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99칸 고래등 같은 집들이 있다. 전북 정읍에 있는 김동수 가옥이 99칸이었으며, 경주 최부자집도 99칸이라고 했다. 그런데 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갈산중학교 인근에 자리한 충남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합한 99칸 반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용일 가옥에서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은, 예전에는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었다고 한다. 99칸 반의 대저택. 전용일 가옥의 주인은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지은 것일까?


99칸 반의 저택, 지방 토호의 상징인가?

99칸 반의 집이라니, 그 규모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의 집이었을 목조기와집은 지금은 안채 28칸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용일 가옥의 안채는 바람벽을 둔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청과 온돌방을 두고, 좌우의 날개채를 달아 남향을 향한 집이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ㄷ 자형을 띤 집의 구조지만, 사랑채가 떨어져 있어 튼 ㅁ 자형이다, 중문을 달린 중문채와 안채의 날개채 사이에는 쪽문을 낸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구조로 축조가 되어있다.




예전에는 100칸이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칸을 뺀 99칸의 집을 짓는 것이 지방의 토호들이나 세도가들이 집을 짓는 방법이었다. 일설에는 100칸의 집은 궁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대부가나 토호들이 100칸을 지으면 바로 모반이 된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99칸에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달아낸 99칸 반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 후원을 보아도 이 집의 세를 알만하다. 현재는 안채를 중심으로 네모난 대지위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안채만이 남아있지만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용일 가옥의 가세를 알기에 충분하다.



부재 등이 돋보이는 전용일 가옥

전용일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 건물에는 팔각 돌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석조 부재 등이 아직도 인근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운 건축물을 지었다고 하니, 아마도 지방의 사대부가들도 이런 집을 짓기가 어려웠을 것만 같다.

집안 곳곳을 살펴보면 이 집이 부재 사용법 하나서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쪽문의 문턱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를 한 전용일 가옥. 조선 후기 건축 기술과 세련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전용일 가옥은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대표적인 양반집이다.



홍성의 대부호 양반집으로 알려진 전용일 가옥. 영원한 세도는 없다는 옛 말이 실감이 난다. 한 때는 99칸 반의 대부호답게, 그리고 지방의 세력가답게 인근 근동에서 이 집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는 한다. 현재 남아있는 안채의 규모나 그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이 집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99칸 반의 영화로움은 사라졌어도, 그 자취는 집안 곳곳에 남아있다.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인 김동수 가옥. 호남 부농의 상징인 이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처음으로 집을 지은 해수로 따지면 226년이 되었다.

청하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정읍의 젖줄인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동수 가옥에는 대문채인 바깥사랑채, 사랑채와 중문채, 그리고 안채와 아녀자들이 외부의 여인네들과 만나서 담소를 즐기는 안사랑채가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외측이라는 건물과, 담 밖으로 지은 초가인 노비들이 묵는 '호지 집'이라고 하는 집이 여덟 채가 집 주위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중 두 채만 남아있다.

고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건축미를 보인다는 정읍 김동수 가옥 사랑채 

부의 상징인 김동수 가옥

고택 답사를 하다가 만난 김동수 가옥. 참으로 대단한 가옥이라고 생각이 든다.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장을 둘러, 그 안에 곳곳에 건물을 지었다. 한 채의 가옥이 이렇게 넓게 자리를 한 집은 많지가 않은 점도 이 집안 부의 내력을 알만하다.

김동수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밖에 자리한 호지집이다. 솟을대문을 약간 비켜서 한 채가 있고, 담 밖 전후좌우에 모두 여덟 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 채만 남아있다. 호지집이란 말이 생소하다. 김동수 가옥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고택을 답사했지만, 호지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동수 가옥 담 밖에 여덟채가 담장을 둘러 있었다고 하는 호지집.

노비가 살던 집이라고, 글쎄 그럴까?

이 호지집은 노비들이 기거를 하던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이 자리하고 있는 형태를 본다면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호지(護持)'란 수호하고 지켜낸다는 소리다. 또한 이 집들의 자리 배치를 보아도,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맞지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전후좌우에 두 채씩 배분을 해서 지었을까?

김동수 가옥은 부농의 상징이다. 집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을 보면 인근에 곡창지대가 자리하고 있다. 김동수 가옥을 둘러보면 이 집 안에 많은 곳간과 헛간들을 볼 수가 있다. 그만큼 많은 재물들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집안에 대문채나 중문채에도 방들이 있어, 굳이 담 밖인 외부에 몇 채의 집을 지어, 노비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는 것도 설들력이 부족하다.


김동수 가옥의 안채와, 대문채와 중문채 사이 한편에 자리한 외측

많은 양의 곡식과 재물이 있는 김동수 가옥은, 늘 도적을 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집을 짓고, 집을 수호하는 사병들을 기거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노비집’이라는 하지 않고, ‘호지가(護持家)’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 호지집에 묵는 노비들은 일을 하기 위한 노비이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경계의 업무를 지니고 있었던 사병들이 묵었다고 볼 수 있다. 사병을 양성한다는 것은 금지가 되어있는 시대에, 대신 노비라고 신분을 숨겼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호지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실 노비가 아닌, 노비로 가장한 김동수 가옥을 지키는 ‘사병(私兵)’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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