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성을 구분할 때는 산성과 평산성, 그리고 읍성 등으로 구분을 한다. 산성이란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형태의 성을 말하며 대개의 경우 이런 형태의 성곽이 많다. 평산성이란 평지와 산을 연결하는 성으로 수원 화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읍성은 평지에 쌓은 성을 말하며 흔히 평성이라고 한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1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인 남포읍성은 예전 남포읍에 설치된 성으로 길이 900m에 넓이는 105,283정도이다.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으로, 남포는 백제 때 사포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읍성은 원래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공양왕 2년인 1390년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군데군데 복원을 한 남포읍성

 

남포읍성은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다. ··남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을 둘렀는데, 1m이상의 큰 돌로 축성하였다. 성을 한 바퀴 따라 돌아보면 남포읍성이 꽤 단단히 지어진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았으며,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시설을 해놓았다. 현재 성 안에는 3채의 관아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현청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우물이 세 군데 있었다고 한다.

 

 

이 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남포는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 현 보령시내를 통과해서 한양으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또한 서해가 가깝다 보니 늘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눈 쌓인 남포읍성을 돌아보다.

 

남포읍성을 몇 번이고 돌아본 곳이다. 보령시에는 생각 밖으로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하루에 그 많은 문화재를 다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몇 번에 나누어 답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남포읍성을 들렸던 것 같다. 성은 후에 별도로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싶어, 성이 있는 곳은 그냥 지나치지를 않기 때문이다.

 

 

먼저 관아를 둘러보고 난 후 성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한 편에는 성 밖으로 축성의 흔적이 보인다. 이 곳이 바로 남포읍성에 있었던 3곳의 문 중 한 곳이며, 농로를 낸 밖으로 쌓인 돌은 문을 보호하던 옹성의 흔적이다. 옹성은 큰 돌로 쌓아 견고하게 축성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성밖으로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무너져 읍성, 복원 서둘러야

 

고려 우왕 때 석성으로 축성을 하고, 공양왕 2년인 1390년에 축성을 완성하고 군영을 둔 남포읍성. 조선 태조 6년인 1398년에는 병마첨절제사를 두어 현사를 겸하게 하였다. 성벽 위에는 미석과 여장을 두었으며, 곳곳에 치를 조성해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은 큰 돌로 쌓아 외부에서 성문을 찾기가 어렵도록 조성을 하였다.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하자 곳곳에 잡풀이 드러난다. 성벽 인근에도 수많은 잡풀더미에 성벽이 가려져 있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성돌이 구르고 있다. 어느 집은 성벽에 붙여 집을 지어, 읍성의 성벽이 집 뒤 축대처럼도 보인다. 곳곳에 복원을 한 곳도 있지만, 900m 전체를 복원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성은 복원이 될 때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대개 지형을 이용해 축성을 하기 때문에, 일부 복원만 갖고는 그 성의 진가를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포읍성의 경우 현재 보존이 된 성벽만 갖고도 그 진가를 능히 가늠할 수가 있다. 하지만 완전한 복원이 되면 얼마나 중요한 시설이었는가를 한 눈에 느낄 수가 있을 것을.

 

이상하게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의 능파교를 찾을 때는 꼭 날씨가 추웠다. 지난 118일부터 23일 일정으로 돌아 본 강원도. 그 첫날 건봉사를 찾은 날도 갑자기 날이 쌀쌀해졌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통일전망대를 돌아본 후 건봉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불이문을 건너 산영루로 들어가는 길에 만나는 다리가 바로 능파교이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흘려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18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 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날이 쌀쌀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건너 산영루 밑을 통과한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석조조형물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능파교를 건너본다. 그저 그 위에서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서 있고 싶다. 오랜 세월 그렇게 자리를 지켰을 능파교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함이다. 사람들에게는 다리이겠지만 30년 세월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돌아본 나에게는, 능파교는 다리가 아닌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내년 봄 산수유가 계곡에 흐드러지게 필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충남 보령시 동대동 809-1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9대천한내돌다리’. 한내돌다리는 조선시대 남포, 비인, 서천지역의 사람들이 보령현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조성되었던 12간 돌다리이다.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신안읍지 등의 기록에는 고려 원종 15년인 1274년에 축조된, 전라도 함평의 고막천석교와 같은 비슷한 유형으로 조성되었다 전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사람들과 우마차등이 통행하였고, 일제초기까지 주 교통로로 이용했다고 한다. 규모는 폭 2.38m, 길이 50m 정도였다고 하니 적은 다리는 아니다. 다리를 조성한 석재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인근 왕대산의 돌과 같아, 채석 후에 뗏목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운반 한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초까지도 20m 정도가 남아 있다가 붕괴되었다.

 

 

우마차 통행에 적당한 돌다리

 

대천한내다리는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인 시렁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고 한다.

 

 

다리의 구조는 1.5~2m 정도의 지대석을 묻고, 그 위에 다듬은 받침돌 3단을 횡으로 놓았다. 이것으로 다리기둥과 멍에를 대신 한 다음, 그 위에 길이 3~4.5m, 70~90cm, 두께 30~40cm의 시렁돌 3개를 얹어 다리바닥을 구성하였다. 바닥이 3개의 시렁돌로 이루어져 우마차 통행에 적당하게 설계된 다리이다.

 

한내돌다리를 밟아보다

 

지난 6일 찾아간 보령시 문화재 답사. ‘한내돌다리는 그동안 몇 번이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돌다리들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기 때문이다. 돌다리마다 갖가지 사연도 많지만, 돌다리들의 모습들이 하나 같이 독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우리나라의 돌다리들이 무지개모양의 아치 모형으로 구성을 하고 있는데 비해, 한내돌다리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꼭 들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지만, 그것이 대수랴. 대천천 한 옆에 복원을 해 놓은 한내돌다리. 주변 정리를 해놓고 다리 밑으로는 수초가 자라났다. 물의 깊이를 보니 옆으로 흐르는 대천천과 비슷한 수위를 갖고 있어, 대천천과 연결이 된 것은 아닌지. 돌다리를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리 위에 얹은 시렁돌 틈 사이로 물이 보인다. 다리 위를 걸어본다. 예전 이 다리를 건너 한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것일까? 아마도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짚신 두 켤레 덜렁거리며 한양으로 올라간 사람들. 소고삐를 잡고 불어난 물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 그런 많은 것들을 그려본다.

 

 

그렇게 대천한내다리에 빠져있는데, 빗방울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진다. 구경도 좋지만 카메라가 젖으면 그보다 큰 낭패는 없다. 그동안 많은 카메라를 망가트리면서 다닌 문화재답사이다. 비록 몸이야 젖어도 카메라만은 젖지 말아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돌아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우선은 비를 피하는 수밖에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에 소재한 포천 향토유적 제17호인 금수정(金水亭), 1989년 복원한 정자로 영평 8중 제 2경으로 창수면 오가리 영평천 가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 영평천 맑은 물이 흐르며, 주변은 숲으로 쌓여 가히 절경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이다. 원래 이 금수정은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정자였다.

 

1608년경에 이곳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두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이 정자를 사위인 봉래 양사언(1517(중종 12)~1584(선조 17)에게 주었다고 한다. 봉래 양사언 선생은 정자이름을 금수정이라 하고, 편액도 갈아 붙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정성이 대문호를 만들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은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소실로 양민에게 시집을 사는 바람에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부친인 양민에게서 어릴 적 부채인 채단을 선물로 받고 끝까지 딴 곳으로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우겨, 나중에 정실부인이 있는 양민에게 후처로 들어가게 된다. 양민이 죽던 날 양사언의 모친은 정실부인의 소생인 양사준에게 부탁을 한다. 자신이 남편과 같은 날 자결을 해 죽으려고 하니, 자신이 낳은 아들들에게 서자라 부르지 말 것을 부탁하고, 스스로 비수로 찔러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이 있어 양사언은 명종 1년인 1546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양사언은 금강산을 자주 들리고는 했는데, 그의 호를 봉래(蓬萊)’라 한 것을 보아도, 양사언이 금강산에 남다른 마음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사언은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직임을 맡았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 삼으며 은거했다.

 

 

선조 15년인 1582년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 변란을 당해 수사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 가서 1584년인 68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양사언은 점복에도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며,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양사언의 숨결을 낚다

 

금수정은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흐르는 영평천의 맑은 물과 숲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곳이다. 안동김씨의 소유로 전해오면서 몇 차례 중수되었으며, 6.25때 완전 소실된 것은 1989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자의 현판은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이며, 정자 옆에는 선생의 시조비인 태산이 높다하되가 서 있다.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정면 2, 측면 2칸이다. 정방형의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기둥의 밑동 위에 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러, 멋진 정자로 지었다. 크지 않은 정자가 숲과 영평천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 봉래선생도 이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절경에 취해 시 한 수 짓지 않았을까? 떠가는 구름조차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1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월 6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규모가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지난 410일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아직 이른 철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주변에는 산수유가 망울을 터트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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