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고인돌길'.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난 이 길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이 길은 지방유형문화재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답사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우연히 붙인 이름이다. 그저 뒷짐을 지고 몇 바퀴를 돌기에 적당한 길이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자연과 문화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길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보면 행운이란 생각이다.

 

그저 혼자 40분 정도를 걷다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용도길, 화양루길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적당한 이름이 '팔달산 고인돌길'이란 생각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놓고 혼자서 싱글거린다. 지나는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지고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팔달산 고인돌길', 이름 어때요?

 

나름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즈음 조금만 경치가 좋아도 사람들은 길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나야 길 전문가도 아니니, 구태여 길에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람의 본이 바로서질 않는다는 생각이다.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9월 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작은 손 카메라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비가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두둑’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자연의 소리일진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구태여 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을 듯한 경사이다. 조금만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지석묘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를 비켜나면,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쌓은 화성의 용도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그보다는 지석묘를 알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용도길'이나 '화양루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이 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양루와 그 옆에 용도 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 안으로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그저 '고인돌길'이란 명칭이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지석묘군을 지나면 용도의 끝에 마련한 화양루가 보인다. 이 길은 온통 암반이다. 이곳의 돌들은 과거에 화성을 쌓기 위해 성돌을 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를 잘 살펴보면 돌을 쪼아낸 흔적도 보이고, 성돌로 사용함직한 크기의 돌도 보인다. 그 바위와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길 위에 화양루와 용도가 보인다.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길

 

용도의 성벽을 우측으로 두고 천천히 걷는다. 용도 안에서는 용도가 꽤 높이 쌓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용도를 끼고 걸어보니, 이렇게 낮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전에는 성벽 밑이 가파른 비탈이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길이 생겨났다. 조금 걷다보면 용도서치를 지나고, 잠시 후 서남암문 위에 올려 진 서남포사가 보인다.

 

 

서남포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은 노송 숲이다. 비가 내리는 날 숲속에서 맡아보는 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누군가 돌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지석묘.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시간이 4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그 길을 반복해서 지나는 분에게 몇 바퀴나 도느냐고 물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단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팔달산 고인돌길의 멋이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 있나? 괜히 그 길에 취해 멈춰 선다. 저만큼 비에 젖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 또한 자연이란 생각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지고, 화성을 손으로 느껴가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길이 나는 좋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디를 가든지 나가야만 한다. 답사를 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오늘(9월 4일)은 준비를 하는 일이 있어, 멀리는 못가고 가까운 화성 외곽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후 2시 경에 집을 나서 화성을 반 바퀴 돌았다. 그런데 낭패가 있나, 카메라에 경고 등이 들어오더니 배터리가 떨어졌단다.

 

이럴 때 난 늘 감사를 한다. 요즈음에는 아이폰으로 촬영을 해도 쓸 만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절반만 돌기고 작정을 하고 나갔으니, 당황을 할 필요도 없다. 화성 남쪽의 용도부터 화서문(서문) 까지 걸었다. 이미 바짓가랑이는 다 젖어버렸다. 신발 안에도 물이 들어와 질퍽거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십년 넘어 만나는 반가운 친구의 부탁

 

“예, 하○○입니다”

“야, 임마 나다”

“누구신데요?”

“야, 나 신○○이야, 그저께 한국에 나왔다”

“정말이냐 그럼 진작 연락하지 그랬냐.”

“아버님 묘소에도 찾아뵙고 그러느라고. 너 전화번호 바뀌는 바람에 애 먹었다. 너 지금 어디냐?”

“나, 지금 화성 돌고 있는데”

“야. 너한테 ○○이 하고 가는 길이다”

 

이런 친구 녀석들이라고는. 십년이 훌쩍 지난 다음에 한국에 나왔다고 찾아온단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가관이다.

 

“부탁 하나하자”

“먼데?”

“야, 한국에 들어와서 매끼 식당에서 먹었더니 죽겠다. 네가 밥 한 그릇 해줘라”

“미친 놈, 내가 어떻게 해줘. 가정식 식당 데리고 갈게”

“필요 없다. 그냥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밥이나 해줘라”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머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밥을 해줘. 그러면서도 시간을 보니 한 시간 반 정도 밖에 여유가 없다. 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냉장고부터 열어본다. 마땅히 음식을 마련 할 것이 없다. 두부 한모, 명태포, 어묵, 감자 몇 개, 참치 한 통. 그것이 다이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망설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십 수 년 만에 한국에 나온 녀석인데 그냥 김치라도 우리 것을 먹이고 싶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녀석이라 형제 같은 놈이다.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잠도 같이 자고는 했던 녀석이다.

 

친구녀석을 위해 준비한 상차림

 

참 이것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냥 있는 찬만 갖고 먹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미안한 감도 있다. 우선 있는 것을 갖고 준비를 시작했다.

 

 

 

1. 명태포 계란국

① 우산 명태포를 잘게 잘라 물에 불렸다. ② 그리고 청양 고추를 하나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가급적이면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너무 짠 것을 피하기 때문이다. ③ 끓고 있는 동안 밥을 앉혔다. ④ 물이 끓을 때 미리 준비한 계란을 넣고 저어준다. 그렇게 동태포 계란국이 완성이 되었다.

 

 

2. 어묵감자볶음

① 감자와 어묵을 채썰기를 한다. ②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약한 불에 볶아준다. ③ 너무 타지 않게 볶다가 통깨를 조금 넣어준다. 간은 소금으로만 맞춘다. 소금은 1,000도에서 구운 소금을 사용하다.

 

 

3. 두부와 소시지 부침

① 두부와 소시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계란에 담갔다가 프라이팬에 부친다. ② 간은 미리 계란을 풀을 때 맞추어 둔다. ③ 너무 타지 않게 적당히 익힌다.

 

 

4. 참치 김치찌개

① 언제나 빠지지 않는 나의 주 메뉴이다, 굳이 많은 반찬이 필요하지 않다. ② 김치와 참치통조림을 함께 넣고 된장으로 간을 맞춘다. ③ 고춧가루를 조금 풀어 매콤하게 만든다. ④ 팔팔 끓을 때 떡을 조금 넣어준다.

 

있는 자료를 갖고 준비한 음식이다. 그런데 참 블로그가 무엇인지. 요리하랴 사진 찍으랴 하다가 보니 땀이 줄줄 흐른다. 그리고 집에 있던 찬인 김치와 깻잎, 명란젓과 조개젓, 무장아치, 김을 차려 놓았다. 보기에는 그럴 듯하다. 한 시간이 좀 더 걸렸나 보다.

 

 

단 두 녀석이 왔다 갔을 뿐인데

 

준비를 마치고 나니 두 녀석이 들이닥친다. 하도 허겁지겁 준비를 하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두 녀석은 연신 ‘고맙다’와 ‘맛있다’를 연발한다.

 

“야, 너 옛날 음식솜씨 안 변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먹기나 해라“

“그런데 이제 사람 필요하지 않냐, 언제까지 혼자 밥 해 먹을래?”

“됐네, 이 사람아”

 

농을 할 정신은 있다. 전화가 울린다. 연신 “예, 예”를 연발하더니 수저를 놓자마자 올라간단다. 사업차 왔는데 시간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야, 네가 내일 서울로 올라와라”

“시간이 어찌 되려나 모르겠네.”

“너 안 오면 내일 또 밥 먹으로 온다.”

 

 

그렇게 두 녀석은 가버렸다. 전쟁이 따로 없다. 단 두 녀석이 왔다갔을 뿐인데, 그릇이 산더미다. 내일은 어디 멀리 답사를 가던지 해야겠다. 이왕이면 저 녀석들을 끌고 갔으면 좋으련만.

공연시작 5분 전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공연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주변 비를 피할 만한 곳으로 달려간다. 그래도 사람들은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다. 우비를 한 장 씩 받아든 사람들은, 다시 젖은 공연장으로 모여들었다. 아마도 공연장에 덩그렇게 놓인 채 비를 맞고 있는 뒤주가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좁디좁은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의 몸부림은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 좁은 통 속에서 몸조차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벽을 긁어대는 모습이 유리로 된 벽을 통해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인다. 객석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200여 년 전 뒤주 속에 갇혀 숨을 거둔 사도세자도 저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행위예술가 김석환과 부토무용가 서승아가 마련한 '사도세자의 환생'. 수원화성국제연극제의 일환으로 열리는 마당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퍼포먼스 공연이다

 

 부토춤의 일인자인 서승아가 뒤주 안에 들어가 사도세자의 고통을 몸짓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도세자의 몸부림을 그대로 형상화한 부토무용

 

사람들에게 약간은 생소하기도 한 ‘부토[舞踏]’란 1960년대에 시작된 일본 현대무용의 하나이다. 부토무용에서는 배우의 몸과 표현이 분리되지 않는다. 평론가 심정민은 「부토는 ‘일어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시체다’라는 히지카타의 말이 대변하듯. 뒤틀리고 오그라들고 깡마르고 약하고 병들고 늙은, 그러므로 아름답기는커녕 건강해 보이지도 않는 몸을 표현한다.」고 했다.

 

한국 최초의 부토무용가이자 부토극단 천공요람의 대표인 서승아(여, 48세)와 서울국제행위예술제 운영위원인 김석환(남, 54세)이 수원화성국제연극제의 마당극 부분의 대미를 장식하는 퍼포먼스인 ‘사도세자의 환생’을 마련했다.

 

행위예술가 김석환은 커다란 비닐자루 안에 들어가 연희를 한다. 그 옆에 뒤주가 보인다

 

 비가 쏟아진 뒤에 관객들은 우의를 입고 관람을 하고 있다

 

김석환과 서승아는 때로는 둘이 되고, 때로는 하나가 된다. 두 사람은 영혼과 영혼이 만나 사도세자의 환생을 돕는다. 연꽃 한 송이는 사도세자의 환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의 연기 속에서 사도세자는 다시 살아나 걸어 나온다. 200년 전에 뒤주에서 처참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영혼을 불러내어,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하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공연이다.

 

오히려 관객들까지 고통스러워

 

40분 간의 공연을 보면서 관객들은 스스로가 뒤주 속에 갇힌 사도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환생을 한 사도세자를 공연마당에서 만나게 되면서 다시 깊은 고통 속에 빠져든다. 부토무용, 그것은 춤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을 이용한 대단한 몸짓이었다. 그야말로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행위예술가 김석환이 뒤주 속의 사도세자를 불러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뒤주 안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가 뒤주를 나왔다. 환생을 의미한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쏟아진 비로 공연장은 온통 물바다였다

 

환생을 한 사도세자의 몸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뒤주 안에서 움츠려진 채로 생을 마감했으니, 뒤주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펄펄 날수는 없었을 것. 오히려 그런 서승아의 부토무용이 사도세자의 환생을 표현하는 데는 제격이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서승아의 몸짓은 관객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녀의 몸짓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도세자의 고통을 함께 느꼈기 때문이다.

 

부토무용의 대가 서승아에게 빙의 된 사도세자의 고통

 

마당공연장의 바닥은 빗물에 젖어있다. 그러나 그 빗물 속에서도 서승아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빗물을 이용해 극을 더 윤택하게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휠체어를 타고 있던 어르신에게 다가가, 공연장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그 분의 다리가 되어드렸다. 관람객조차 그대로 공연의 배우가 되는 순간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할머니를 모시고 나온 서승아. 행위예술에는 관객들도 곧잘 배우가 된다

 

 부토무용의 일인자라는 서승아가 사도세자의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장안공원에 되살아난 사도세자는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뒤편에 있는 노대 형상물 꼭대기에서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있었다. 그런 구조물까지도 이들에게는 훌륭한 무대장치가 된 것이다. 이런 모든 돌발적인 행동은 각본에 있던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생각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행위예술을 마친 부토무용가 서승아. 온 몸으로 표현을 한 사도세자의 아픔으로 인해 그녀의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블록이 깔린 마당공연장에서 뒹굴다 보니 생긴 상처였다. 그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옷 밖으로 벌겋게 배어나왔지만, 그녀의 몸짓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일그러진 몸에서 자유를 찾은 사도세자는 그렇게 훨훨 날아가 버렸다.

 

공연장 뒤편에 설치된 노대의 모조형상물 위에서 서승아는 날개를 얻었다. 200년만에 환생한 사도세자는 그렇게 자유를 얻었다.

아침부터 참 지겹게도 쏟아 붓는다. 잠시 길을 걸었을 뿐인데,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어릴 적 생각이 나곤 한다. 비가 내리면 좁은 뒷골목을 다니면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일부러 맞고 다녔다. 아마 그런 어릴 때의 기억이 있어, 이상하게 뒷골목에 정이 더 가는 것만 같다.

 

사실 뒷골목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높지 않은 담이 만들어주는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훈수를 막아가며 장기를 두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할머니들이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는 구수한 옛날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곁에서 듣다가 보면, 어느새 손녀는 잠이 들어버린다.

 

 

 

그림들의 이야기가 있는 지동 뒷골목

 

수원시 팔달구 지동은 화성을 바라보며 마을이 형성이 되어있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을 지나 게이트볼장을 끼고 걷다가보면, 골목 담장에 그림들이 보인다. ‘지동 벽화길’이란다. 이곳은 추억의 골목길 축제를 여는 곳이기도 하다. '골목길 축제'란 그야말로 골목길에서 열리는 축제를 말한다.

 

2011년 ‘지동 마을 르네상스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해 8월부터 ‘수원화성과 지동 골목길 반가운 동행’이라는 주제로, 시범골목 약 1km의 구간에 골목의 특색을 살린 벽화 그리기와 조형물들을 설치하였다. 이 지동 뒷골목의 벽화그리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이 그림들이 다 완성이 되고나면, 수원의 새로운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으려는지.

 

 

 

돌계단을 내려 서 천천히 벽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벽에는 수많은 군상들을 만날 수가 있다. 다양한 모습으로 조형을 하고 화장을 한 벽들이,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한 벽에는 거울을 여기저기 붙인 곳도 있다. 지나는 행인들이 자기 키에 맞추어 들여다보길 원하는 것인가 보다.

 

“할머니 거기 문 없는데, 어쩌시려고”

 

여기저기 작은 의자와 아름답게 그린 그림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누군가 담벼락에 커다랗게 초가 집 한 채를 그려 놓았다. 아마도 그런 시골마을의 초가집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천천히 골목을 지나본다. 어릴 때 살던 서울의 집도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벽을 참 다람쥐처럼 타고 오르기도 하고, 성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다 발목을 접질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 가끔 이 골목을 걷는다.

 

 

지난 해 골목축제 때 모습이다

 

어느 집인가는 벽에 커다랗게 화성을 그려져 있다. 200자 원고지 한 장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골목을 걷는데 웬 할머니 한분이 계단을 올라 벽 앞에 서 계시다. 그런데 벽에 문이 보이질 않는다.

 

“할머니 거긴 문이 없는데 어쩌시려고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신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 귀가 어두우신가?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역시 반응이 없으시다. 이런 나를 지나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신이상자로 착각을 하지는 않을까? 피식 웃는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어째 이런 재미있는 뒷골목 길을, 그렇게 골목에 샛바람 지나듯 휑하니 가버리는 것일까?

 

 

 

오랜만에 지나가본 길에는 그림이 더 늘었다. 어느 집 담에는 예쁜 의자도 함께 마련을 해주었다. 이런 작은 뒷골목에 늘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야하는데, 더운 날씨 탓인가 기척이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며 걸어 온 골목길을 뒤돌아본다. 벽 앞에 선 할머니는 아직도 꼼짝 않고 그곳에 서 계시다.

한 때는 수많은 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구도자의 글을 모색하며, 사시사철 변하는 구룡령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속초에서 옛 속초비행장 앞을 지나 구룡령을 향해서 가다가보면 구룡령 초입 못 미쳐 좌측으로 선림원지 이정표가 보인다.

 

사람들에게는 ‘미천골’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곳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속한다. 미천골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가족들이 휴양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과 가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하루를 즐기고는 한다. 미천골에는 선림원이 있던 사지가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 흥성한 선림원

 

선림원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의 발굴에서 나타난 많은 유물유적들 발견이 된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선림원은 804년경에 순응법사 등이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대에는 선림원에서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씻은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흘러 미천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선림원이 10세기를 전후해 산사태와 대홍수로 매몰되었다고 추정한다. 요즈음 강원도에 내린 집중호우로 근동이 홍수와 산사태가 나서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보아도 선림원의 산사태의 매몰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선림원지에는 현재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4점이 남아있어, 9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돋을새김한 팔부중상은 곧 걸어 나올 듯

 

선림원지에서는 1948년에 명문이 적힌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선림원이 얼마나 큰 절이었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지금 남아있는 문화재를 보고 유추할 뿐이다. 축대를 쌓은 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444호로 지정이 된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2층으로 되어있는 기단은,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2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두기씩 8부중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며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5단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화려한 장식을 한 석등, 특별한 미를 지녀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 보물 제445호 석등은 선림원지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파편이 된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 탑비 귀부 및 이수는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이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의 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와 몸돌, 이수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몸돌은 파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파편을 본을 삼아 재현된 몸돌이라도 현장에 있었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귀부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기법이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몸돌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이수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은 용

 

보물 제447호인 선림원 부도는 일제시대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신라의 전형적인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정사각형으로 조성된 받침돌 위로 기단의 하단, 중단, 상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도는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부도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쌀뜨물이 계곡을 메웠다는 선림원. 그런 이야기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대웅전의 초석으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 이야기다. 이곳을 벗어난 인근 어디에 또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맑은 물이 흐르는 미천골 계곡. 도대체 얼마나 쌀을 씻어야 저 계곡을 다 뿌옇게 물들일 수 있을까? 지난 역사 속의 선림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역사는 그렇게 스러져가도, 그 역사의 흔적은 이리 남아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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