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사업이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인 줄 몰랐다. 몇 번을 실패를 거듭했을 때도 그 원론적인 방법조차 모르고, 또 다시 시작을 하고는 했으니 말이다. 서너 번 거듭되는 실패는 사람을 참담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는 힘이 부치는 정도가 아닌, 정말로 세상을 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2003년인가, 문화재 답사를 계속하다보니 무엇인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려줘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통예술신문>이라는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 타블로이드판으로 낸 이 신문은, 올 칼라 면으로 인쇄를 해 인쇄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광고로 운영을 해야 하는 신문은, 전통예술신문이라는 특성상 많은 광고가 붙지 않음은 당연한 일.

아우네 집 이층에 마련한 서재. 신문사를 하면서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정리가 되어있다. 이곳을 가면 언제나 이 서재에서 하루를 보낸다.


버티기 힘든 재정난으로 결국엔 문을 닫다

그렇게 겨우 2년인가를 버티었다. 그러나 매달 늘어나는 적자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할 수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신문사 사무실 보증금도 당연히 사라져 버리고, 급기야는 모든 물건을 처분한다는 통지서까지 날아들었다. 당시는 정말로 그런 것들조차 찾을 엄두도 못 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수원에 사는 아우한테서 연락이 왔다. 형 짐을 모두 찾아왔노라고. 신문사에는 컴퓨터며 복사기, 인쇄기 등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수많은 자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어 마음 아파하던 차에 온 연락이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란 생각이다.


소중한 자료들이다.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자료들을 아우가 찾아다가 정리를 해놓았다. 아직 짐도 풀지 않은 것들도 있다. 더 넓은 서재를 만들 때까지 그대로 놓아두라는 아우의 말이다.


정리를 해 놓은 서재, 좁지만 아늑해

그리고 얼마 동안은 아우네 집에 들르지도 못했다. 딴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가 늘 걱정을 한다. 몸이 아프면 딴 데 가서 고생을 하지 말고, 형 물건이 있는 집으로 오라고. 물론 피도 섞이지 않은 아우이다. 그런데도 살갑게 구는 것이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사람이 있는 곳을 떠나 길을 나섰을 때, 편하게 묵을 곳이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다.

언제나 찾아가기만 하면 편히 쉴 수 있는 곳.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이곳이 남의 집 같지가 않다. 신문사에서 사용하던 책들이며, 여러 가지 때 묻은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넓은 아우의 집 이층, 그 한편에 마련한 서재. 그곳에는 내가 고생을 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신문사 시절 찍었던 사진까지 그대로 정리를 해놓았다.


서재의 모습이다. 해가 잘 드는 곳에 꾸며놓아 항상 기분이 좋은 곳이다. 예전 신문사시절 사용하던 사진까지 그대로 갖다 놓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비록 사업에는 실패를 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얻었다는 생각이다.

“형님, 아프지만 마세요. 그리고 문화재 답사 다니실 때까지 열심히 하시다가, 이다음에 힘이 들면 언제라도 집으로 돌아오세요.”

아우의 말이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아우의 그 말 한마디였다.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라도 돌아오라는 아우의 말. 여기가 바로 형님이 살 곳이라는 그 한 마디가, 그저 답사의 어려움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전통예술신문의 내용. 올 칼라로 발행한 이 신문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많은 노력을 해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우리 문화를 알리겠다는 욕심 하나만으로. 


비록 사업에는 실패했지만, 그 대신 든든한 아우를 얻었다는 것. 어찌 보면 이 글을 쓰면서도 난 인생에 실패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귀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지금 힘들고 지친 모든 분들. 어쩌면 주변에서 이렇게 화이팅을 외칠 분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선림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기에, 쌀을 씻은 물이 앞을 흐르는 내를 모두 쌀뜨물처럼 만들었을까? ‘미천(米川)골’이란 명칭은 바로 쌀 한 끼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하류까지 흘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오대산 자락을 깊숙이 들어가는 곳에 자리한 선림원지. 이곳은 흥각국사가 804년경에 창건한 선림원이 있었던 곳이다.

선림원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련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는 대규모의 절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10세기 경 홍수와 산사태로 매몰이 되었다고 한다. 11월 14일 양양군을 한 바퀴 돌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미천골로 향했다. 몇 번을 들른 선림원지다. 선림원지는 매몰이 되었던 곳인 만큼, 지금도 금당지의 주추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선림원지에 있는 보물 제447호 부도의 기단부와 금당지(아래)

보물로 지정된 부도 안타까워

선림원지를 오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다. 그 뒤편에는 금당지가 있고, 여기저기 석물들이 널려져 있어 이곳이 대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금당지 동편 산 밑에는 부도의 기단이 한 기 서 있다. 원래는 북쪽으로 50m 정도 위편에 서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는 부도의 기단은 정교한 조각과 함께, 화려한 문양 등을 자랑하고 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 부도의 건립연대는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부도는 지대석 위에 상중하로 구분된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석,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는다.




일제의 훼파로 사라진 부도 몸돌

일제는 침략기에 무수한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하고 훼파를 시켰다. 요즈음 문화재 반환운동을 하면서 일부가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들이 강탈해 간 우리의 문화재는 30여 만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국보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 선림원지 부도 역시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1965년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복원한 것으로 겨우 기단부만 남아있다. 이 부도의 지대석을 훑어보면서 만일 이 부도가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 지대석만 보아도 상당히 걸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재를 훼파한 일제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연화대석에 조각이 된 용은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운문룡의 조각은 상상을 초월해

기단부만 남아있는 선림원지 부도. 보물 제447호로 지정이 될 만큼 대단한 걸작이다. 이 기단부는 네모난 지대와 팔각의 하대까지 같은 돌 2매로 구성되었다. 지대석은 땅 위에 들어난 부분만 다듬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하대 8각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상 안에는 교대로 사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하대 위에는 둥근모양의 연화대석을 놓았다.

연화대석 위에는 간주모양의 중대석과 원형의 상대석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위에 부도가 놓여 있어야 하나, 일제에 의해 조각이 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연화대석 표면에는 서로 다투듯 조각을 한 운문룡이 있다. 구름과 함께 조각을 한 용은 발을 힘차게 뻗치고, 금방이라도 연화대석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이렇게 대단한 기단부였다면, 그 위에 올려 진 부도는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사라진 부도가 아쉽기만 하다. 수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선림원지의 부도가 주는 안타까움이,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또 한 번 통곡을 한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문화재의 훼손이 마음이 아파서.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 1번지에 소재한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부도이기 보다는 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부도가 탑형이나 석종형 등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 진전사지 부도는 아래에 탑처럼 이중의 기단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부도를 놀려놓았다. 현재는 탑 옆에 진전사라는 절이 있다.

이 진전사지 부도는 조성시기를 9세기 중반으로 추정하는데, 신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몇 번이고 찾아간 부도탑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아마 이 부도의 생김이 여느 부도와 같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부도

진전사지 부도 기단부는 탑

이 진전사지 부도의 기단은 이중으로 조성을 하였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짜 4매를 붙여 놓았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어 석탑과 같은 형태이다. 갑석 역시 4매로 짜놓았다. 상층기단 중석은 2매로 조성을 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를 표현하였다. 갑석의 아랫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단부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 틈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만큼 진전사지 부도는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보인 진전사지 3층 석탑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당시에 이 진전사가 어느 정도 세를 갖고 있었는지 가늠이 된다.



앙련을 새긴 뛰어난 부도의 받침

2단의 기단 위에 올린 탑신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다만 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이 굄돌에는 16연의 앙련이 돌려져 있어 뛰어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처마가 날렵하게 표현이 되어 자칫 무거운 부도를 무게를 탈피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탑과 부도를 합쳐놓은 것만 같은 진전사지 부도. 뛰어난 조각을 조성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부도를 특색 있게 꾸며놓았다. 탑 위에 올린 부도,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옥개석 등의 반전이 부도를 보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옛 선인들의 놀라운 조형술

이 진전사지 부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내세우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절제된 미를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밋밋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부도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탑과 부도를 합한 특색 있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이런 부도를 조성을 했다는 것에 대해, 옛 선인들의 뛰어난 조각술에 감탄을 한다.



부도탑을 돌아보는데 절에서 키우는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쫒아온다. 절에서 키우는 대개의 개들은 사람들에게 길이 들어 있는가보다. 낯선 사람이 와도 짖지를 읺고, 오히려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기가 일쑤다. 이 개도 부도탑 주위를 돌면서 영역표시라도 하는 듯 떠나지를 않는다. 무료한 문화재 답사에서 가끔은 이런 풍경이 있어,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을 하면서 떠나는 길에, 절집 백구가 배웅을 한다.



여주 고달사지의 동쪽으로 가면 산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돌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만난다. 이번까지 3번을 이 부도를 보았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는 천년 세월을 제 모습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를 만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이 부도가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팔각으로 된 하대석의 연꽃무늬와, 중대석의 용과 구름은 아직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다. 중대석의 용은 힘차게 부도를 감고 있다. 용의 무늬 중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두발로 감싸고 있는 조각은 가히 압권이다.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서로 감고 있는 모습도 생동감이 넘친다. 많은 부도를 보았지만 이런 멋진 조각을 해놓은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에 새긴 용머리에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보인다

  
▲ 부도 부도에 새겨진 용의 조각. 발로 불꽃이 이는 여의주를 잡고 있다

  
▲ 용꼬리 부도 중대석에 새겨진 용의 조각 중 꼬리 부분. 두 마리의 용꼬리가 힘차게 감고 있다

부도의 전면에 돌출이 된 용의 머리 역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상대석으로 올라가면 연촉이 표현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영창이 서로 반대편에 조각이 되어 있다. 자물쇠 문양과 영창 사이에는 사천왕상이 힘있게 조각되어 있다.        

 

머릿돌은 상대적으로 몸돌보다 크게 만들었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바로 머릿돌의 밑면에 조각이 된 비천상이다.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 같은 이 비천상에서 부도는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아마 이 부도를 조각한 공인도, 이 부도의 주인이 하늘로 오르기를 바랐나보다. 또한 스스로도 하늘로 올라 비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자물쇠 문양 상대석에 조각된 자물쇠 문양인 문비.

  
▲ 영창 부도의 상대석은 상징적으로 사리가 있는 곳이다.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그 반대편에 조각된 영창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 사천왕상 상대석 8면 중 사면에는 사천왕들이 부도를 지키고 있다

너무도 생생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의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광종 대에 전성기를 누리던 고달사가 폐사가 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인가 보다. 고달사에 남아있는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혜진탑과 비교를 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 비천상 고달사지 부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은 역시 비천인상이다.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다

  
▲ 비천인상 머릿돌의 밑면에 새겨진 비천인상.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완성시킨 아름다움의 결정체다


천년 세월 한 자리에 서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며 제 모습을 지켜 낸 고달사지 부도. 그래서 고달사지를 찾을 때마다 일부러 계단을 오르는 것도, 그러한 아름다운 탑을 보기 위해서다. 더욱 이 부도를 눈여겨보는 것은, 앞으로 또 천년을 그렇게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고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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