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버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오늘 29,000원 벌었어요.”

 

수원시 팔달구 지동시장 앞에 있는 지동교에 좌판을 펼치고 옷가지 등을 팔고 있는 곽유민(, 9. 남창초등학교 2)양은 연신 돈 통을 만지작거리며 즐거워한다. 331일 첫 번째로 열린 어린이 보부상이다. 10명이 참가한 어린이 보부상들은 모두가 옷가지며 문구, 책 등을 펼쳐놓고 팔고 있다. 그 중에는 꽤 많이 판 어린이들도 있다.

 

 

지동시장에서 마련한 전통시장 장금이 체험보부상교실(벼룩시장)’ 등이 열리는 지동교와 지동시장서부터 팔달문까지는 걷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31() 상인들은 모두 마이크를 들고 손님들을 부르고 있다. 얼굴마다 상기된 표정들이다. 도대체 이 팔달문 앞 재래시장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2일 효과 당분간 지속될 듯

 

정말 우리 지동시장이 개장을 한 후 이런 인파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지난달에 KBS-2TV의 리얼 버라이어티 12일이 방영되고 난 후, 파워소셜러라는 블로거들이 팸투어로 이곳 재래시장을 다년 간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저희는 올해 처음으로 장금이 체험과 어린이 보부상 시장을 열었는데, 이렇게 몰려올지는 몰랐습니다.”

 

 

지동시장 상인회 최극렬 회장은 연신 즐거워하면서 대답을 한다. 지동교 위에 마련한 장금이 체험은 지동시장에서 판매를 하고 있는 순대만들기 체험이다. 체험장에는 부모님들과 함께 참가한 아이들이 절구질을 하며 즐거워한다. 연신 인절미를 만들 찹쌀을 절구에 찧으면서 즐거워하는 부모들과 아이들.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정말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 아들과 함께 서울서 내려왔다가 이렇게 좋은 행사에 참가를 하게 되었다는 신아무개(, 39)씨는 12일을 보고 화성을 구경하러 왔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행사까지 참가하게 되어 너무 즐겁다고 한다.

 

 

미래의 경제 주인을 올바로 키우는 일

 

지동시장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이 행사를 기획하였다는 김춘흥(, 56)씨는 원래 서양화가이다.

 

미래의 경제주역이 될 아이들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물품을 전전한 상거래를 통햐 물품과 돈ml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이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이들에게 미래 1인 창조기업의 기틀을 다지게 하고 더불어 장이 갖는 기능을 함께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죠.”

 

보부상체험은 수원시내에 소재한 아이들 중 유치부부터 초, , 고등부까지 모두가 참여 할 수 있다. 인원은 선착순 20명이며 매주 일요일 오후 130분부터 330분까지 열린다. 지동시장상인회가 주관하고 있는 이 행사는 수원시와 팔달구, 수원영리더스아카데미에서 후원을 하고 있다.

 

 

보부상체험에 참가를 한 어린이의 부모님 한 분은

 

수원은 정말 행복한 도시입니다. ‘사람이 반갑습니다라는 수원시의 말대로 이곳이 정말 행복한 곳입니다. 저희는 수원으로 이사를 온지 이제 1년 조금 지났는데요. 이렇게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고, 먹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한 도시는 없을 듯합니다.” 라고 한다.

 

어린이보부상 체험은 어린이 누구나 선착순 참가를 할 수 있으며, 보무상 명찰과 돗자리 한 장, 그리고 패랭이 모자를 지급한다. 돗자리와 패랭이 모자는 사용 후 반납을 하면 된다. 장금이 체험은 순대와 떡을 만들 수 있으며, 당일 사용할 수 있는 티켓을 제공한다. 꽃이 피는 봄날, 수원 지동교에 위치한 보부상체험과 장금이체험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를 해보자.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까?

양반들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조선조 말의 장시는 한 때 전국적으로 상당한 숫자가 개설되어 있었다. 『만기요람』에는 19세기 초 우리나라의 장시는 8도 327개 군, 현에 1,061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장시 숫자가 인구수에 비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장시의 숫자가 많은 것은,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장시를 이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임원경제지』를 살펴보면 순조 30년인 1830년에는 전국에 1,052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장시가 조선조 말에 들어서는 단순히 장의 기능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물교환을 하던 조선조 말의 장시

 

조선조 말의 장시의 형태는 금전을 이용한 거래보다는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서로 물건을 갖고나와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는 물물교환의 형태로 거래가 되었다. 이 당시의 장시에는 비슷한 처지의 민초들이 모여서 양반들을 비판하거나, 나라의 정책에 대한 불신을 토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양반들의 수탈과 과도한 조세 등에 불만을 품던 민초들은 이러한 불만이 쌓이다가 보면 장날과 장터가 집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장시가 장의 기능 외에도 정치적 기능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장시는 집회의 장소와 정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곳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발상지이다. 양반들의 무리한 조세포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군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기념관에는 조선조 말의 장시를 소개하고 있다. 테마인형으로 처리한 이 장시의 모습은, 전시실 1층 <19세기 조선과 자각하는 농민들>이란 주제로 전시가 되어있다.

 

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당시의 장터 모습이 재미있다. 한편에서는 삿갓을 쓴 사람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삿갓을 쓴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양반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사람들을 계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많은 장시에서는 집회가 빈번히 일어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유관순열사가 만세운동을 일으킨 아우내장(병천)도 있다.

 

 

 

이렇듯 장시의 기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에서 그치지를 않았다. 물론 장이라는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가 보니, 가장 손쉽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고를 알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장시이다. 당시의 장시의 형태를 보면 민초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장시의 기능은 다양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시에서는 그 기능도 다양했다. 우선 장시의 기능은 ‘중매터’이기도 했다. 서로 5일마다 한 번씩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사람들을 소개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중매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대개는 이 장터의 중매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한 가지는 장시는 ‘정보통’이었다는 점이다. 장시를 떠도는 장돌뱅이나 보부상들에 의해 팔도의 정보가 장시로 흘러들게 된다. 큰 점포를 가진 대상들이 상대적으로 정보에 밝아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전국의 장시에 자신의 사람들이 다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장시의 흐름에 빠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장시는 이제는 ‘전통시장’ 혹은 ‘재래시장’이라는 명칭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 전통 장시의 인심 하나는 그 어느 곳도 따를 수 없다. 그것은 오랜 세월 장시의 인심이기도 하다. 걸인들까지도 사람취급을 해주는 곳. 그것이 바로 장시였다. 동학농민기념관에서 만난 장시의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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