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 출토되었다는 삼존불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는 비구니의 요람이라는 봉녕사가 소재한다.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중기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상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조성하였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삼존불 모두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16일 오후, 봉녕사를 찾아갔다. 전날 찾아가려했지만 15일은 우란분절이라 봉녕사를 찾아오는 신도들 때문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각에는 접근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아 뒷날인 16일을 택한 것이다. 봉녕사 경내로 들어서니 사진촬영금지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촬영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현수막을 걸어 알리고 있는 것일까?

 

 

종무소를 찾아가 사진촬영 허가받아

 

먼저 봉녕사의 업무를 관장하는 종무소를 찾아갔다. 종무소 근무자에게 삼존불 촬영을 하기위해 왔다고 설명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남자 한분이 들어와 무슨 일로 삼존불 촬영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문화재소개를 하기 위해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난 후, 관리자의 안내를 받아 용화각으로 향했다.

 

용화각(龍華閣)의 명칭을 용화전이라고 해야 하는데 용화각에 붙인 명칭을 바꾸겠다고 했더니, 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후에는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용화전으로 고치지 못했어요.”

관리를 하는 분의 설명을 듣고 용화각 전경을 한 장 촬영하고 난 후 용화각 안으로 들어서 삼존불을 촬영했다.

 

카메라가 아닌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가보다. “카메라는 플래시를 써야하기 때문에 삼존불에 피해가 갈수도 있어 휴대폰으로 촬영을 한다고 설명을 드렸더니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기자는 처음 보았다.”며 웃는다.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은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부자연스럽게 조각하였다. 석불의 밑을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을 조성하였다.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마모가 워낙 심해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협시불은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고려 중기 한 사람의 석공에 의해 조성한 듯한 삼존불,

 

용화각에 모셔진 석조삼존불은 모두 평평한 느낌을 준다.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봉녕사 삭조삼존불. 모두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땅에 묻혀있던 삼존불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불자들에게는 이 삼존불이 예사삼존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 역시 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봉녕사를 찾아가 석조삼존불 앞에 머리를 조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는 백중이라 워낙 많은 사람들이 용화각을 찾아와 아마 사진촬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관리자의 설명이 없다고 해도 15일이 백중일임을 알고 다음날 찾아간 것이다. 음력 715일을 우리는 흔히 백중일(百中日)’ 또는 백종일(百種日), 이라고 부른다. 백중 때가 되면 채소와 과일 등을 수확할 수 있는 시기로, 100가지 과실이 나온다고 하여 백종(百種)이라고도 했다. 이날을 망혼일, 중원일(中元日) 혹은 불가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 부른다. 우란분절에 불가에서는 하안거를 해제하고 망자들을 위한 제를 올린다.

 

 

우란분절의 내력은 이러하다. 예전 목련존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님은 백가지 과일과 꽃을 차려놓고 스님들을 청해 우란분회(盂蘭盆會)를 열어주라고 일렀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대덕스님들을 모셔 우란분회를 열어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란분절에는 모든 절에서 재를 올린다. 세상을 먼저 떠난 영가를 천도하는 의식이다. 다음날 찾아갔지만 마음속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고개를 숙인다. 봉녕사 삼존석불을 돌아본 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먼저 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불화를 그리는 스님이 계시다.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봉녕사. 103일과 4일 봉녕사에서는 62014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이 열린다. 3일 이른 시간에 봉녕사를 찾았다. 매년 이곳이 들리면 소요삼장 전시실에서 귀한 전시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가 채 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봉녕사 주차장은 이미 차들이 들어차 있다. 숲길을 걸어 봉녕사로 들어가니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입구에서부터 여기저기 먹거리들을 준비하는 손길들이 바쁘다. 한편으로는 일본, 태국, 인도, 중국, 대만 등 세계 11개국에서 참가해 각 나라마다 사찰음식을 소개하기에 바쁘다.

 

 

소요삼장 전시실에서 만난 불화

 

음식과 여러 가지 불교용품이 전시되어 있는 부스를 지나 대적광전을 향하다가, 우측으로 난 게단을 오르면 소요삼장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3일과 4일 전시회를 열고 있는 불화 그리는 도일스님을 만났다. 전시실 한편 벽에 걸린 불화들이 마음을 정하게 만들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뵙기 위해 찾아와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도일스님은 불화를 그리신다. 스님의 불화는 전통불화이다. 간단하게 그린 몇 점의 그림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손목에 걸린 염주는 깊은 고뇌에서 사람을 끄집어 내어줄 것만 같다. ‘염주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이미 판매가 된 듯 붉은 표시가 되어있다. 그리고 보니 스님의 그림들에는 여기저기 붉은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부산 반야사에 계신 예운 도일스님은 동국대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하셨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동국대학에만 불교미술학과가 있기 때문에, 스님은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불교미술을 공부하신 듯하다. 현재는 동국대 불교미술학과 석사과정에 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욕심이 생겼어요. 제대로 된 불교미술을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은 이론으로 택했어요. 이론과 실기를 병행할 때 비로소 온전한 불교미술을 알 것 같아서요.”

 

 

티베트 여행에서 만난 '탕카'에 심취해

 

스님이 이렇게 전통불화를 그리게 된 것은 해외여행 때문이라고. 인도 여행을 갔을 때 마지막 여정은 티베트였단다. 그곳에서 접하게 된 부처님의 모습을 그린 탕카를 만나면서였다고. ‘탕카(Thangka)’는 티베트 불교회화인 축형태의 그림을 말한다. 우리가 사원을 장엄하기 위해 거는 불화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탱화(幀畵)’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이 그림이 마음을 움직여 그곳에서 3개월 정도 스케치와 초 작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기도를 하면서 전통불화 작업을 시작했다고. 전시실 한 면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영산회상도는 스님의 졸업 작품이라고 한다.

 

“1년 정도 걸렸어요. 저 그림을 그리는데, 저 그림을 그리면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대하죠. 그래서 불화를 그리면서 오히려 제 공부가 더 늘어난 것 같아요. 이번에도 봉녕사 주지스님(자연스님)께서 전시를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대답을 해놓고 참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아요.”

 

전통불화를 그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은 작업이다. 도일스님은 이번 전시회 권유를 받고 전시준비를 하면서 한 점을 찍을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스님 스스로 미흡한 상태에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고 하시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 앞에만 사도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이야기를 한다.

 

스님의 그림을 아침에 보았는데 정말 마음이 편해졌어요. 욕심 같아서는 스님의 그림을 다 소장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한 점만 구입을 했어요. 도일스님께서 이 불화를 그리실 때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렸는지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스님의 그림 한 점을 소장했다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행복일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는 불화 한 점. 그것이 정말 살아계신 부처가 아닐까? 도일스님의 그림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본다.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이 열리고 있는 천년고찰 봉녕사.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에 자리하고 있는 봉녕사는 비구니 사찰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절이다. 이 곳 봉녕사 도서관인 소요삼장 1층에서는 초산 이강식의 하늘새전과 대산스님의 대나무 연꽃조각전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조각전은 5일까지 전시가 된다.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보통리에 거주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 이강식 작가는 이미 하늘새라는 조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이다. 그동안 초대전과 개인전 52, 국제전과 단체전은 300여회나 가졌다. 그리고 작품전시회에서 얻어진 수익금을 불우아동돕기 기금으로 사용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스님시인인 소야 신천희 시인은 이강식 작가의 하늘새를 이렇게 표현한다.

 

슬픔의 씨앗을 쪼아 먹고

기쁨의 열매를 낳아주며

이승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함께 날아가는 행운의 새

 

 

대나무로 정교한 연꽃조각을

 

이강식 작가의 하늘새 전은 그동안 몇 차례 보아왔던 터라, 이번에는 처음으로 접하는 대산스님의 대나무 연꽃조각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대나무로 연꽃을 만들었다는 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 쪽 벽면을 길게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

 

사진 찍을 만한 작품은 되나요?”

 

고개를 돌려보니 스님 한 분이 계시다. 바로 이 연꽃을 조각한 대산스님이시다. 잠시 틈을 내어 스님이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 등을 물었다.

 

 

대산스님과의 대담

 

- 이렇게 작품을 만드신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신지?

취미삼아 시작한 조각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고 있는 토굴 뒤편에 대나무가 깔렸어요. 조각을 처음에는 소나무 등을 이용해서 했는데, 그 대나무를 이용해서 무엇인가 만들어 보고 싶어서 시작을 한 것이죠.

 

- 이렇게 작고 정교하게 만드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에는 실패를 많이 했죠. 대나무를 이용해 연꽃을 조각하는 것도 그렇지만, 잎이며 연꽃의 연자 등을 표현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어요. 처음에 만들기가 힘들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데요. 이 작품을 만드는 시간도 한 일 년은 걸린 듯합니다.

 

- 이 연꽃의 술이나 연자 등은 어떻게 표현을 하셨나요?

대나무 가지를 이용해 만들다가 보니까, 도저히 연자나 꽃의 술은 표현을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대나무 뿌리를 이용해보니까 그럴 듯하게 표현을 할 수 있었죠. 그래서 대나무 뿌리를 이용해 이렇게 조각을 했어요. 이 연꽃조각 하나에 대나무의 모든 부분이 다 소용이 되는 것이죠.

 

 

- 스님께서 사시는 곳은 경주 건천읍이신데 이곳까지 오셨네요?

, 처음에 이렇게 작품 전시를 하게 된 것은. 하늘새 작가인 이강식 선생을 통해서였어요. 3월인가 작가 100인 전인가를 했는데, 이강식 선생이 함께 하자고 해서 시작을 했죠. 그 판매금은 모두 불우아동을 위해서 기부를 했고요. 이번에는 제가 페이스북을 하는데 봉녕사 학인스님이 제 작품을 보고, 주지스님께 이야기를 해 초대를 받았습니다. 봉녕사에서 이 대나무 연꽃조각전을 제일 먼저 해달라고 부탁을 해와, 몇 곳에서 전시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늦추고 제일먼저 이곳에서 전시를 연 것이죠.

 

- 그럼 대나무 연꽃조각전은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 한국에서 최초로 이곳 봉녕사에서 전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연구를 해서 더 정교한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 감사합니다. 시간을 내어 주셔서.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봉녕사. 비구니 사찰인 봉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광교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여 성창사라 하였고, 조선시대 1469년 혜각 국사가 중수하고 봉녕사라 하였다.

 

1971년 묘엄스님이 주석하신 이후, 40여 년 동안 비구니 승가교육의 요람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1974년도 봉녕사 강원(승가대학)을 개원하였으며, 19996월 세계 최초로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금강율학승가대학원)을 개원하였다. 봉녕사는 승가교육과 율학연찬을 통한 수행도량으로서 사격을 갖추고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세계사찰음식 다 모여

 

이 비구니 가람인 봉녕사에서 매년 가을이 되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어 잔치를 벌인다. 바로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이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로 5회 째를 맞이하는 사찰음식 대향연은 4일과 5일 이틀 동안 봉녕사 경내에서 열린다.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의 웹툰에는 사찰음식에 관한 소개가 올라와 있다. 한 마디로 그럴 것이라고 공감이 간다.

절 행사가 고루하다는 편견, 사찰음식이 심심하다는 관념, 내 종교만 최고라는 이념, 머릿속 복잡한 상념, 요즘애들 부족한 개념, 다 떠나서 여기 천년고찰 봉녕사에서 자연이 준 감사한 먹거리에 전념이란 소개 글이다. 그 밑에는 오늘 하루는 치맥(치킨과 맥주)을 거두고, 내 몸에게 자연을 선물하자. 그것도 안되겠니?’라는 문구이다.

 

 

사찰음식이란?

 

모든 법은 음식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음식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중일아함경 중에서 부처님 말씀). ‘사찰음식은 기본에 충실한 음식이며, 그 기본이란 바로 자연과의 조화이다.’(묘엄스님)이라고 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나에게 오기까지 흙, , 햇볕, 바람, 농부의 노고 등 무수한 인연을 따른다는 것이다.

 

사찰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이러한 인연에 감사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생명존중사상을 실천하는 수행방편이다. 사찰음식은 자연의 입맛을 잃어버리고, 인스턴트와 가공식품으로 건강이 무너져가는 현대인들에게, 단순 종교음식이 아닌 대안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에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사찰음식 외에도 베트남, 중국,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일본, 네팔, 티베트, 부탄 등 동남아 불교국가들의 음식도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부대행사도 눈길

 

축제 첫날인 4일애는 사찰음식 경연대회 시식, 평가회를 시작으로, 우관스님의 사찰음식 강의로 이어졌다. 또한 대적광전 앞에서는 수원의 여성으로 대표적인 인물인 나혜석이 즐겨먹던, 봉녕사 비빔밥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스님들의 수행식인 사찰음식은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으며, 제철에 나는 음식재료를 활용해서 조리한다. 또한 동물성 식품이나 파·마늘·부추·달래·양파 등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아, 조리를 할 때 사용하는 원재료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사찰음식 대향연 장에서 만난 한아무개(, 45)

사찰음식이라고 해서 단순히 심심한 음식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다양한 음식을 보게 되어 즐겁다. 더구나 이곳 강원의 학승들과 외국인들, 우리나라의 사찰음식 연구가들이 만들어 전시를 해 놓은 음식들을 보니, 어떤 요리경연대회보다도 훨씬 좋다는 생각이다. 내 몸을 위해 앞으로 이런 사찰음식과 같은 요리를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둘째 날인 5일에는 지견스님의 부적강의와 비빔밥 퍼포먼스가 대적광전 앞 부스에서 열린다. 또한 일본과 중국, 스리랑카, 미얀마의 사찰음식 소개와, 봉녕사 사찰음식교육관 개관식, 산사음악회가 열릴 예정이다.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에 소재한 봉녕사. 봉녕사는 우리나라 비구니 가람의 으뜸이라 칭한다. 봉녕사는 고려 희종 4년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성창사라 하였다. 1400년경에는 봉덕사로 개칭하여 오다가, 조선조 예종 원년인 1469년 혜각국사가 중창하고 사명을 봉녕사라 하였다.

 

혜각국사는 수원 광교산 일대에서 오래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광교산 중턱에 있었던 창성사에서도 혜각국사의 흔적이 발견이 된 것을 보면, 광교산 일대에 99개의 사암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허튼 소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혜각국사는 세조로부터 스승으로 예우를 받았으며, 간경도감의 경전언해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 활발한 불사가 이루어져

 

그 이후 봉녕사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971년 비구니인 묘전스님이 주지로 부임을 하면서 봉녕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묘전스님은 봉녕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에는 비구니 묘엄스님을 강사로 승가학원을 설립한다. 1979년에는 묘엄스님이 주지와 학장을 겸직하고, 1983년에는 승가대학을 설립했다.

 

1999년 6월에는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처음으로 금강율원을 개원하였다.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사찰인 봉녕사에는 고려시대의 불상인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 삼존불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신중탱화와 현왕탱화가 모셔져 있다.

 

 

 

 

지난 10월 5일, 사찰음식문화대향연을 취재차 찾아간 봉녕사. 대적광전 앞으로 올라가 참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조와 어우러진 꽃들, 연화세계가 여기든가?

 

대적광전과 수령 800년이 지난 향나무의 모습만 보아도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런데 여기저기 놓인 석조마다 가득 꽃을 품고 있다. 그만 그 꽃구경에 취해버렸다. 정작 사찰음식대향연은 뒷전으로 미루고, 꽃에 반해버리다니. 아마도 누구보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석조와 어울리는 꽃들이기 때문이다.

 

 

 

 

가끔 취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정작 취재를 할 것보다 더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한다는 것은, 더 없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 땀을 흘리며 꽃을 찍고 있다가 보니, 어느새 나도 그 꽃들을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꽃과 바람, 산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늙지 않는다고 했는지. 대적광전과 향나무 인근에 꽃들을 촬영하고, 대적광전 앞으로 가 잠시 머리를 숙인다. 누군가 열심히 절을 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등 뒤로 땀이 축축이 배어있다. 아마 오랜 시간 저렇게 절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마음속에 간구하는 것이 있어 저리도 열심을 낸다면, 그 원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작은 내 마음 한 자락 덜어내어 그 절을 하는 이의 마음에 보태고 싶다.

 

 

 

아마도 아직 봉녕사에는 그 석조에 담긴 꽃들이, 찾아가는 이들을 반겨줄 것만 같다. 서리가 오기 전에는 시들지 않을 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멀지 않은 길이라면 봉녕사를 찾아 꽃들과 대화를 해보기 바란다. 아름다움은 사물과의 소통에서 나온다고 하신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 생각이 난다. 그것이 바로 법문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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