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고찰 송광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이 자리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범(梵)’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이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중생의 번뇌를 가시게 하는 범종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번,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의 6천과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크지 않은 송광사 동종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조성된 보물인 종루가 있다. 그 종루 한편에 자리를 하고 있는 송광사 동종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크지 않은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다.

 

동종의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다.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조선조 숙종 때 만들어진 동종

 

현재 송광사의 동종은 사용을 하지는 않는다. 종루에 그대로 보관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동종에 쓰여 있는 글을 통해서 이 범종은 숙종 42년인 1716년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영조 45년인 1769년에 이 범종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범종을 보면 참으로 놀랄만하다. 어떻게 종의 겉부분에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한 것이라? 종의 거는 부분인 용뉴는 대개 용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글자와 보살상, 비천인, 유두, 넝쿨무늬 등을 어떻게 조각을 한 것일까? 한꺼번에 조형을 해야 하는 범종이다. 그 범종에 이런 다양한 것들을 새겼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장비를 갖고 조형을 한 것이 아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그 안에 쇳물을 부어넣어 만들어 낸 범종이다. 물론 나름 정리를 했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어 낸 것일까?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범종, 그 종소리가 듣고 싶다. 오늘은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예불시간에 맞춰 찾아가 종소리라도 듣고 싶은 날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에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55호로 지정이 된 고려 후기의 석조입상인 ‘목신리 보살상’이 자리한다. 이목신리 보살입상은 목신리 지방도 392호선 옆 나지막한 구릉 위의 보호각 속에 안치되어 있다. 보호각은 2007년에 찾았을 때는 좌우 각 한 칸인 목조 가구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이 보호각의 지붕이 초가였다고 하는데, 2009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맞배지붕을 얹은 기와로 깨끗하게 보호각이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 슬레이트 지붕일 때의 가림나무가 그대로 있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1888년에 중수를 한 보호각

 

목신리 보살상을 보호하고 있는 보호각의 종도리에는 묵서로 “광서십사년무자십일월 갑시(光緖十四年戊子十一月初一日 甲時)”라고 쓰여 있어, 1888년에 이 보호각의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호각에 사용된 초석 중의 일부에는 주좌가 뚜렷한 초석이 남아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주변이 사지였음도 간과할 수 없다.

 

목신리 보살입상은 목신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성되어 있어, 마을의 수호, 기자, 기복, 치병, 기우 등을 바라는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을 미륵으로 신앙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보호각

 

현재 보살상이 서 있는 구봉마을을 조선시대에는 양디현 목악면 장승동이라고 불렀다. 이 불상이 서 있는 입구에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에서는 보호각 안에 안치되어 있는 이 석조불상을 ‘미륵불’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속칭 ‘언청이미륵’이라고 한다. 이는 이 석조불상의 코가 마모가 되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보관 중앙에 화불이 있어

 

목신리 보살상은 머리에 갓 모양의 둥근 보개가 씌어져 있는데, 이 보개는 목신리 보살상과 석질이 다른 것으로 보아 후대에 조성해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보개를 덧씌운 이유는 사람들이 이 석조입상을 미륵으로 여기고 싶은 심리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는 인근의 가창리 미륵입상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현재까지 미륵으로 통칭되는 예는 전국적으로 약 300여 구에 달한다.

 

 

보개 아래에는 삼엽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관 중앙에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목신리 보살입상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방형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눈, 코, 입의 표현은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양 볼과 턱에는 살이 많다. 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귀를 감싸고 흘러내린 보발은 양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지방에서 조성한 보살상으로 보여

 

목은 상당히 짧고 어깨는 위축되어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보살상이 흔히 걸치는 천의가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보편화된 불의형 대의를 걸치고 있다. 옷 주름은 선각으로 간략하게 중요한 부분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외장한 채 중지와 약지를 구부렸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바짝 들어 올려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이 보살상의 높이는 155㎝, 보관 높이 25.5㎝, 상호 길이 60㎝, 어깨 폭 78㎝이다.

 

2007년 답사 때의 슬레이트 지붕 보호각

 

목신리 보살입상은 현재 마모가 너무 심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머리 부분이 신체에 비해 상당히 크고, 법의가 형식적인 선각으로 표현된 점이나, 양팔의 처리가 부자연스럽고 조각 기법이 서툰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 후기에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보살상으로 보인다.

경기 여주군 금사면 외평리 454-1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인 포초골 미륵좌불상. 이 불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있는 높이 1.7m의 석조미륵좌상이다.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좌불상은, 현재는 사찰 안 용화전에 자리하고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을 찾아본 것은 벌써 서너 번은 되었는가 보다. 처음에 찾아갔을 때는 전각에 단청도 하지 않은 채로 만났는데, 그 뒤에는 용화전에 단청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난 해인가 찾아갔을 때는 먼저는 보지 못한 광배를 찾았다고 했다. 이렇게 갈 때마다 달라진 모습을 보인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이다. 문화재는 찾을 때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머리에 갓을 쓴 석조 미륵좌불상

 

여주 금사면의 미륵좌불상은 민머리에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에는 반쯤 감은 눈, 오똑한 코, 풍만한 양 볼과 짧은 귀가 표현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주름과 가슴에 묶인 띠 매듭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둔탁한 편이다.

 

무릎은 신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양 발목 사이에는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감이 있고 육중한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석조 불상은 고려시대의 거대 석조불상의 형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중대석에 보살상을 새긴 연화대좌

 

일반적으로 미륵입상이나 좌상을 모신 전각을 용화전이라고 한다. 이 포초골 미륵좌불상이 소재하고 있는 절은 그 동안 상당히 불사를 많이 하였다. 하기에 용화전 주변도 정리가 되어있으며, 절 경내 곳곳에는 아직도 불사를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이 큼지막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중대석에는 8각의 각 면에 보살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렇게 보살입상을 새겨 넣은 연화대좌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것에서 이 미륵좌불상의 독특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뒤늦게 발견이 된 광배

 

연화대좌의 하대에는 커다랗게 앙화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이 불상을 보면 4각형의 원만한 얼굴에 넓고 당당한 어깨, 그리고 둔탁한 옷주름의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 볼 수 없었던 광배는 나중에 주변을 정리하다가 땅 속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광배응 몸 전체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큰 편이며, 윗 부분이 배의 선미처럼 휘어져 있다. 광배에는 위편에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원을 중심으로 하여 각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상. 4월 26일 오후에 찾아간 절집에서 만난 석불좌상은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