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일(목)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9시부터 열린 세계순례대회의 시작은 4대 종교의 지도자들과 김완주 전라북도 도지사, 전주시장, 김제시장, 완주군수 등의 지자체장들이 모여 총 240km인 600리를 걷는 순례대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 순례길은 각 종교의 역사적인 지역을 연계하는 길로 11일 순례포럼과 전북도청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닫는마당까지 이어졌다.

 

11월 1일(목)에는 1코스인 한옥마을~송광사구간인 26.1km를 원불교 전북교구장인 고원선 교무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소태산 대종사를 기억하며’린 부제를 달고 있다. 11월 2일(금)에는 2코스 송광사~천호구간으로 27.1km 에 달한다. 금산사 회주인 도영 큰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벽암대사를 기억하며’라고 부제를 달았다

 

가수 김태원이 스님짜장을 볶고 있다(위) 빼마 친조르(Pema Chinjor) 티베트망명정부 종교문화부장관도 함께 짜장을 볶으면서 즐거워하고(아래)

 

11월 3일(토)에 걷는 3코스는 천호~나바위 구간으로 24.1km 달하며 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총무인 이영춘신부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며’라고 했으며, 4일 째인 11월 4일(일)에는 4코스인 나바위~미륵사지까지 23.6km를 이상원 길 매니아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허 균을 기억하며’로 테마를 잡았다.

 

11월 5일(월)에는 5코스인 미륵사지~초남이 구간 25.5km 걸었으며, 원광대 나종우 교수와 지광 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주왕을 기억하며’란 부제를 달았고, 11월 6일(화)의 6코스는 초남이~금산사로 25.9km에 달한다. 이 구간은 백남운 목사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진표율사를 기억하며’이다.

 

11월 7일(수)에 걸은 7코스는 금산사~수류의 14.5km의 순례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7대 교구장인 원행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처영대사를 기억하며’ 란 주제를 갖고 있다. 11월 8일(목)에는 8코스인 수류에서 모악산까지 21.2km의 걷기구간으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이었다.

 

 11월 10일 전주 승암산(치명자산) 광장에 모인 순례단(위) 김태원과 4대종교지도자들이 순례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아래)

 

11월 9일(금)에는 9코스 인모악산에서 전주 한옥마을까지 27.5km를 전주지역 장로교 연합회장인 박진구 목사와 천주교 전주교구장인 이병호 주교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선교사들을 기억하며’라고 하였다. 11월 10일(토)에는 어울림 큰마당인 순례 음악회로 꾸몄는데, 승암산(혹은 치명자산) 광장에서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부활의 김태원 등도 함께한 순례길

 

10일 승암산(치명자산) 광장에는 그동안 걸어 온 순례길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이 날은 종교지도자들이 순례를 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의식도 함께 하였으며, ‘사람실은 스님짜장’으로 500여명의 순례단이 점심을 들었다.

 

 순례단의 발을 씻기는 원행스님(위)와 한 종교지도자가 김태원의 발을 씻기고 있다(아래)

 

아침 일찍 승암산 광장에는 차일을 치고, 짜장면을 볶을 솥을 걸었다. 짜장을 볶을 때는 순례대회에 참가한 빼마 친조르(Pema Chinjor) 티베트망명정부 종교문화부장관도 함께 짜장을 볶으면서 즐거워하기도. 부활의 김태원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짜장을 볶기도 해, 기자들의 열띤 경쟁을 불러일으키기도. 이 순례길에 참가를 했다는 이아무개(여, 42세 전주)는 이 날 행사가 정말 즐겁다고 한다.

 

“정말 이렇게 모든 종교를 망라하는 순례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전라북도는 모든 종교의 소통창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10일 동안 240km를 걸으면서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즐거웠지만, 오늘 이렇게 스님짜장을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입니다. 늘 이런 축제 때마다 함께 해 주시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순례기간 중 4회에 걸쳐서 1,200명 정도에게 짜장봉사를 한 운천스님(남원 선원사 주지)은

 

“이리저리 다니느라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부활의 김태원과 티베트의 장관까지 함께 동참을 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역시 봉사란 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남을 위한다는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아름다운 순례, 홀로 또 함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세계순례대회. 1만 여명이 넘는 순례객이 이 길을 걸었으며, 4대 종교가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감싸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순례대회의 대장정은 11월 11일 전북도청에서 가진 ‘세계순례포럼’를 끝으로 막을 내렸으며, 이 자리에는 김완주 전북도지사를 비롯해 이병호 주교, 박진구 목사, 원행 스님, 고원선 교무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재인청에 대해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자칫 재인청이라는 곳이 어떤 특정한 전통예술을 하던 것처럼 포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던지 재인청에 속한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고, 한 때는 모든 전통예술분야를 총괄하던 곳이 재인청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집단이었나?

 

물론 재인청은 ‘무부(巫夫=화랭이)’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재인청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고려조부터 전해진 교방청(敎坊廳)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조직이면서도 그 안에 화랭이, 광대, 단골, 재인 등 수 많은 예인들이 속해 있었으며 아주 엄한 규제가 있었다.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과 전라도에도 있었으며,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재인청의 수장은 대방이라고 하였으며 3도(경기, 충청, 전라)의 재인청을 당시 화성재인청에서 총괄을 했던 관계로,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대방과 도대방의 선출은 3명을 추천을 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

 

 

까다로운 규제 속에 생활을 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서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3만 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재인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지금도 경기도 내의 여러 곳에 보면 광대마을, 혹은 재인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난 날 군 재인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재인청이라는 곳이 춤을 추거나, 단지 소리를 하거나 하는 예인의 집단이 아니다. 재인청이란 한 마디로 3도에 있던 모든 예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 기, 예능조직이었다.

 

 

‘경기재인청’의 부활을 기대한다.

 

경기도의 모든 전통예술을 총 망라할 수 있는 경기재인청의 부활. 이제는 경기도 내의 재인청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이 되어야 할 때이다. ‘화성재인청’을 ‘경기재인청’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사유가 있다. 그것은 당시 화성에 재인들을 관리하던 수장인 도대방이나 무부들이 다수의 인원이 있었고, 아마도 재인청의 소재지가 화성 내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경기도 전체를 아우르는 그러한 대단위 재인청이 필요할 때이다.

 

그것은 재인청이 어느 특정 종목이 아닌, 전통예술 전 종목에 걸쳐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던 곳임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인청의 부활은 이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안이다. 그 길만이 경기도 내의 8만 전통예술인들이 하나의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물리적인 힘에 대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날 경기도의 전통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우던 재인청. 그 재인청을 재조명 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재인청은 굿을 하던 무부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기구였던 것이, 120여 년 동안 전국의 많은 예인들이 몰려들면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그 재인청의 몰락은 전통예술의 혼란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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