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마을에 망나니가 있으면 사람들이 관청에 끌고 가는 대신, 멍석에 말아놓고 뭇매를 가하던 ‘사형(私刑)’이 있었다. 이를 흔히 ‘멍석말이’라고 한다.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이를 두고 '덕석마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멍석을 덕석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멍석말이는 멍석으로 감은 사람을 때리는 형벌로 주민들에 의해 행해진다.

멍석말이는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가 있으면, 문중이나 동네의 회의를 거친 뒤 어른 앞에 끌고 간다. 그리고는 멍석을 펴서 눕히고 둘둘 말거나 뒤집어놓고, 온 집안 식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뭇매를 가해 버릇을 고쳐주는 습속이다.


합천에 멍석말이 터가 남아있다.

이 멍석말이는 관청에 신고하는 대신 이 같은 방법을 썼으므로, 오히려 문중의 형벌이나 ‘동리법(洞里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으며, 마을의 사회규범을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사용을 했다.

8월 20일(토), 오전 근무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합천으로 들어서 영암사지를 찾아가는 길에,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은 듯하다. 차가 하염없이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이런 경우 조바심이 난다. 비가내리는 날은 오후 5시를 넘으면 답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산길로 들어서 가는데, 길 좌측 편에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곁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축대가 쌓여 있는 것 같다. 안내판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어 가까이 가보니, ‘선도대(善導臺)’라는 곳이다. 직사각형으로 네모나게 돌을 쌓고 위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다.

멍석으로 둘둘말아 이 네모난 단 위에 올려놓고 매를 친 듯하다.

‘선도대’가 도대체 무엇일까? 말대로라면 사람을 선도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사람을 훈계한다니, 왜 이곳에서 했을까? 선도를 어떻게 한 것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 바로 이곳이 멍석말이를 행하는 곳이란 설명이다.

‘물산(勿山)마을 관이’인 멍석말이는 누구에게 가했을까?

옛 마을 규약인 향약에 이르기를 마을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벌을 주게 하였는데, 모두 8가지의 죄목을 나열해 규범을 삼았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一曰 불효지형이오(효를 행하지 않은 불효자를 벌하다)
二曰 불목지형이오(친척 간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三曰 불인지형이오(남녀사이(부부를 말하는 듯)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四曰 불제지형이오(윗사람에 대해 공경하지 않음을 벌하다)
五曰 불임지형이오(책무와 소임을 다하지 못함을 벌하다)
六曰 불휼지형이오(불쌍한 사람을 돌보지 않음을 벌하다)
七曰 조언지형이오(거짓말을 하는 자를 벌하다)
八曰 란민지형이라(주민을 괴롭히는 자를 벌하다)




이렇게 여덟 가지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이곳 선도대에서 멍석말이를 하고 죄를 고지하여 부끄럽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이 선도대의 멍석말이의 조건을 읽어보다가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이 멍석말이가 지금 가장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말로만 듣던 멍석말이. 이런 사람이 정말로 멍석말이를 당해야 할 사람들은 아닌지.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데도 책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
백성에게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
혼자만 잘 살겠다고 밑에 사람을 마구 부리는 사람.
국민이 내는 세금을 마구 사용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데 반대하는 사람.
그 반대하는 사람에게 동조하여 같이 떠벌리는 사람,
자연을 마음대로 휘저어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
그리고 마음 같으면 문화를 업신여기는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싶다.

새벽 5시, 짜장스님인 운천스님이 문을 두드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감자를 캔 밭으로 '이삭줍기'를 하러 가자는 것이다. 요즈음은 농촌분들도 이삭줍기를 별로 안하신단다. 그만큼 노동력이 딸리 거기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딴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5시 10분 정도에 길을 떠났다. 요천가에는 벌써 건강을 위해 아침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부지런히 걷고 있다. 30분 정도를 달려 찾아간 감자밭. 물론 감자를 다 캐고 난 후이다. '이삭줍기'란  농작물을 거두고 난 뒤, 땅에 떨어진 곡식의 낱알이나 열매 등을 줍는 것을 말한다.

조금이라도 아껴보아야죠

감자를 캐고 난 밭에 가서 이삭줍기를 하고 있다.

이삭줍기를 한다고 해서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 두 시간 정도 땀을 흘리고 나면, 꽤 많은 양의 감자를 걷울 수가 있다. 이밭 저밭을 다녀보지만 벌써 누군가 한 번 훑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이 저 넘어로 가면 어제 감자를 캤기때문에 더 많이 이삭을 주울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나라도 더 걷어올 욕심에 길도 제대로 없는 산길을 올랐다. 그런데 이건 쪼 무슨 일인가? 모두 딴 농작물을 심기 위해 로터리를 쳐 버렸다. 감자는 다 조갸지고 으깨져 있다. 다시 돌아나와 처음에 들렸던 곳으로 간다. 사람들은 왠 스님일행이 이 이른 아침에 이삭줍기를 하느냐고 궁금해 한다.

'스님짜장'에 들어갈 것 정성이 깃들어야

오늘(7월 24일, 일요일) 아침 5시에 길을 나서 이삭줍기를 한 감자다. 큰 것들도 있어 즐거운 마음이다.

소외되고 힘든 이웃들을 위해 만들어 주는 '스님자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감자이다. 그 감자를 일일이 돈을 주고 사야만 한다. 이렇게 이삭줍기를 하면 다만 얼마라도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의 노동으로 얼만큼이라도 쓸 수가 있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그저 몸으로만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마음으로 위해야 정말 아름다운 봉사라는 생각이다. 피곤한 몸과 졸린 눈으로 아침부터 땀을 흘렸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의 이삭을 주울 수가 있었다. 그것을 손질하면서도 더 많이 캐오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아마도 이 이삭줍기를 한 감자를 이용한 스님자장은 그 맛이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제 새벽에 길을 나서 캐온 감자이다. 꽤 많은 양이다. 이틀동안 새벽 잠을 포기하고 다녀온 결과물이다. 두어가마는 됨직하다. 

그래도 이렇게 이틀동안 이삭줍기를 하면서 나름 생각을 해본다. 첫 번째는 직접 밭에가서 이삭줍기를 한 감자를 이용해 음식을 만들었으니,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피땀 흘려 지은 농작물을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가지가 다 고마움이다. 시쳇말로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따듯한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주) 이 사진은 아이폰으로 촬영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길, 봉암사 ‘마애불 참배길’

세상에는 아름다운 길이 참 많다. 요즈음에는 각 지자체마다 길을 개발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도의 ‘올레길’처럼 많은 길들이, 이미 주말이 되면 전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기위해 주로 길을 걸어야만 하는 나로서는 다양한 모습의 길을 만나게 된다.


7월 6일 찾아간 문경 봉암사.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봉암사를, 대중공양을 하기 위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계곡을 끼고 따라가면 봉암사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천천히 걸어서 왕복 50~60분 정도의 힘들지 않는 평지길이다. 그런데 그 길을 접어들면서 첫 마디가 감탄이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길이 있었다니.

흙을 밟는 즐거움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계곡에 걸린 침류교를 건너자, 좁은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마애불 참배길’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천천히 숲길로 접어들어 본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물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져, 자연의 오케스트라와 같다. 이런 자연의 소리를 어느 누가 따라할 수가 있을까?



좁은 길을 걷다가 보니 여기저기 바위들이 널려있다. 길에는 나무뿌리가 땅위로 솟아나와 마치 문양을 만들어 놓은 듯하다. 그 길 위에 작은 물줄기가 지나고 있다. 저편에서 무엇인가 ‘스르륵’ 소리가 난다. 산중의 주인인 듯한 뱀 한 마리가 꼬리를 끌며, 풀 숲 사이로 사라진다. 이 길은 짐승들의 나들이 길이기도 하다. 자연의 흙을 밟는 즐거움,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부드러움이다.



자연, 정말로 자연이 거기 있었다.

좁은 길을 따라 심호흡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바위 위에 떡하니 올라앉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참으로 오묘한 자연의 조화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다가 보니, 이번에는 아예 바위를 뿌리가 감싸고 있다. 그 모습이 기이하기만 하다. 외국에서는 이런 모습들을 많이들 찍어 올리기도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있는 바위와 소나무는 또 다른 운치가 있다.




그 앞에서 한참이나 길을 멈춘다. 어찌 자연이 아니랄까 보아, 이런 모습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자연스런, 그리고 자연 속의 또 다른 자연처럼 그렇게 서 있다. 바위가 양편에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그곳이 길이다. 물길은 어디로 비켜가지를 않았다. 그냥 사람이 다니는 길로 물도 다니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한 길을 이용할 수 있는 산길, 바로 봉암사 마애불 참배길이다.

나무가 날더러 겸손하라 하네.




좁은 산길을 걷다가 보니, 휘어져 쓰러진 나뭇가지가 길을 가로질렀다. 아마도 나무가 이렇게 길을 가로질러 있는 것을 보니, 세상의 방자함을 모두 걷어내고 겸손히 고개를 숙이라는 뜻인가 보다. 잠시 그곳에 멈춰 그동안 살아오면서 시건방을 떤 일들을 잠시 반성을 한다. 고개를 숙여 나무 밑을 지나고 보니, 커다란 바위가 서 있다. 그 밑으로 사람 한 두 명은 충분히 들어가 비를 피할만한 공간이 있다.

자연은 언제나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런 자연의 마음을 정녕 이해 못할 것이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그저 이런 자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있으니. 그러다가 결국 봉변을 당하는 것은 인간인데도 말이다.



25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충분한 시간이다. 바위 사이를 지나니, 거기 백운대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이 길의 끝이다. 돌아오는 길은 또 다른 풍광을 만날 수가 있다. 태고적 신비가 그대로 배어있는 봉암사 마애불 참배길. 아마도 이 길의 주인은 뭇 짐승들일 것이다. 사람의 인적이 끊긴지 오래이니. 아마도 이길은 앞으로도 이렇게 자연과 짐승이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을 것이다.

7월 6일, 일 년에 한 번 밖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봉암사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내가 달려간 곳은, 봉암사 마애여래좌상을 찾아 친견을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경내를 돌기도 바쁘다고 하지만, 이런 기회에 마애여래좌상을 보지 못하면 언제 또 볼 수 있겠는가. 카메라를 메고 그저 뛰다시피 달렸다.

좁은 산길, 그러나 높이 오르지를 않고 내내 평탄한 길이다. 구불거리는 길을 한 15분 정도 달렸을까? 커다란 바위틈을 지나니 넓은 암반 위로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밑으로는 맑다 못해 푸른 물이 고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동북을 향한 커다란 바위에 마애보살좌상이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 암반 위를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다.



백운대에 반한 마애보살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산 51 - 1번지. 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을 ‘백운대’라고 부른단다. 이 곳 백운대의 주인인 마애보살좌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계곡물이 흐르는 동북쪽을 향해 높이 4m, 폭4.4m의 정도의 큰 바위 면에 조각을 한 마애보살좌상.

주변의 바위들, 그리고 늘어질 대로 늘어진 소나무, 앞으로 흐르는 맑은 물. 마애보살좌상의 주변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마애보살좌상은 머리 부분 주위를 약간 깊게 파, 감실처럼 조성을 하였다. 그리고 그 안으로 파 들어간 후 광배를 겸하는 동시에,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조각하였다.




머리 부분에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앉은 상태나 하체는, 거의 선각으로 얇게 처리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위로만 치중한 듯하다. 보관의 중앙에는 화문이 있고, 미간에는 백호가 뚜렷하다. 이마에 백호는 커다란 색깔이 있는 돌이 박혀 있는데, 이는 후에 끼운 것으로 보인다. 반월형 눈썹 아래에는 반안을 하고 있다.

자비로운 모습에 무릎을 꿇다

코는 끝이 약간 손상된 것을 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옥에 티 같은 느낌이다. 입은 아주 얇고 작게 조각을 해 전체적인 모습에 조금은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둥근 얼굴에 어깨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긴 귀. 마치 주걱턱과 같은 좁은 하관. 삼도가 뚜렷한 목. 그저 인자한 부처님 한 분이 백운대에 경치에 빠져 세상으로 나오시기가 싫은 듯하다.




법의는 통견인데 선각으로 처리되었으며, 군의에는 띠 매듭이 뚜렷하다. 옷 주름선은 전체적으로 유려하게 표현을 하였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마애불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가슴에 얹어 두 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으며, 손 밑에 드러난 발은 두 손과 더불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결가부좌를 한 모습은 하체를 처리하면서 무릎사이를 넓게 하여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밑에는 연화좌가 선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저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이 생기지가 앉는다. 바위에 털썩 무릎을 꿇는다. 목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살님, 이제 세상으로 나가시지 않으렵니까?

이 마애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곳 봉암사 백운대에서 조성시기를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꿇은 무릎이 아파오지만 일어날 수가 없다. 언제까지라도 이곳에 앉아 마애보살좌상과 한 세상을 더불어 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커다란 바위면에 조성을 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이 풍진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정화시키고 싶지가 않으신 것일까? 오랜 시간 이곳 백운대의 주인이 되어, 시끄러운 세상을 참견하고 싶지 않으신 모습이다. 입가에 띤 잔잔한 미소에서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전북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산130-1에 소재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4호 ‘석산리마애여래좌상(石山里磨崖如來坐像)’ 이 마애불은 이번이 두 번째 답사이다. 첫 번째는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일몰 시간이 다 되어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이 마애불은 적성면의 선돌마을을 지나, 도왕마을 쪽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번에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와서인가, 늘 마음에 미련이 남아있던 곳이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이곳을 택해 답사 길을 잡았다. 6월 18일 아침부터 땀이 흐른다. 오늘도 어지간히 날이 찔 모양이다. 마애불이 500m 전방에 있다는 곳부터 걸어야 한다. 마애불로 인해 500m의 아픔이 있는 나이다. 예전에 500m 산 중턱에 마애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올랐다가 곤욕을 치룬 기억이 나서이다.


산길을 접어드니 마음만 바빠 오고

마애불은 대개가 깊은 산중에 있다. 요즈음은 교통이 좋아 차가 들어가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아직 마애불은 걸어 올라야 하는 곳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석산리마애여래좌상도 산을 걸어 올라야 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산이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숲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가끔은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의 땀을 식혀주기도 한다.

아무리 숲길이라고 해도 30도를 넘는 기온이라고 한다. 조금 오르다가 보니 목이 탄다. 그런데 물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참고 오르는 수밖에. 누군가 나무계단을 놓았다. 고마운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오르다보니, 불과 얼마 오르지 않아 나무계단이 끝이 난다. 그리고 가파른 암벽 위로 길이 나 있다. 쌓인 낙엽에 미끄러져 한 발만 실수를 해도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질 듯하다.



조심조심 바위를 지나고 보니 좌측으로 누군가 이곳에 집이라도 지으려고 했는지 돌 축대가 보인다.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산죽이 자라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산모기는 땀 냄새를 맡았는지 어지간히 달라붙는다. 산죽덤불을 헤치고 조금 올라가니 바위가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불

바위는 약 2.5m 정도가 되는 듯하다. 몇 덩이로 나뉜 바위를 바라보니 좌측에 마애불을 새겨놓았다. 마애불은 오른쪽 대좌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수직으로 선 평평한 바위면에 두광과 신광, 불신, 대좌 등을 얕은 부조로 조각하였다. 커다란 바위가 머리 위를 덮고 있어, 그 오랜 시간을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온전히 남아 있었나보다.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항마촉지인을 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좌상이다.



석산리 마애불의 머리 부분은 마치 두터운 모자를 쓴 듯 투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민머리에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를 묘사하였다. 얼굴은 큼지막하게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눈은 마모되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큼직한 코와 두툼한 입술 등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입술은 가장자리는 쳐지게 표현하였으며, 입술과 이마 선을 따라 붉은색의 칠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왜 채색을 한 것일까?

삼도는 목이 짧아 몸의 상단에 걸쳐지게 표현되었으며, 몸은 얼굴에 비하여 유난히 작게 표현하였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깨가 좁고 위축되어 있는 편이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왼쪽 어깨에 대의 자락을 걸친 우견편단식 옷차림이다. 법의 자락은 배 부근에서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로 가는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연화대좌는 오른쪽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광배는 배 모양의 신광 안에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광배의 여백을 따라 당초무늬를 선각하였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두 번째 찾아가 만난 순창 석산리마애여래좌상. 얕은 부조기법과 토속화된 얼굴 표현, 그리고 평행밀집형의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그런가,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의 불신에는 채색을 하였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고려시대 불상 조성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마애불을 조성하고 채색까지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합장을 하고 마음속에 간직한 서원을 말한다. 입술에 붉은 칠을 한 마애불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움직이는 듯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시원한 산바람이 산죽 잎을 흔들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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