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 일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

 

문화재청이 지동 일대를 정비에 나선다. 문화재청은 4월에 관보에 문화재법 제 27조 및 제34조 규정에 따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0-66번지 등 167필지 13,520를 사적 제3수원 화성의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는 사항을,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예고했다.

 

수원 화성사적 보호구역 추가지정 예고

 

붉은 선 안이 새로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 예고된 곳이다. 봉돈 등의 앞이 시원해질 전망이다


 

예고사항

. 대상문화재 : 사적 제3호 수원 화성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일원

. 보호구역 추가지정 면적 : 167필지 13,520(지번별 면적조서 붙임)

. 추가지정 예고사유

성곽 연접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여 무분별한 개발을 방지하고, 지형을 회복함으로써, 수원 화성의 역사 문화환경을 보호하고자 함.

. 관리단체 : 수원시

 

봉돈의 앞부분 모자이크 부분이 보호구역으로 지정 예고된 곳(위) 아래 사진에서 좌측부분이 예고된 지역이다 


문화재청은 예고된 사항에 대하여 의견이 있는 사람은, 관보 공고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의견을 해당 지방자치단체(경기도 문화재과, 수원시 화성사업소 문화유산관리과), 또는 문화재청 보존정책과로 제출하거나,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새소식문화재지정예고란을 이용하여 의견을 게재하여 주면 된다는 것.

 

연락처는 문화재청의 경우 문화재보존국 보존정책과(전화 042-481-4837)로 연락을 하면 된다.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경기도는 문화재과로(전화 031-8008-4771/팩스 02-8008-2289), 수원시 화성사업소 문화유산관리과(전화 031-228-4425/팩스 031-228-4460) 등에 연락을 하면 될 것이라고.

 

 

달라질 지동의 모습에 기대 커

 

이번에 공고안대로 문화재청이 지동 일대를 사적 보호구역으로 정하고 정비를 하게 되는 곳은, 현재 동삼치 조금 지나 창룡대로(지동에서 창룡문 방향으로)의 좌측 도로 인접부분부터, 성곽까지 일대가 헐리게 된다.

 

이 지역이 제대로 정비가 끝나고 나면, 봉돈 앞이 한결 조망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늘 이곳을 다닐 때마다 답답하게 보이던 수원 화성의 성곽 바깥 길도, 한결 넓어져 시원하게 보일 듯. 그동안 이 지종에서 창룡문까지만 성곽 가까이에 집들이 들어차 있어, 화성을 바라보기가 영 불편했다.

2004년도에 수원에서 생활을 할 때, 처음으로 화성을 돌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마도 화성을 안과 밖으로 돌아본 것이 20여 회는 되는가 보다. 그것도 복중에, 장마철에, 단풍이 들었을 때, 흰 눈이 쌓여있어 몹시도 미끄러울 때. 같은 시기에 돌아 본 적은 별로 없는 듯하다. 심지어는 밤에도 화성을 돌아보았으니.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화성을 왜 그렇게 돌아보았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성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화성. 그런데 몇 번인가 계속해서 화성을 돌아보았더니, 아주 조금씩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화성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화성이 정조대왕의 효심과 막강한 군주의 위용이 서린 곳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단지 화성이 그것뿐이었을까? 적어도 화성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거리들이 널려있다. 우선은 자연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민초들의 애환과 정조대왕의 위민도 있다. 또한 숱한 석공들의 땀과 희열도 있다.

 

그 화성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저 운동 삼아 화성주변을 돌아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기 보다는, 그래도 그 화성과 말 한마디 쯤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지난해인가, 효원고등학교를 다니던 김주송이란 학생이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 책을 접하는 순간 충격이었다.

 

 

나는 2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느낀 것을,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깨달았다는 사실이. 하지만 주송이는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화성을 걸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주송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얻은 것일까?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화성에 대한 글을 연재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수도 없이 화성을 걸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성을 돌면서 한 가지 깨우친 것이 있다면,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점이다. 문화재는 눈으로 보아서는 그 안에서 무엇도 발견할 수가 없다. 마음으로 문화재를 바라볼 때,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달사지에서 또 한 번 좌절을 맛보다

 

화성 못지않게 많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지이다. 고달사지에는 국보인 승탑을 비롯해, 보물이 3점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비는 몸돌인 비는 무너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318일 여주에 동행한 지인들과 함께, 아침에 고달사지를 찾았다. 넓은 고달사지에는 여기저기 석조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혜목산 자락 쪽으로 탑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는 그 한편도 보지 않았는데, 일행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내려오고 있다. 찬찬히 원종대사 탑비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수 뒤편으로 돌아가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띤다. 움푹 파인 것을 그동안 무심히 보아온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틀림없이 용의 발톱자국이 그 안에 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간 듯한 자국. 네 개의 발톱자국이 선명하다. 왜 이렇게 이수에 할퀴고 간 흔적을 만든 것일까?

 

그동안 10여 차례나 이 탑비를 보았으면서도, 한 번도 이 움푹 파인 곳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었다. 다시 탑을 꼼꼼히 따져본다. 이번에는 이수 앞쪽에 쓰인 명문아래에 도깨비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양편으로는 힘을 주어 금방이라도 비를 떨치고 일어날 것만 같은 발이 표현되어 있다.

 

 

그동안 무엇을 본 것일까? 날마다 찾아와 들여다보았으면서도 아직 이런 것을 보지 못하였다니. 순간 부끄럽다. ‘문화재를 마음으로 보라고 그렇게 떠들어댔지만, 정작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인가? 또 한 번의 죄스러움.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얼른 자리를 비켜 승탑이 있는 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 난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문화재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형방청이란 조선시대 관아에서 치안업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들이 묵던 곳이다. 부여군 홍산면에 소재한 홍산현 동헌과 형방청,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홍산객사와 더불어 20077월 사적 제481호로 지정이 되었다. 홍산현은 백제시대에는 대산현이었다.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가, 조선조 태종 때 홍산현이 되었다.

 

홍산현 관아를 찾아가 중층 누각으로 지은 정문을 살펴보니, 문이 열려있다. 원래 이 관아의 건물은 부소산성으로 옮겨 영월루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관아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충남 유형문화재 제178호로 지정이 된 홍산형방청이 자리한다. 이 건물을 <이정우 가옥>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홍산형방청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정우 가옥을 몰라?

 

현재 홍산형방청이 왜 이정우가옥이라고 불리는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한때 이 집에서 이정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부여군의 문화재 안내에는 이정우가옥인 형방청이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183-1>에 소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방청의 관아건물 말고, 또 다른 가옥이 있는 것인지.

 

홍산면에 들려 북촌리를 향했다. 이정우가옥이 있다는 곳을 찾아 아무리 둘러보고,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그런 집은 모른다는 대답이다.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장님 댁을 찾아 물어도 그런 집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일도 있다. 할 수 없이 집을 찾는 것을 포기를 하고 홍산 동헌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산 동헌이 있는 곳은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 187번지>이다. 그런데 이곳을 가니, 관아 앞에 안내판이 있고, 관아 건물 한 편에 이정우가옥이라는 집이 보인다. 어떻게 한 관아 안에 있는 건물이 남촌과 북촌으로 갈라질 수가 있을까? 막상 그렇게 찾으려고 돌아다닌 집을 찾고 보니 허탈감이 든다.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묵던 형방청

 

이정우가옥은 조선시대 홍산현의 관아 건물 중의 하나인 형방청(刑房廳)’이다. 현재는 홍산형방청이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고종 8년인 1871년 고쳐 지은 민가풍의 목조건물이다. 당시의 현액명은 비홍추청이라고 불렀단다. 10칸 크기의 자형 동향집으로, 중앙 대청과 남쪽 날개채는 마루를 깔았었다. 북쪽 안채에는 한 칸짜리 온돌방 2개를 들였다.

 

 

형방청은 자연석 주춧돌에 몸채는 정면 5,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고, 좌우 날개채는 정면 2, 측면 1칸으로 꾸몄다. 몸채의 지붕 용마루를 좌우 날개채보다 높게 놓았다. 몸채의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꾸미고, 측면에는 부엌을 두었다. , 우측의 날개채에는 현재는 각각 2개의 방을 드렸다.

 

형방청은 팔작지붕으로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형방청은 그 예가 희소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많은 관아 건물 중 이렇게 보존이 잘 되어 있었던 것도,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형방청은 건물연대, 중수기록, 형태 등이 온전히 남아있어,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일면을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 건물 한 동에 다양한 쓰임새가 돋보여

 

이정우가옥이라고 불렀던 홍산형방청은 단 한 동의 건물이지만,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몸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좌측에 딸린 날개채는 밖으로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부엌이 딸려있다. 아마도 이 좌측 날개채를 사랑의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 같다. 몸채 우측의 날개채는 두 칸을 방으로 들였으며, 끝 방의 밖으로는 다락이 돌출되어 있다.

 

몸채와 우측 날개채의 앞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았다. 좌측 날개채의 툇마루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곳은 문을 내어, 출입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부엌문은 양편으로 내어 환기를 돕고, 몸채로 출입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한 동의 건물을 이렇게 용도가 다양하게 꾸민 집은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곳에서 생활을 하던 관리들의 편의를 생각해서인지.

 

 

많은 고택을 돌아보았지만, 홍산형방청과 같은 구조라면, 이 집 한 채만 갖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을 것만 같다. 어렵게 찾아다닌 때문인지, 형방청의 이모저모가 눈에 들어온다. 좁지만 용도가 다양한 홍산형방청. 보존상태도 양호하기에 더욱 돌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산성 내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와 그 외에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위봉산성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산성 성문지 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 의 성문지. 비교적 잘 보존이 되어있다

성문지 위에 누각이 소실되 구멍이 뜷려있다

 

도로가 성벽을 끊고 있는데 건너편에 보면 성벽위로 여장, 총안을 둔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 안으로 찬찬히 훑어보면 다른 성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성벽을 쌓은 돌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를 쌓아놓았다. 자연미가 풍기는 성벽은 오히려 다듬은 성벽보다 아름답다. 울퉁불퉁한 성 돌을 그대로 맞추어 쌓아놓은 성벽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성이다.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옹성은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안으로 적이 들어오면 사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위봉산성은 전투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과 패 등을 옮겨 보호하기 위한 성이기도 하다. 또한 변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피신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위봉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이 되자 태조의 어진을 옮겨 모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성 안에는 위봉폭포와 위봉사가 있어 늦가을 바람 따라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역사를 따라 길을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 자리한 사적 제422호인 이성산성. 일부에서는 백제 혹은 고구려에서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성곽의 발굴에서 조사된 바로는 신라시대의 성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고고학적인 유물과 축성방법으로 보아, 신라의 성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산성은 본래 백제 한성시대(서기전 18~서기 475)의 도읍지로 주장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6년부터 2003년까지 10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로 볼 때, 신라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신주를 설치할 때, 이 신주의 주성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눈길에 찾아간 이성산성

 

이성산성을 오른 것은 산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돌아보기 이해서이다. 눈 내린 다음에 찾아간 이성산성을 오르는 길은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등산객들이 밟은 발자국인지 눈길에 발자국들이 흐트러져 있다.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어 산으로 오른다. 해발 210m의 높지 않은 이성산에 쌓은 포곡식 산성인 이성산성.

 

20여분을 오르다가 보니, 저만큼 성돌이 보인다. 이성산성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석축을 하였다. 성벽을 돌아가면서 10여개소의 치를 두었다고 하는 이성산성. 그러나 이번 답사는 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 안에는 두 곳의 저수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한곳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온전한 배수로가 남아 있는 저수지

 

이성산성 안에 있는 저수지는 2차에 걸쳐 조성이 되었다. 1월 3일 찾아간 저수지 주변에는 흰 눈이 쌓여있고, 저수지 안에는 마른 풀들이 보인다. 이 저수지는 산성 내의 자연계곡 아래쪽을 막아 물을 가두어 사용하였다. 네모난 직사각형의 저수지는 1차 저수지를 준설한 후, 4면에 석축을 하여 2차 저수지를 조형하는 방법을 택했다.

 

석축은 단을 만들어 쌓았으며, 50×20×40cm 의 돌로 5cm 정도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이렇게 들여쌓기를 하는 것은 저수지의 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다. 저수지는 보기에도 매우 단단하게 축조를 하였다. 한편에는 배수로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저수지 물이 넘치면 경사진 배수로를 따라 성벽 밑에 물을 모으는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모인 물은 다시 더 밑으로 난 2차 배수로를 따라 흐르게 하였다.

 

 

수차례 석축을 한 이성산성

 

이성산성은 외벽의 성벽을 쌓은 돌들이 네모나다. 그러나 각이 진 것이 아니라 옥수수알처럼 밖을 둥그렇게 다듬은 형태이다. 그래서 일반 성곽과는 달리 성벽이 모나지가 않았다. 저수지가 있는 곳 주변의 성곽은 일부가 남아있는데, 안으로 보면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가 처음으로 축조를 하고 그 후에 신라가 보축을 하여 사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눈길을 밟으며 찾아간 이성산성의 저수지. 당시에 이 산 꼭대기에 이렇게 저수지를 마련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렇게 산성에서 적과 교전을 하기 이해서는 무엇보다도 식수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용도로 볼 때 이 저수지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저수지 위편에 ‘이성산성 약수’라고 목판을 단 나무로 만든 작은 전각이 보인다.

 

그러나 돌로 쌓은 약수는 입구가 봉해져 있어 아쉽다. 모처럼 찾은 이성산성의 물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다니. 봄이 되면 이성산에 꽃들이 만개할 때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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