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은 예전에 아흔 아홉 구비 물길이 들어오던 곳이다. 이곳은 충남 아산지역이면서도 경기도 평택과 도계를 이루고 있어, 오히려 아산보다는 평택 쪽에 생활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는 둔포까지 소금배가 들어왔다고 하는 포구에는 아가씨는 둔 색주가가 100집이 넘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 둔포면 신항리를 찾아가면, 마을에 고래 등 같은 한옥들이 몇 채 보인다. 그 중 가장 마을 안에 넓은 평지를 앞에 두고 한 가운데 집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이다.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를 찾아가면 제일 먼저 느낌이 '거대하다'라는 생각이다. 물론 아흔아홉 칸 집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오히려 더 크다는 느낌이 든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자 형으로 꾸며진 대문채와 행랑채가 있다. - 자로 된 대문채와 꺾인 부분의 행랑채가 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행랑채와 연결된 담에는 중문이 있고, 중문은 담벼락이 행랑채와 연결이 되면서 다시 자의 광채와 중문채를 이루고 있다. 밖에서 보면 이 행랑채와 중문채의 담장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 중문채를 안사랑채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광채와 연결된 중문채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이란 집안의 남자들이 묵는 곳인데, 이 중문채에 연결된 방 등 공간은 집안에서 일을 하는 부녀자들이 기거를 하는 곳으로 안사랑채와는 다르다. 바깥쪽의 행랑채나 사랑채는 출입을 할 수가 있으나, 중문 안으로는 굳게 잠겨 있어 담 밖에서만 촬영이 가능하다.

 

안채는 중문채와 반대로 자 형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에서 몇 바퀴를 돌아 안채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고택을 찾아가면, 이렇게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어려움이다. 안채는 모두 아홉 칸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 구성이다. 안채는 남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샛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인 곳에 두 칸의 대청과 두 칸의 건넌방, 맨 끝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다. 바깥사랑채와 안채사이에도 담장으로 구분을 하였다.

 

 

특이한 구조의 사랑채의 미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윤 전 대통령의 선친인 윤치소가 1907년에 지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우측에 자리한 사랑채는,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별도의 담을 둘러 일각문을 내었다. 사랑채의 누마루 아래에는 숨은 쪽문이 있어 사랑채의 뒤로해서 안채로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사랑채는 서쪽으로 누정과 같이 높은 네모뿔대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방을 들여놓았다. 이곳에 오르면 앞뜰이 훤히 내다보일 것이다. 그리고 두 칸 큰사랑과 두 칸 대청, 건넌방을 두었다. 앞으로는 모두 유리문을 달아냈는데, 우리 전통 고택의 창호와는 다르다. 전체적으로 사랑채는 하나의 또 다른 공간 구성을 하면서 멋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점이 이 집의 특징이기도 하다.

 

 

담장에 낸 굴뚝, 궁궐과 같은 효과를 내

 

사랑채의 뒤로 난 담장에는 굴뚝이 높게 솟아있다. 굴뚝은 사랑채와 땅 밑으로 난 연도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뒤로해서 안채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동선인 일각문 옆에 자리한 굴뚝. 흔히 우리가 고궁을 관람하면서 볼 수 있는 형태로 꾸몄다. 고궁을 관람하다가 보며 이런 담장에 난 굴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굴뚝 하나가, 이 집이 이 마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아산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 비록 중간에 약간의 보수를 하였다고 하지만, 처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중문을 넘어설 수 없어, 안채를 꼼꼼히 살필 수 없었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많은 고택을 보았지만, 그 중에서는 단연 '고래등'이라는 말이 적합한 표현일 듯하다. 그래서 대통령이라는 큰 인물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문화재 답사를 해 놓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보면 소개를 빠트리는 것이 가끔 생긴다. 그 문화재가 딴 것에 비해 뒤떨어져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보면 시기를 놓치는 수가 있다. 경남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7호인 거창 무릉리 정씨고가가 바로 그런 경유이다.

 

무릉리 정씨고가를 찾아간 것은 오래 전 62일이었으니, 벌써 한참이나 지났다. 정씨 고가를 찾던 날은 초여름 비가 참 후줄근하게 내리던 날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답사를 하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불어 우산을 가누기도 힘든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빗속에서 만난 무릉리 고가, 사랑채에 반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한편은 광으로 사용하고, 한편은 방을 드려 예전에는 이곳에 하인들이 사용한 듯하다. 그리고 대문과 같은 높이에 사랑채를 지었는데, 대문 쪽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기둥을 놓았다. 안채 쪽은 축대를 높이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는데, 현재는 담벼락을 쌓은 이곳도 예전에는 축대 위에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무릉리 정씨고가의 사랑채의 형태가 남다르다. 이곳 사랑채는 정형초의 호를 따서 산수정이라고 부른다.

 

무릉리 정씨 고가는 조선조 숙종12년인 1686년에 장사랑을 지낸 산수정 정형초가 건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중수한 것으로, 건물구성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안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헐리고, 일부는 변경된 구조로 남아있다. 전체적인 건물배치는 경사지에 기단을 높게 축조하여, 대지의 안쪽 높은 곳에 안채, 바깥쪽 낮은 곳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자 형으로 꾸몄는데, 대문 쪽은 두 칸 개방마루를 높게 놓고, 안채 쪽으로는 한 칸의 방과 한 칸의 정자마루로 꾸몄다. 사랑채를 높게 하기 위해서 높은 기둥으로 받쳤으며, 앞에는 돌로 계단을 쌓아올렸다.

사랑채의 대청은 측면과 후면을 판자로 닫아 판문을 내고, 앞쪽으로는 난간을 들렀다. 덤벙주초에 자연스런 나무로 기둥을 마련하였으며, 한쪽은 팔작으로 꾸미고 한편은 맞배로 꾸민 특이한 형태이다.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안채의 꾸밈

 

안채는 축대를 쌓고 그 위를 평지로 돋아 집을 지었다. 계단을 올라 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비켜 서 안채가 자리를 한다. 무릉리 정씨고가의 안채는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는 보기드문 자형 평면의 3량 구조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정면 4, 측면 2칸의 자형 평면에 양끝에 협칸을 앞으로 돌출시켜, 자형 평면외부에 마루를 두르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안채는 상당히 변형이 온 듯한 상태이다. 우선 대청마루에 문을 달아낸 것도 그렇지만, 문을 모두 현대식으로 고쳐놓았다. 고가에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찾아도 기척이 없다. 안채는 그냥 중문채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돌아선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는데, 아직도 찾아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자리한 소석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3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농의 상징으로 멋을 자랑하는 소석고택은, 기와에 새겨진 명문을 확인한 결과 조선조 고종 22년인 1885년에 지어졌다. 소석고택의 건물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안채에 수직축을 맞추어 사랑채를 놓았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곳간채를 배정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었다.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경에 없어졌다고 한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넓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에는 너른 안마당이 있어, 전체적으로 집안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소석고택을 찾은 날은 쌀쌀한 날씨였다. 옷깃을 여미고 찾아간 소석고택은, 초강천을 옆에 두고 너른 평지에 자리한다. 주변에는 초강초등학교가 있어 찾기에도 수월하다.

 

 

안채 다락방을 아궁이 위에 둔 까닭은?

 

소석고택의 안채는 'ㅡ' 자형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경기도 이남의 남부가옥에서 보이는 평면구성으로 안방, 윗방, 2칸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열되었다. 그런데 이 안채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2칸 대청을 지난 건넌방의 다락이다. 이 다락은 밑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아궁이 위에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큰 창을 내었다.

 

이렇게 아궁이 위에 다락을 내는 까닭은 바로 습기를 제거하는 목적이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 그 온기가 올라 다락을 건조시키는 것이다. 창이 큰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안채는 대개 부녀자들이 기거를 하는 곳으로, 이 아궁이 위의 다락에 옷가지 등을 보관하면 늘 뽀송뽀송하다는 것.

 

 

 

 

 

집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한 곳까지 배려를 한 것이 바로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자 실효성이다. 이러한 것을 점차 생활이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버리고 있는 우리들의 주거문화가 참담하기까지 하다.

 

H자형의 사랑채의 멋스러움

 

우리 고택 중 와가의 멋은 바로 지붕이다. 버선코로 비유되는 처마 끝은, 그야말로 멋스러움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위로 치켜 올려진 것은 무한한 발전을 이끌어 낸다. 모든 일에 대한 희망에 견주기도 하는 이 처마 끝의 멋이야말로 한옥의 특징이다.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H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남편에는 돌출된 누마루를 놓았다. 삼면을 기둥만 세워 시원하게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누마루에 앉아 시를 짓기도 하고, 벗들과 어울려 술 한 잔에 시름을 덜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간단한 난간으로만 치장을 한 누마루는, 그대로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누마루와 반대편에 있는 서편의 방 옆에는 커다란 문을 달았다. 이 문의 용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 초강천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겨울이면 문을 닫아 찬바람을 막아내는 구실을 했다. 기단으로 쌓은 돌 하나하나에서 소석고택이 부농의 상징임을 알 수 있도록 꾸몄다. 어느 곳 하나 빠짐이 없는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한옥의 멋을 그대로 살린 아름다움이다.

 

 

 

 

 

곳간은 둘, 지붕은 하나의 색다른 건축

 

소석고택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바로 곳간채다. 안채와 사랑채가 와가로 지어진데 비해, 곳간채는 초가로 꾸며졌다. 그것이 소석고택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이 곳간채는 지붕이 하나인데 곳간부분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했을까?

 

서향으로 지어진 소석고택의 곳간채는 뒤주처럼 가로로 널판을 끼워 맞추고 있다. 이 곳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각 칸마다 세로로 중인방을 넣고, 널판을 가로로 끼워 벽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곳간채는 바닥은 널마루로 깔고 천정 또한 널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이렇게 분리를 해 놓은 것은 한 곳은 곡간으로, 한 곳은 뒤주로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돌담과 측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건물만큼 돌담을 쌓았다. 그것은 부녀자들이 기거하는 안채와 남정네들이 드나드는 사랑채를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서편 'ㄱ' 자로 꺾인 부분에 측간을 지었다. 측간은 초가로 지어졌으며 널판자로 벽을 만들었다. 1칸으로 지어진 이 측간을 사랑채 뒤에 두고, 담장을 막은 것도 소석고택이 그저 건축물을 놓은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도 신경을 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뒤쪽에 측간을 내어 냄새를 방비하기도 했지만, 담을 두어 자칫 불편한 모습과 소리를 안채에서 듣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우리 고택을 둘러보면 하나하나가 철학이다. 그리고 자연과 동화를 하면서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과 동화되는 심성이 아름다운 집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집을 짓는 마음이 그립다.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68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1신경섭 가옥(申慶燮 家屋)’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 집은 사랑채 중간에 마루를 두어서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무의 결과 단청의 색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집이다. 대문채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며, 신석붕의 효자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경섭 가옥을 들려온 것은 꽤 나 시간이 지났다. 은행의 열매가 떨어져 냄새가 코를 진동할 때였으니. 문화재 답사를 마치면 바로 글을 써야 감을 잊지 않지만, 한꺼번에 많은 문화재를 답사하고 나면, 그렇게 바로 글을 적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면 가끔 이렇게 철지난 글을 적어야할 때가 있다.

 

 

자 형의 사랑채가 돋보이는 집

 

신경섭 가옥을 찾았을 때 후원 담장 한편이 트여있다. 앞으로 돌아가니 대문인 듯 효자정려가 걸려있는 문은 잠겨 있다. 담 밖을 돌면서 집을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저 편으로 돌면 문이 열려 있으니, 그쪽으로 돌아가 보라고 하신다. 그럴 때면 정말 안내를 해 준 분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신경섭 가옥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집으로 자 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자 형으로 자리를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자 형으로 구성이 된 충청도의 양반가옥이다. 이 가옥은 안채에 안방, 건넌방, 대청, 고방, 부엌을 들였고, 사랑채의 상량문에는 승정기원후사계묘라고 적고 있어, 184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한편 끝에는 높임 누마루 방을 두어 정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 곁으로 돌아가니 후원 앞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이 누마루 정자 방에서 바라보는 후원을 바라보는 정취가 일품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와 안채 중간에는 돌우물이 자리하고 있어, 자칫 무료한 안마당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양반가옥의 기품을 지키는 집

 

효자정려가 걸려있는 대문은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동선을 마련한 듯하다. 열려있는 또 한편의 문은 들어가면서 좌측에 4칸의 광채를 달아냈고, 우측으로는 5칸의 안채가 있다. 안채는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의 순으로 조성을 했는데, 건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두었다.

 

 

안채 부엌의 앞에로는 돌우물을 마련해, 부엌을 사용하는 주부들의 이용에 편리할 수 있도록 동선에 신경을 쓴 듯하다. 안채 뒤편에는 장독대를 두었으며, 마당 가운데에는 작은 화원을 마련하였다. 집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양반가옥의 기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집이다. 신경섭 가옥을 찾았던 날이 106일 보령시 답사 때였으니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 쪽문으로 출입을 했을까?

 

집안을 한 바퀴 돌면서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와 굴뚝을 찍고 있는데, 곁에 작은 쪽문 하나가 보인다. 마침 문이 열려있기에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또 하나의 쪽문이 있다. 문에는 모정문(母情門)’이라고 쓴 작은 나무패가 걸려있다. 어머니의 정을 그리는 문일까? 그 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문의 명칭을 정한 것일까?

 

 

이렇게 작은 문 하나에는 많은 사연이 있을 듯도 한데, 물을 사람이 없으니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그 모정문 밖에 효자정려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으로 사랑채로 드나들면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택을 찾아다니면서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기만 하다. 그래서 더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미디어 다음이 주관을 하고 수원시가 후원한 ‘2013 수원 생태교통 팸투어’가, 8월 17일(토)과 18일(일), 이틀 동안 수원시 일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들 각처에서 모인 파워소셜러들은 생태교통의 시범지역인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을 돌아보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그 외에도 무궁화축제장, 광교저수지 수변길, 수원천, 영동시장 2층에 소재한 작가들의 공방인 아트포라 등도 함께 돌아보았다.

 

17일 오전 10시에 수원시청에 집결한 파워소셜러들은 모두 10명으로 서울의 장유근(보라미랑), 조윤희(네이버. 초희)와 경기지역의 신명숙(네이버. 푸른느티나무), 안영란(네이버. 호수) 백정아(주리니), 충청 세종시의 김용택(참교육), 부산의 김욱(거다란), 전남 여수의 임현철(임현철), 제주의 임병도(아이엠피터), 그리고 하주성(온누리) 등이었다.

 

 

무궁화축제장부터 일정 시작

 

조금 늦게 도착한 두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은 수원시 인계동에 소재한 청소년문화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궁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열심히 묻기에 바쁜 소셜러들. 벌써 3번 째 팸투어에 참가를 한 보라미랑님은 그만의 노하우를 살려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소셜러들 중애 좌장인 참교육님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열심히 촬영을 하고, 나중에는 수원시 입북동에서 생산하는 명아주 지팡이까지 구하셨다. 뒤늦게 도착한 거다란과 임현철까지 모두 10명의 파워소셜러들은 15인승 버스를 이용해 장소를 광교저수지로 옮겼다. 광교저수지의 수변 길을 걸어보기 위해.

 

 

수변 길의 아름다움에 반한 소셜러들.

 

광교저수지 입구 반딧불이 화장실 앞에 하차를 한 소셜러들은, 목책으로 조성한 수변 길을 걸었다. 한편은 광교저수지가, 또 한편은 벚꽃나무가 머리까지 닿는 길을 걸으면서 연신 감탄을 하기도. 목책 길을 걷고 난 뒤에는 저수지 옆 산길인 지게 길을 걸었다. 친 자연적인 흙길인 수변 길을 걸으면서 연신 카메라에 담기 바쁜 소셜러들.

 

내년 봄에 벚꽃이 필 때 꼭 다시 한 번 이 길을 걷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수원에 오면 반드시 이 산 밑으로 난 지게 길을 다시 걷겠다는 사람들. 그들은 광교저수지 수변 길의 아름다움에 빠져있었다. 한 시간 30분 정도를 걷고 난 일행은, 이틀간의 공식 일정의 첫 식사를 광교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겨먹는 보리밥과 파전, 감자전 등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생태교통 지역으로 들어가다.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은 숙소인 행궁 앞 사랑채에 집을 풀고, 인근에 있는 생태교통추진단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김병익 단장으로부터 생태교통 영상과 생태교통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갖기도. 일행은 이런저런 질문을 한 후에 생태교통 시범지역인 행궁동 일원을 돌아보았다.

 

“일개 도시가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실행한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생태교통은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중요한 일이지만, 2200대나 되는 차량들은 시범지역 밖으로 빼내 주차장에 세우고, 걷거나 자전거 등을 이용해 이동을 해야 한다니 정말 엄청나네요. 주민들의 불편과 반대를 이겨내고 이렇게 이루어낸 수원시가 정말 대단하단 생각입니다.”

 

 

한 소셜러는 연신 시범지역을 돌아보면서 수원시민들이 정말 부럽다고 한다. 이런 대단한 사업을 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수원시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부럽다는 것이다. 두 시간에 걸쳐 돌아본 생태교통 시범지역. 곳곳을 사진에 담아 낸 일행은, 숙소에 들어와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피곤한 다리를 쉬기도.

 

염태영 수원시장도 소셜러들과 함께 자리해

 

오후 6시 소셜러 일행은 행궁동에 자리한 30년 전통의 수원갈비 집에서 양념갈비로 저녁을 먹었다. 이 집은 참숯에 갈비를 초벌 구워내는 독특한 조리법으로 유명한 집이다. 20여 분이 지나 염태영 수원시장이 소셜러들과 함께 자리를 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간담회에서는 생태교통을 유치한 이유와, 추진 상황, 그리고 어려움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소셜러들은 염태영 수원시장에게

“정말 존경스럽다. 막상 블로그 등을 통해 소식만 전해 듣다가 이렇게 실제로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린다는 행궁동을 와서 돌아보니, 이런 프로젝트는 어느 지자체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원이라는 도시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수원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렇게까지 만들기 위해 시장님과 담당자들의 고통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며 박수를 치기도.

 

다음 일정으로 먼저 자리를 뜬 염태영 수원시장을 배웅한 일행은 야간에 화성 행궁을 돌아보는 것으로, 첫날의 공식일정을 모두 마쳤다. 배정 받은 방으로 들어가 여장을 푼 일행은 다시 한 번 생태교통의 진척상황이 놀랍다면서, 꼭 성공하기를 기원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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