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산195-1 번지에 소재한 쌍봉사. 쌍봉사에서 좌측으로 산길을 조금 오르면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이 철감선사탑은 철감선사의 부도탑이다. 부도란 옛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을 말한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당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신라 문성왕 9년인 847년에는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다. 경문왕대 때에 이 곳 화순의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 절을 지었는데, 절 이름을 그의 호인 ‘쌍봉’을 따서 ‘쌍봉사’라고 이름 하였다. 경문왕 8년인 868년에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경문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국보 제57호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조각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뛰어난 조각술이 돋보이는 철감선사탑

8월 21일에 쌍봉사를 찾았으니,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화순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찾아간 쌍봉사. 쌍봉사는 고찰답게 많은 문화재들이 경내에 소재한다. 철감선사탑이 있다는 곳으로 오른다. 주변을 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탑 옆에는, 보물 제170호인 비문이 사라진 탑비도 함께 있다. 담이 터진 입구 쪽으로는 탑이 서 있고, 그 안쪽에 탑비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때의 일반적인 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탑은 전체적으로 모두 남아있으나, 아쉬운 것은 꼭대기의 상륜부인 머리장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철감선사탑은 기단이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단부의 장식이 화려한데 그 중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화려하다.





하층기단인 밑돌은 2단으로 조성했는데 8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이 사자들은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탑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의 아래는 조금 넓게 조성을 해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마치 사자들이 구름위에 앉은 모습을 표현하였다.

조각한 장인의 염원이 담긴 탑

상층의 윗돌 역시 2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아래에는 커다란 앙화를 조각해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몸돌에는 사천왕상과 함께 비천상까지 돋을새감으로 조각하였다(위) 천상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몸돌의 조각은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해, 철감선사탑은 비천상까지 함께 새겨져 더욱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감선사탑을 조성한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쯤으로 추정된다. 상륜부가 사라져 아쉽기는 하지만, 조각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장인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작품이다. 아마도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은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비천인이나 가릉빈가들이 살고 있다는 극락을 염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8마리의 사자들은 각각 자세를 달리해 앞을 주시하고 있다. 탑을 지키기 위한 것일까?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철감선사탑. 그곳을 떠나기 아쉬운 것은 언제 또 다시 이런 아름다운 탑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다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만복사는 김시습의 단편소설인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만복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사지가 잘 정리가 되어있어, 기분 좋게 돌아보고는 했다.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될 때까지,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 식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경내에는 네 점의 보물(당간지주, 석불입상, 오층석탑, 불상대좌)과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적 만복사지. 우측에 석인상이 서 있다.

새로 선보인 석인상 일기

이번 답사 때 찾아간 만복사지(2010, 9, 18). 그런데 입구 쪽을 보니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석조물 1기가 서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남쪽 4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훼손의 우려가 있는 1기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 석인상은 처음 본 것이다. 두 번이나 이곳을 답사를 했으면서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4점의 보물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바람에 놓친 것 같다. 그런데 이 석인상을 보는 순간, 참으로 자신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가 이런 형태의 석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흡사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조각한 목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석인상

이 석인상은 그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부정형의 사각형 장초석의 3면에 조각을 하였는데, 사람 모양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노여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팔은 몸에 붙인 채로 구부려 무엇인가를 꽉 잡고 있는 형태다. 팔에는 두터운 팔과 근육을 표현 한 듯한 선이 나 있다. 주변을 돌면서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자연석인 돌을 이용을 하느라 그랬는지, 팔과 기타 신체의 부분이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다.

얼굴은 눈을 돌출시킨 것이 민속 석조물에서 보이는 석장승의 형태를 닮았다. 눈썹은 두텁게 처리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볼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뭉툭하다. 석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인상은 상반신이 반나로 서 있다. 허리부분에 옷을 묶어 매듭을 내었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다.


팔의 조각한 형태는 괴이하다. 한 팔은 뒤로 돌아갔다.

하반신은 특별한 조각이 없으며, 늘어트린 옷 주름으로 가렸다. 전체 길이는 550cm이며,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는 370cm 정도이다, 나머지 부분은 뾰족하게 깎았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도대체 이 석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석인상을 찬찬히 훑어보지만 금방 그 용도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뒷면에 있는 구멍이 용도를 알리는 열쇠?

이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복사지 석인상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둥근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다. 위쪽의 구멍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122cm, 그리고 그 밑에 구멍은 318m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땅 위로 솟아있는 석인상의 높이가 370cm 정도이니, 아래 구멍은 땅에서 52cm 정도 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구멍은 248cm 정도 위에 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혹 이 뒤편에 있는 구멍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간이나 석인상의 높이가 있어 그 정확한 구멍의 차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림잡아 구멍의 높이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당간의 용도로 쓰였을까? 아니면 당간의 바깥에 세워 더 많은 당을 걸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그 이상의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절의 입구에 서서 액을 막아내는 사천왕은 혹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의 신성한 장소의 양편에 세워, 뒤에 난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던 문지기는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생각해보지만, 그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 체 만복사지를 뒤로한다. 저 석인상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날까지, 꽤나 속을 썩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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