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자리한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절이다.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긴 다음해인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웠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이 절은 현륭원의 건립과 때를 같이하여 세운 왕실의 원찰이다.

 

용주사의 각 부재의 사용이나 문양, 공간배치 등은 궁궐의 형식과 유사하다. 용주사는 창건 당시 140여 칸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창건당시의 규모나 형태가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는 18세기 말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려한 장식의 대웅보전

 

용주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존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35호이다. 대웅보전은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내부와 외부를 모두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규모는 정면 3· 측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로, 사일스님이 팔도도화주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주련 글귀는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 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 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 총섭이 중수하고, 1931년에는 주지 강대련이 1965년에는 주지 전관응이, 그리고 1987년 주지 서정대가 수리하였다.

 

융릉과 동일한 양식의 대우석

 

대웅보전의 기단은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다. 대우석은 일반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나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과 비운, 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이 대우석의 문양으로 보아 용주사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했던 장인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웠다. 대웅보전의 창호는 빗살꽃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의 전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젖혀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 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아름다운 닫집을 조성해

 

대웅보전의 내부에 들어서면 구조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이 있다. 이 닫집은 대웅보전이라는 불전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불전이다. 과거에는 불전(대웅전)에는 참배객이 들어설 수 없었다고 한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하였으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 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으며 불단과 후불탱화가 각각 불국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대웅보전의 기록으로는 홍천호가 찬한 대웅전상량문, 닫집내부에서 발견된 대웅보전 원문이 남아있다.

 

신라 제41대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으로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당시 해안사 절터이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성종 16년인 1485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명종 원년인 1546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도 전화를 입지 않아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하다. 숙종 38년인 1712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금포정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그러나 헌종 13년인 1847년에 은해사 큰불이 나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시주하였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그리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 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인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자료 은해사)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금포정을 들어서다

 

은해사를 다녀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금포정은 소나무와 금강송이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다. 2km나 되는 이 길은 1714년 조선조 숙종 때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수령이 300년 정도에 10m가 넘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길이다. 2007년과 2008년도에는 금강송 1080주씩을 이곳에 식재하였다.

 

은해사에는 보물인 괘불탱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된 대웅전 등 많은 문화재들이 부속암자와 은해사에 소재하고 있다. 은해사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쌍거북바위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왜구들이 의해 훼손이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주변을 정비하던 중 목이 달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지역 주민들의 고증을 거쳐 현지에 마애삼존불과 함께 복원을 하였다. 은해사 거북바위는 무병장수와 가정의 안녕을 기도하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유생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한다.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에 소재한 천년고찰 은해사. 다녀온 지가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답사란 항상 다녀온 후 바로 기록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전주, 완주, 김제를 아우르는 모악산은 깨달음의 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악산의 금산사와 뒤편 대원사를 기점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과,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으로 대원사에서 오랜 시간 정진을 한 진묵대사, 그리고 근세에 들어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의 차경석과 원불교 소태산 등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을 했다.

 

모악산은 『고려사』에 보면 ‘금산(金山)’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금산사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사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정상 근처의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있는 바위가 어미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엄뫼’라고 부르던 것을 의역하여 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모악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석종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인 600년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 국보 미륵전의 우측에는 높은 축대 위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이 있다. 이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탑의 외형이 범종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종이라 불린다. 이 방형의 석조로 구성한 방등계단은 바로 불교의식의 하나인 수계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갑석으로 되어있고, 상·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석종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9마리의 용이 끌어 올리는 석종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이 방등계단은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진신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종은 방형으로 상·하 2단의 기단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이 방등계단은 1918년에 발행된 『Korean Buddism』이라는 책자에 수록된 것을 보면, 미륵전 앞에서 바로 방등계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와타나베 아키라의 편집본인 『금산사관적도보(金山寺觀跡圖譜)』에 수록된 방등계단 일대를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때에 방등계단을 「송대(松臺)」라는 명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탑

 

이 방등계단과 불사리탑은 현재 보물 제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방등계단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적멸보궁이 보인다. 적멸보궁이란 방등계단에 놓인 탑을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배전이다. 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적멸보궁의 유리벽 밖으로 보이는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 탑이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법당 내에는 따로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는다.

 

모악산이기에 이 방등계단에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탑을 봉안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당시의 선대들이 미처 얻어내지 못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정진하는 사람들. 금산사의 방등계단은 오늘도 그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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