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문화재의 품격이 달라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개는 격강이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때는 격하가 된 것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괜히 마음이 짠하다. 아마도 문화재에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문화재 보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운악산에 있는 현등사의 동종은 예전에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였다가 지난해 1227일 보물로 격상이 된 예이다. 이럴 때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보물을 만났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문화재가 그만큼 소중하거나, 아니면 제작 연대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봉선사에 봉안되었던 동종

 

가평 현등사에 소재한 동종은 원래 현등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봉선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또 하나의 동종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등사 동종은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을 강조한 범종이다.

 

 

머리부분인 용뉴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두발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표현력이 뛰어나다감. 비록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주종기를 종에 기록한 소중한 자료

 

현등사 동종의 배 부분에 보면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을새김 하였다. 주종기는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천보가 짓고 글을 새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동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라 이종의 시용 용도와 참여한 사람 등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주종기에 보면 주종장은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보고 있는데, 그는 조선후기 승려 주종장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장의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 현등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이며, 주조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다. 종에 새긴 문양은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한 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종의 양식을 따른 종

 

현등사 동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종에서 비롯된 중국 종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여 절로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라든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와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등이 아름답다.

 

 

또한 종의 블록한 배 부분에 크게 자리 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와,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은 장엄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1469년 작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이나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 그리고 1491년 작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 등 조선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도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소재한 봉선사.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법인국사인 탄문이 창건한 절이다. 법인국사는 운악산 기슭에 절을 짓고 이름을 운악사라고 하였다. 운학사는 조선조 세종 때 7개의 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통합이 됨에 따라 혁파되었던 절이다.

그 뒤 조선조 예종 1년인 1469년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이름을 봉선사로 개명하였다. 그 뒤 명종 6년인 1551년에는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차례나 훼손되어 다시 중수를 하였다.



봉선사 대종과 괘불이 전해

봉선사는 한국전쟁 때 150칸이나 되는 전각들이 완전 소실이 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전각들은 모두 근래에 들어 다시 중창한 것이다. 현재 봉선사에는 조선 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보물 제397인 대종이 남아있다. 이 대종은 1469년에 제작한 종으로, 이렇게 큰 대종을 당시에 주조하였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2월 26일 오후, 의정부에서 봉선사로 향했다. 봉선사를 찾아가려면 광릉내 숲을 지나야만 한다. 엄청난 고목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길을 지나 봉선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이다. 봉선사 일주문 앞에는 많은 차량들이 서 있고, 연신 사람들이 경내로 들어선다. 아마도 모처럼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듯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배터리가 아웃이라니

봉선사 주차장에서 대웅전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길을 굳이 차를 갖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해 불안하다. 밖에 차를 대고 걸어도 불과 10여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아니던가?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와 하마비가 서 있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선방을 촬영하다가 보니, 배터리가 떨어져 버렸다.

이럴 수가 있나, 여유분의 배터리는 차에 두고 왔는데 난감하다. 할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렇게 휴대를 한 손전화를 이용해서라도 답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봉선사에는 16동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청풍루를 비롯해, 운하당과 관무현, 대웅전의 양편에는 관음전과 지장전이 서 있다.



대웅전의 뒤편으로는 조사전과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다경실과 개건당, 방적당, 동별당, 서별실, 종루 등이 자리한다. 휴대폰으로 하나하나 촬영을 하다가 보니 영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찌하랴, 그나마 고맙게 생각을 할 수 밖에.

화마를 입고도 남아있는 대종

봉선사의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주조된 종 중 몇 개 남지 않은 조선 전기의 동종이다.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왕실의 명에 따라 만들었다. 높이 238㎝, 입지름 168㎝, 두께 23㎝의 이 종은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져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형태이다.




종의 몸통 위부분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보살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글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이 종을 제작하기 위해 대대적인 불사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시간 이상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종각으로 향했다. 그러나 종각은 출입을 통제시켜 놓아, 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가 없다. 다행히 또 하나의 대종을 본떠 만든 종이 축대 위에 있어, 그곳에서 보물 대종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주말, 광릉내 숲과 함께 돌아보기 좋은 봉선사. 날도 풀렸으니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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