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는 답사라는 특성상 날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그때그때 답사를 해서, 날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 기사가 일반적인 뉴스의 생성과 달리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2박 3일 정도 답사를 나가게 되면, 15~20점 정도의 문화재를 담아오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마을에서 조금 위편에 보면, 경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일대가 바로 승안사지이다. 승안사지는 통일신라 때 상당히 번창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승안사는 성종 12년인 1481년에 편찬된 『둥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어 있는 절이다.

 

승안사지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12월이 다 지나기 전에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승안사지다. 좁은 길로 마을들을 이리저리 지나 도착한 승안사지. 이곳에는 보물 제294호인 승안사지 삼층석탑이, 석불좌상과 20m 정도 떨어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고 300여년 정도가 지난, 정조 23년인 1799년에 발간된 『범우고』에는 승안사지가 사라지고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승안사는 언제 무슨 일에 의해서 사라진 것일까? 현재 있는 석불좌상의 크기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의 거대불로 보인다. 고려시대 때에 이렇게 큰 거대불을 조성한 이유는 북벌의 상징이다.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세월의 흔적이 아닌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서 파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안사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비례가 맞지 않아 어색한 석조여래좌상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 많은 석조문화재가 조성이 되었다. 그 중에서 석조불상과 석탑 등은 상당수에 이른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역시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어 본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머리는 민머리인 듯한 이 석조여래좌상은 모든 비율이 제대로 맞지가 않는다. 눈은 움푹 들어간 듯 보이며 코가 유난히 크다. 얼굴이 길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다. 여래좌상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석인과 같은 모습에 가깝다. 좁은 어깨로 인해 전체적인 체구는 왜소해 보이며, 유난히 큰 코와 일자로 꽉 다문 입으로 인해 엄격한 인상을 풍긴다.

 

목 부분이 떨어진 것을 붙여놓은 자국이 남아있으며,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쳤다. 옷의 주름도 사선으로 비스듬히 나타나고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성의 비례가 잘 맞지가 않아 어색해 보인다.

 

잘린 팔과 사라진 하반신

 

이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거기다가 좌상의 발 부분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현재 좌상의 다리 부분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심하게 훼손이 된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거대한 석불의 팔과 다리 부분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훼손이 되었을까?

 

 

조선조 성종 12년 부터 정조 23년 사이에 이곳에 어떤 재난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융성하던 승안사라는 사찰이 사라지고, 이렇게 거대석불이 심하게 훼손을 입을 것을 볼 때, 어떠한 재난을 당했다는 것을 추정할 뿐이다. 기록문화에 약한 우리의 문화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바로 이런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겨 후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에, 바쁜 답사 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남원으로 와서 생활을 한지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정작 남원 밖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자주 하던 남원 답사를, 정작 남원으로 내려와서는 등한시 한 듯하다.

8월 2일. 일과를 마치고 6시가 넘어 답사에 나섰다. 두어 곳 돌아보려니 하고 나선 길이다. 남원에서 곡성으로 나가다 보면,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65번지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곡성으로 나가는 길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좁은 하천 곁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

마을 진입로를 들어서니 석불입상의 위부분이 보인다. 주변은 비닐하우스와 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려 때는 거대석불을 많이 조성하였다. 아마도 고려의 숙원인 북진정책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불상이나 석탑, 그리고 절 등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古土)를 찾겠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지당리 석불입상을 처음 보는 순간에 느낀 점은, 장중하다는 생각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그 당당한 모습은 사람을 압도한다. 지당리 석불입상은 하나의 돌에 광배와 불신, 대좌를 새긴 불상이다. 현재 높이는 3.63m 정도이지만, 땅 속에 뭍인 대좌를 감안하면 4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광만 조각을 한 특이한 형태

지당리 석불입상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다. 상투가 너무 커서 투박해 보이는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좌우대칭으로 곡선을 그리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법의는 가슴부분을 깊게 파 뚜렷한 U자형의 표현을 굵게 하였다.

이 석불입상의 어깨는 1.15m로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다. 양 팔에 걸쳐진 소맷자락은 발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머리 부분만 광배로 표현을 하였다. 두광의 지름이 1.82m 정도로 상당히 크다. 머리광배의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둘레에는 원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석불입상의 두 팔은 어디로 갔을까?

머리광배에 있는 연꽃무늬 등 세부표현은 상당히 간략화 되어 있어, 섬세함을 잃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볼 때 인근에 있는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 석불입상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불상의 체구가 거대하고, 조각기법이 대담하고 거침이 없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당당한 고려의 기개를 상징하듯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밭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석불입상. 그 보호철책 밭으로는 석물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예전 절터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한 가지 이 석불입상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두 팔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팔을 끼웠던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팔이 있었다고 하면 좀 더 자세하게 이 석불입상의 존재를 알만한데, 팔이 사라졌음이 아쉽다.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렇게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아쉬움이 사라지는 날은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문화재 답사를 계속하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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