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찾아가기도 쉽지가 않다. 도로 이정표에 적혀있는 사찰명 하나만을 갖고 찾아 나선 절이다. 백련사,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가실리 신43번지. 주소를 알았다고 하면 내비게이션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절이었지만, 그저 이정표의 화살표 방향만 보고 따라갔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용인 에버랜드를 지나 도로로 마장IC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산길로 들어가다가 또 다시 오래된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갔다. 아마도 거의 산길을 3km 정도를 돌아 돌아 찾은 것만 같다. 일반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판에서도 한참이나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절. 백련사는 그렇게 심산유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 애장왕 2년에 창건한 백련사

 

백련사는 용인시 전통사찰 제54호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 1791년 석담대사가 쓴 약사에 보면 신라 애장왕 2년인 801년에 선응선사에 의해서 창건된 고찰이다. 고려 경종 원년인 1399년에 천공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조선 태종 4년인 1404년에 무학대사가 중건하면서 18 나한상을 조성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현종 12년인 1671년과 정조 11년인 1787년에 수경스님과 석담 스님에 의해 각각 중건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 18년인 1891년에 편찬된 용인현 읍지 사찰조에 백련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도 사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거의 폐사가 되었던 백련사는 청신녀 청정월의 화주로 요사와 법당을 중수하였고, 성월스님의 중창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불상 1구와 조선후기 나한상 13, 수경스님의 부도 등이 남아있다. 당우로는 대웅전, 산신각, 나한전, 요사, 종각 등이 있다.

 

가파른 계단 위에 자리해

 

주차장에서 백련사의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계단 중앙서부터 위까지 3층으로 된 전각은 방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수행을 하기 위한 방으로 보인다. 그 전각의 중앙으로 경내의 삼층석탑의 상륜부가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종각이 있고, 앞으로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의 우측 조금 위로는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좌측으로는 지장전이 있다. 그리고 지장전 좌측으로 소대와 조금 떨어져서 나한전이 자리한다. 나한전은 원형으로 만들었으며 기와와 황토를 이용해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나한전 앞에서 절 경내를 내려다본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석가모니불의 진신 사리탑이라고 한다.

 

절을 들어가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심산유곡에 자리한 사찰치고는 대웅전이 큰 편이다. 창호는 꽃창살로 조성을 해 아름답다. 나한전 앞은 유리로 막아놓아 안이 들여다보인다. 수미단의 위에는 작은 나한들이 여러 형태로 좌정을 하고 있다. 아마도 저 나한상들이 조선후기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니 커다란 사자를 닮은 개 한 마리가 마당에 앉아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영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자세이다. 절에서 오래 살다가 보니 해탈의 경지라도 이른 것일까? 축대 밑에 있는 샘에 가서 물 한 잔을 떠 마신다. 내장까지 다 시원해진다.

 

이렇게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절의 물이니 얼마나 그 맛이 좋을까?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이 물이야말로 정말 깨끗할 것이란 생각이다. 고즈넉한 고찰에서 마시는 물 한 대접. 이 물로 인해 세상에서 묻힌 허물을 조금이라도 가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저 이런 절에서 며칠만 살 수만 있다고 해도 세상 시름을 다 놓을 것만 같다.

 

얼핏 보면 복잡한 탑이다라고 생각이 든다. 탑 하나에 많은 조각을 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이 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 오래 전에 장비도 부족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돌에다가 이렇게 훌륭한 조각을 하다니, 그저 놀랍다라고 할 밖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한 천년고찰 갑사. 그 경내에는 특이한 승탑 한기가 서 있다. 보물 제2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공주 갑사 승탑(公州 甲寺 僧塔)’. 이 탑은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놀랍다.

 

106일과 7일의 답사는 꽤 빡빡한 일정을 잡았다. 그것은 근 한 달간이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답사를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바삐 돌아보는 일정으로 인해 피곤하기도 하고 발도 아팠지만, 문화재를 만난다는 기쁨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힘든 답사일정도 즐거움이었다.

 

갑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한 후,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인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아도화상은 탑 아래 배례석에서 참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그 후 위덕왕 3년인 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했다. 의상대사는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갑사는 수차례 찾아간 곳이다. 많은 문화재도 있지만, 갑사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그 옆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신선이라도 될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찾아본 승탑. 언제 보아도 놀랍기만 하다. 어찌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악비천인상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듯

 

갑사 승탑은 높직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올렸다. 기단은 상중하 받침돌로 나뉘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하층기단에는 사자와 구름, 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고, 거의 팔각이 아닌 원에 가까운 가운데기단에는 각 귀퉁이마다 귀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다.

 

그 사이에는 주악비천인상을 새겨 놓았는데, 금시라도 연주소리가 울려 나올 것만 같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상층기단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의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사자 조련사가 맞아?

 

하층 기단에 조각한 사자들을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 중 한 마리의 사자 앞에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보인다. 아마도 이 탑에 조각한 사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예전 갑사에 들렸을 때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사자들을 먹이느라 저렇게 하루 종일 사자 우리에서 살고 있다라는 말씀이었다. 정말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갑사 승탑은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다. 하지만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진 것이 흠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승탑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작으로 손꼽힌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갑사 승탑. 또 다시 만날 때는 무엇이 또 보일까? 문화재를 만나면서 늘 하는 기대이기도 하다.

 

 

머리에 베로 꼰 띠를 두르고, 무복(巫服)의 자락을 휘감아 한 편에 질끈 동인 저승사자가 지노귀굿의 상 중앙에 놓인 망자의 넋을 상징하는 종이로 만든 ‘넋전’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다. 사제삼성은 서울과 경기 지역의 집가심굿과 지노귀굿에 나오는 세 명의 저승사자를 일컫는 말이다.

 

7월 21일(일) 밤이 이슥하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굿이 이미 밤 10시를 넘겼다. 오산 원동 마등산 자락에 소재한 한 굿당에서는 망자의 혼을 천도시킨다는 지노귀굿이 펼쳐졌다. 이 굿판에는 무격(巫覡. 남자무당과 여자무당을 함께 이르는 말) 5명과 악사 2명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제가집(굿을 의뢰한 망자의 가족)에선 가족들과 지인들 30여 명이 참석을 했다.

 

 

망자를 위로하고 달래는 지노귀굿

 

지노귀굿이란 죽은 망자를 천도시키는 굿을 말한다. 지노귀란 ‘진혼(鎭魂)’의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그 굿을 하는 시기나 형태에 따라 명칭이나 굿의 제차 등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3년 동안 상청(喪廳)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3년 안에 하는 지노귀굿은 모두 ‘진지노귀굿’이라 하였다.

 

3년이 지난 다음에 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굿은 ‘묵은 지노귀굿’이라 하고, 3년 만에 상청을 치우면서 하는 굿을 ‘탈상굿’이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사람이 살아있을 대 미리 지노귀굿을 하면 ‘산지노귀굿’이라 하고, 죽을 수에 있는 사람의 명을 연장하기 위한 ‘헛장굿’ 등도 모두 지노귀굿에 포함을 시킨다.

 

 

큰머리 얹고 바리공주 무가를 구송해

 

저녁 무렵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망자의 지인들로 인해 주변 주차장은 차가 가득하다. 굿당 안에 잘 차려진 굿상이며, 상 뒤편으로는 저승십대왕을 의미하는 글을 적은 번이 걸려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이 굿이 무슨 굿인가를 알 수 있는 분위기이다. 망자의 가족들이야 당연히 참석을 하겠지만, 선, 후배들을 포함해 30여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으니 굿당 안이 시끌벅적해 질 수 밖에.

 

굿은 굿판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과 굿청의 부정을 가시는 의식으로 시작이 되었다. 주무(主巫)인 승경숙 만신과 보조를 하는 어린 무녀(巫女)들도 부산하게 움직인다. 굿이 한창 무르익을 때쯤 바리공주 무가를 구송하는 ‘말미’의식으로 들어갔다. 작은 상위에 쌀을 붓고 한지로 덮어 놓는다. 그리고 바리공주 무가를 장구를 치면서 구송하기 시작한다.

 

머리위에는 바리공주를 상징하는 큰머리를 올리고, 근 한 시간 가까이 진행이 되는 무의식 제차에 사람들이 지쳐갈 만도 하련만, 이런 진지노귀굿을 처음으로 접한다는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줄을 모른다. 아마도 이런 굿판에 와서 망자와의 평소에 친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슬픈 굿에서의 반전, 해학이 가득한 사자놀음

 

지노귀굿은 망자의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망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기 때문에 울음바다가 된다. 가족뿐만 아니라 굿청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굿이다. 하지만 지노귀굿에서도 반전이 있다. 슬픔만 간직하고 돌아간다면 오히려 마음에 더 큰 아픔을 안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반전이 이루어지는 굿 제차가 바로 ‘사제삼성’이다. 이 거리에는 저승사자로 굿을 진행하는 무당이 변한다. 머리에는 베를 꼬아 띠를 만들아 두르고, 심지어는 얼굴에 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굿청 앞에 놓인 사자상에 가서 차린 것이 없다고 푸념을 하면서 아무것이나 주어먹는다.

 

 

이때 제가집이나 지인들은 굿상 앞에 일렬로 도열을 한다. 바로 사자가 굿상 위에 놓인 망자를 상징하는, 종이로 만든 ‘넋전’을 들고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넋전을 빼앗기면 망자의 혼령을 빼앗긴다고 하여, 사자가 굿상 앞에 다가서지 못하도록 몸으로 사자를 막아야 한다. 이 대목이 바로 반전이다.

 

입에는 큰 떡을 물어 마치 혓바닥처럼 늘이고, 눈을 이상하게 만들어 굿상으로 덤벼드는 사자를 보고 제가집의 가족들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굿상 앞을 막아선 15명 정도의 망자의 지인들은, 사자가 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느라 정신이 없다. 이곳저곳을 찔러보고 밀어보고. 심지어는 입에 문 떡까지 줄 테니 비키라고 한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우리 굿만이 갖고 있는 해학이다.

 

 

망자의 가족들까지도 웃길 수 있는 굿판. 울리고 웃기고, 그래서 우리 굿은 좋은 것이다. 말미에 이어 망자의 상을 도는 ‘도령’과 베를 갈라 망자의 저승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길 가르기’, 그리고 저승길에 가시밭길을 무사히 넘기는 ‘가시문 넘기기’까지로 굿은 끝났다. 22일 새벽 1시. 길고 긴 지노귀굿이 끝나고 가족들과 지인들은 다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무격들뿐이다. 굿청에 모인다는 뭇 잡귀들을 다 풀어먹여 보낸다는 뒷전까지 마친 시간이 새벽 1시 30분. 이때쯤이면 누구나 다 지치게 된다. 하물며 몇 시간을 뛴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그래도 모두가 ‘속 시원하다’며 돌아갔으니, 아마도 이 망자 좋은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다음 생에는 절대 이런 슬픈 자리에서 만나지 말고, 이승에 맺힌 한 훌훌 털고 돌아가시게”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보원사지. 보원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 중 보물 제104호인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세워졌는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수많은 문화재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상당히 번창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은 보원사지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추정하고 있으나, 보원사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근 용현리에서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무게감을 더하고 있는 오층석탑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탑 중 하나이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조성한 오층석탑은,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겼다. 하지만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해 사장상의 모습은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윗기단은 양편에 양우주를 돋을새김하고 가운데는 탱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옆면에는 팔부중상을 2구씩 각 면에 새겼는데, 조각은 세심하지는 않지만 힘이 있어 보인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무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팔부신장은 인도의 고대불교 이전부터 있던 신격이불교에 수용된 신들이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중상

 

팔부신장은 흔히 ‘명중팔부’ ‘천룡팔부’ 등으로도 불린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신장은 경전의 내용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경전상으로도 여래팔부중과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을 말한다.

 

 

 

 

즉 천과 용, 야차와 건달바, 아수라와 가루라, 그리고 긴나라와 마후라가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은 건달바, 비사사, 구반다, 벽협다를 비롯해 용과 부단나, 야차와 나찰 등을 말한다. 석탑의 기단부나 불화 등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팔부신장은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에 조각된 팔부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계 양식을 모방한 고려석탑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양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이며 귀퉁이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의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이 지역은 옛 백제지역이기 때문에, 그 지역의 석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머리장식받침인 네모난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 듯 하지만, 장중하고 기단과 몸돌의 균형이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때이다. 문화재 하나를 소개하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야하는 나로서는, 보원사지와 같은 곳이 정말 즐거울 수밖에 없다. 오층석탑 주변에 즐비하게 널려진 보물들과 석재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힘들게 걸어 온 길의 피로를 잊는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산195-1 번지에 소재한 쌍봉사. 쌍봉사에서 좌측으로 산길을 조금 오르면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이 철감선사탑은 철감선사의 부도탑이다. 부도란 옛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을 말한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당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신라 문성왕 9년인 847년에는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다. 경문왕대 때에 이 곳 화순의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 절을 지었는데, 절 이름을 그의 호인 ‘쌍봉’을 따서 ‘쌍봉사’라고 이름 하였다. 경문왕 8년인 868년에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경문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국보 제57호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조각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뛰어난 조각술이 돋보이는 철감선사탑

8월 21일에 쌍봉사를 찾았으니,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화순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찾아간 쌍봉사. 쌍봉사는 고찰답게 많은 문화재들이 경내에 소재한다. 철감선사탑이 있다는 곳으로 오른다. 주변을 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탑 옆에는, 보물 제170호인 비문이 사라진 탑비도 함께 있다. 담이 터진 입구 쪽으로는 탑이 서 있고, 그 안쪽에 탑비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때의 일반적인 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탑은 전체적으로 모두 남아있으나, 아쉬운 것은 꼭대기의 상륜부인 머리장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철감선사탑은 기단이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단부의 장식이 화려한데 그 중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화려하다.





하층기단인 밑돌은 2단으로 조성했는데 8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이 사자들은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탑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의 아래는 조금 넓게 조성을 해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마치 사자들이 구름위에 앉은 모습을 표현하였다.

조각한 장인의 염원이 담긴 탑

상층의 윗돌 역시 2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아래에는 커다란 앙화를 조각해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몸돌에는 사천왕상과 함께 비천상까지 돋을새감으로 조각하였다(위) 천상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몸돌의 조각은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해, 철감선사탑은 비천상까지 함께 새겨져 더욱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감선사탑을 조성한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쯤으로 추정된다. 상륜부가 사라져 아쉽기는 하지만, 조각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장인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작품이다. 아마도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은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비천인이나 가릉빈가들이 살고 있다는 극락을 염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8마리의 사자들은 각각 자세를 달리해 앞을 주시하고 있다. 탑을 지키기 위한 것일까?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철감선사탑. 그곳을 떠나기 아쉬운 것은 언제 또 다시 이런 아름다운 탑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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