽃(가운데) 그리고 머리장식

아마 실상사 일원이 사적 제209호(백장암과 약수암을 포함)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뿌리는 비에 몸을 적셔가면서도 답사를 그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 때문이다. 실상사 답사를 하면서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 전통문화가 우리를 살찌울 수 있는 자본’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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