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대구 팔공산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팔공산 갓바위가 아닌 목포에 있는 갓바위를 말하는 것이다. 목포 갓바위가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이 된 것은 2009년 4월 27일이니,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그저 목포의 명물인 갓바위 정도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갓바위를 찾았을 때는 관람을 위해 바다 위로 가설한 통로가 없었다. 이번 답사 길에 가보니 갓바위를 관람할 수 있는 통로가 개설이 되어 편리하게 볼 수가 있었다. 갓바위는 목포팔경 중의 하나다. 중바위라고도 부르는 이 바위는 오랜 세월 자연적인 풍화작용과 파도와 해류 등에 의해 바위가 침식되어 만들어진 자연의 걸작품이다.

 

자연이 만든 희대의 걸작품

 

자연이 스스로 이리도 신비한 풍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치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갓바위'. 풍화혈인 이 갓바위는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을 갖고 있다.

 

 

 

갓바위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옛날부터 전해지는 전설에 기인한다. 옛날에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가는 한 젊은이가 살았다. 비록 생활은 궁핍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 젊은이는 부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부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양반 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였단다.

 

그러나 주인이 일을 한 품삯을 주지 않자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부친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설이라는 것이 전해지면서 빠지기도 하고, 보태지기도 한다. 젊은이는 부친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을 슬퍼하다가, 이 곳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부친의 묘를 쓰려고 하였단다.

 

 

아버지바위와(위) 아들바위(아래)

 

슬픈 전설을 간직한 갓바위

 

바닷가에 온 젊은이는 잘못하여 관을 바다 속으로 빠트렸다. 이 젊은이는 그때부터 '불효자는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하여 갓을 쓰고 슬퍼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그 자리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랐는데, 큰 것은 ‘아버지바위’ 작은 것은 ‘아들바위’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과 아라한이 영산강을 건너려고 이곳에서 잠시 쉬다가 갓을 벗어놓고 갔는데, 그것이 바위가 되어 이 바위를 ‘중바위’라고 한다는 것이다. 전설이야 어찌되었든 이 바위는 예사롭지가 않다. 갓바위를 마주하며 오른쪽 바위는 남성의 힘이 느껴지고, 왼쪽의 것은 여성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여성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왼쪽 바위가 오른쪽 남성의 바위에 어깨를 기대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도 보인다. 전설처럼 아버지에게 기댄 아들인지, 아니면 아들의 어깨에 몸을 의탁한 아버지의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개의 바위가 어우러져 신비함마저 느끼게 한다.

 

갓바위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다

 

먼 길을 달려 찾아간 갓바위. 예전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주변 경관에 조금은 낯이 설기도 하지만, 갓바위 가까이 다가가 훼손할 염려가 없으니 다행이란 생각이다. 두 개의 바위가 11월 중순의 찬 바닷바람에 움츠리고 있는 듯도 하다.

 

 

갓바위 앞에 마련된 관람 길 밑에는 작은 바닷고기들이 한가롭게 유영을 하고 있다. 아마 갓바위가 뒤늦게나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축하라도 하는 것인지. 바람결에 선 갓바위는 슬픈 젊은이의 전설을 간직한 채, 저만치 앞을 지나는 배라도 보고 있는 것인가? 곁에서 보면 영락없는 갓을 쓴 모습으로 보이는 갓바위를 보면서, 우리 자연의 오묘함을 또 한 번 깨닫는다.

 

그러한 아름다운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폭파해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의 후손들에게 참 못난 선대라는 오명을 벗지는 못할 듯 하다. 갓바위를 보면서 푸른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 그동안 세상을 헛살았다는 반성을 해본다. 바람이 찬 방에서 괜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그동안 세상을 살아 온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게 만든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나이가 먹긴 먹었구나.’하는 대답이 맞을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고 펑펑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다. 왜 그토록 긴 시간을, 한 번도 내가 정말로 불효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까? 매번 효가 어쩌고저쩌고 입만 벌리면 떠들어 대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얼마나 불효를 하고 있는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효를 깨우쳐주는 구례 화엄사 효대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 몇 번이고 찾아갔으면서도 반성을 하지못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를 하다니


날이 춥다. 이 추운 날에 괜히 날이 춥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추운 날씨에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생각이다. 그 추운 날 부모님들은 어떻게 사셨을까?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보아서 늘 감싸주셨다. 그런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주변에 지인들이 요즈음 왜 그런 말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었거나, 나이가 먹었거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고통스럽다가 보니, 그 고통보다 몇 배나 더 힘든 고통을 참아가며 살아오셨던 분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닥쳐보아야 안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 때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참 무던히도 속을 썩여드렸다. 하라는 것은 마다하고 내가 좋아라 하는 일만을 고집스레 해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무리 철이 없는 나이였다고 하지만, 좋은 직장을 말 한마디 없이 그만두고 나와 방황을 한 것이 30년 세월이 지나버렸다.



뒤늦은 후회, 그러나 눈물을 닦아줄 부모님은...


이제 나이 60이 넘어서 그토록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후회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으로 통곡을 한들 어찌 할 방법이 없다. 그 통곡을 들어줄 분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분들도 안계시니. 참 바보스럽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후회해보지만, 이렇게 때는 늦어버렸다는 것에 머리를 쥐어뜯고만 싶다.


음력으로 내일이면 한 해가 저문다. 늘 음력의 생활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2월 3일 설날이 오기 전인 내일이라도 아버님 묘역을 찾아보아야겠다. 그곳에서 지난 시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잘못이라도 빌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가지 내가 살아 온 세월이 정말로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이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그런 생각이 아니다. 그저 몇 날이 남았거나 이제는 달리 살고 싶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로 인해 작은 상처라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잘못을 빌고 싶다. 올 한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입을 다물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설을 맞이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부모님께조차 불효를 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허허로운 마음 하나 짊어지고 가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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