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학교 교정 안에 문화재가 있는 것을 만난다. 주로 석탑이나 석불, 천연기념물 등인데. 천연기념물이야 교정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하지만 석탑의 경우는 드믄 예이다. 그런데 이 석탑을 만나게 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우선은 학교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훼손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원촌길 8-14 (서동리) 춘양중학교 안에는 동, 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이 있다. 학교 교정 한편에 서 있는 이 탑은 쌍탑형식으로 조성이 된 것이다. 이 춘양중학교는 원래 신라의 옛 사찰인 람화사의 옛터로 알려져 있다. 람화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5년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6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이 절은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같은 양식으로 조성한 두 기의 탑

 

보물 제52호로 지정이 된 봉화 서동리 동, 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이 쌍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이 모두 같은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기단은 아래와 위층 모두 4면의 모서리에 양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가운데도 기둥 모양의 조각인 탱주를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규모가 줄어들어 뚜렷한 체감율을 보인다. 각 층의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새겨 두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서쪽 탑에만 네모난 머리장식 받침인 노반이 남아있을 뿐이며, 동쪽 탑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탑이 몹시 기울어져 있어, 196210월에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 때 서탑에서는 사리함을 넣었던 공간이 발견되었다.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함께 99개의 작은 토탑(土塔)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비례와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 안에서 만난 쌍탑과 머리 없는 석불좌상

 

봉화군 춘양면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봉화는 정자가 100곳 이상이나 있는 곳이다. 그만큼 이곳은 옛 선인들이 즐겨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한 개 군에 100개가 넘는 정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답사의 즐거움은 배가가 된다. 거기다가 고택과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12월 초 겨울에 찾아갔던 봉화. 예정은 하루만 이곳을 답사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하루 만에는 도저히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주머니 사정만 여유가 있었다고 하면 아마 일주일은 족히 이곳에서 문화재를 찾아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경비를 줄이고 줄여 23일을 봉화에서 머물렀다.

 

23일의 봉화 답사 끝날에 만난 봉화 서동리 동, 서 두 개의 탑. 비록 기단부가 쪼개져 떨어져 나가고, 지붕돌인 덮개석도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 말기의 단아한 형태를 자랑하는 2기의 석탑은 그렇게 나그네를 반기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날씨는 쌀쌀했지만 그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은, 그 단아한 자태에서 풍기는 기품때문이었다.

 

탑의 촬영을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니, 나무 밑에 석불좌상 한 기가 보인다. 하지만 머리가 사라져 다시 조성을 했는데, 영 보기가 민망스럽다. 전국을 다니다가 보면 수없이 만나게 되는 머리없는 석불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석불의 머리를 훼손한 것인지. 자신의 문화재를 훼손하는 이런 작태야말로 이 민족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란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만 한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를 지키면서 전해진 수많은 문화재들을 돌아보면서, 과연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후일 우리의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조상으로 대우를 받을까? 두렵기만 하다.

 

문화재란 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하지만 숱하게 훼손이 되어있는 많은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부끄럽고 죄스럽기 때문이다. 후에 역사는 우리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림길 73(구덕리)에 소재한 송림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송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대구 동화사의 말사이다. 송림사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전탑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이전에 창건이 된 사찰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때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이는 송림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왜병들의 방화로 인해 선조 30년인 1597년에 모든 전각들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내에는 1649년에 조성한 대웅전이 가장 오래된 중심 전각이며, 1655년에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1657년에 봉안되었다.

 

드물게 만나게 되는 5층 전탑

 

보물 제189칠곡 송림사 오층전탑(漆谷 松林寺 五層塼塔)’은 송림사 대웅전 앞에 서있는 5층 전탑이다.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린 이 전탑은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만 화강암을 이용해 1단으로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올린 탑은 모두 벽돌을 구워 정교하게 쌓아올린 전탑니다.

 

 

이 전탑은 기단의 4면에는 각 면의 모서리에 양우주를,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의 탱주를 조각하였다. 탑신은 모두 벽돌로 쌓아올려 조금은 둔탁한 감을 주고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가 거의 줄어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나, 각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되고 온화하다.

 

금동상륜부 모조품이지만 정교함을 볼 수 있어

 

지붕은 벽돌로 쌓은 전탑인 점을 고려한 듯, 밑면의 받침부분 외에 위의 경사면까지 층급을 두어 쌓았다.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이는 1959년에 해체하여 복원작업을 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 이 금동상륜부를 보면 비록 모조품이긴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송림사 오층전탑은 기단부서부터 상륜부까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5층 전탑은, 해체보수를 하면서 탑신의 몸돌 내부에서 나무로 만든 불상과 사리장치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325호 오칭전탑 사리장엄구

 

19595층 전탑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일련의 사리장엄구이다. 이 유물은 제 2층 탑신에 거북모양의 석함을 안치하고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전각형의 금동사리기는 기단 위에 네 기둥을 세우고 뚜껑을 덮은 형식이며, 안에는 유리제 잔과 그 안에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하였다. 기단 밑에는 금판으로 복련을 돌리고 그 위에는 난간을 돌렸다.

 

 

기둥은 난간 안에서부터 세워서 사방이 터졌고 바닥 중앙에는 금판을 오려서 앙련을 만들었다. 보개는 2중이고 투각무늬가 있으며 금판으로 만든 연꽃으로 장식되었다. 보개 밑에는 4면에 모두 수식이 있고 네 귀에서는 영락이 길게 기단까지 늘어졌다.

 

수형장신구는 금판에 도금하였고 밑이 뾰족한 줄거리를 중앙에서 세로로 약간 접어서 모를 내고 옆으로 가지가 나 있다. 가지에는 약 200여 개의 원형 영락을 단 수법이 신라시대 장신구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 탑에서는 각종 옥. 금동제원륜. 은환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2층 탑신에서는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탑 모양을 한 금동 사리기가 나왔다. 이 녹색의 투명 유리병은 금동사리기 중앙에 놓여있던 컵 모양의 유리잔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높이 6.3, 배지름 3.1로 약간 황갈색이 도는 녹색의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배가 부르고 목이 긴 형태를 하고 있다. 짙은 녹색의 보석형태를 한 마개가 달려있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5층 석탑

 

미륵대원지는 사적 제317호로 1987710일 지정되었다. 이 미륵대원지 내에는 보물 제95호인 5층 석탑과 제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그 외에도 충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 석탑 등이 남아있다.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보물 제95호로 지정된 충부 미륵리 오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대원 5층 석탑의 하층 기단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조성을 했다. 특별하게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 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은 1층 지붕돌인 옥개석만 2장일 뿐, 나머지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인 양우주를 모서리에 새겼다.

 

 

옥개석인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지붕돌의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는 거의 위로 치켜져 있지 않다.

 

철간이 남아있는 미륵대원 5층 석탑

 

미륵대원 5층 석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인 복발이 남아 있다.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게 조성하였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 모양의 찰간이 남아있다.

 

5층 석탑은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비해,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을 보면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탑은 신라가 망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사 신라 석굴암을 따라 조성한 석굴불상으로 조성한 앞에 세운 고려 초기의 탑이라는 것에 비중을 둘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갔던 충주 미륵대원지. 눈이 쌓인 석조물들의 정취가 더 없이 고풍스러워 보인다. 한 겨울에 답사를 하는 이유는 여름철에는 볼 수 없는 이러한 또 다른 풍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의태자가 세웠다고 전하는 충주 미륵대원지. 아마도 그곳에서 마의태자는 망해버린 신라가 안타까워 모든 설음을 잊고자 미륵세계가 올 것을 간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쌍계사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15년인 1739년에 세운 비가 남아있어 그 당시 절을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하면 사람들은 먼저 하동 쌍계사를 떠 올리지만,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논산 쌍계사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에 소재하고 있다.

 

논산 쌍계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마치 전설을 만들기 위해 창건된 절인 듯하다. 그만큼 쌍계사의 전설은 한두 가지 아니다. 대개 어느 고찰이나 전설 한 두가야 있기 마련이지만, 쌍계사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저 쌍계사 주변 곳곳이 전설이 전한다. 그만큼 이 절이 창건 이후 유명세를 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부대중이 얼마나 많았기에

 

쌍계사에 전하는 전설 중에는 그저 허황된 소리 같은 것들도 전한다. 하지만 전설이라는 것이 전혀 맹랑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쌍계사는 한 때 많은 사부대중이 기거를 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쌀을 씻은 뜨물이 큰 길까지 흘러내렸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대웅전에 있는 탱화를 파랑새가 붓을 입고 물고 그렸다고도 한다.

 

대웅전 앞에 낸 문짝의 꽃 창살은 가히 일품이다. 꽃 창살을 사용한 절들은 많다. 하지만 아마 도 어느 절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그 꽃 창살의 문양만 바라보고 있어도 기분이 황홀해진다. 쌍계사의 기둥 하나가 칡넝쿨로 만들었는데, 이 기둥을 안고 돌면 병을 앓지 않고 저승으로 간다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 고찰 쌍계사. 이 절에서 사용하는 북이 얼마나 소리가 크고 고랑을 쩡쩡 울린 것일까? 북의 가죽을 한 겹을 볏겨 냈다고 한다. 또한 절 동편 고개 밑에는 샘물이 있다고 한다. 이 샘은 약효가 뛰어나 피부병 등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전라북도에서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

 

보물 제408호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 법당이다.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영조 14년인 1738년에 지은 건물로 보인다. 그 뒤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정면의 문은 정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을 새긴 꽃 창살로 마련하였다. 문의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하였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대웅전의 건물 안쪽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쌍계사의 대웅전은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 때문이다. 문화재 하나를 만날 때마다 어떤 때는 즐거움으로, 어떤 때는 비통함으로 접하게 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사고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에 또 바람따라 길 위에 늘 서있기는 하지만. (꽃 창살과 닫집은 문화재청 자료입니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연대로 보면 은행나무는 용문사 창건 당시에 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덕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가 뿌리는 8월에 찾아간 양평 용문사. 그저 바쁠 일이 없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넓지 않은 길을 걷는다. 그 어느 때보다 더 한가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로 인해 그 많던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은 뜸하기 때문이다. 8월 우중에 걷는 산길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 바로 사찰기행이 아이겠는가? 거기다가 문화재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함께이니.

 

 

대장경을 봉안했던 용문사

 

용문사는 고려 우왕 4년인 1378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조선조 세종 29년인 1447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인 1457에는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인 1480년에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인 1893년에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인 1907년에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빗길에 만난 한 여름의 용문사

 

용문산용문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만한 길을 사람들이 걷는다. 차 한 대가 뒤에서 빵빵거린다. 길이 좁으니 조심을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갈 길이 바쁘니 얼른 비켜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이 좁은 길을 굳이 차를 몰고 들어와야 하는 것일까? 괜히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절을 찾아갈 때는 가급적이면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걷는 편이다. 굳이 차를 절 경내까지 차고 들어가기를 자랑삼아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구도를 원칙으로 하는 도량이라면, 그리고 그곳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걸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권위주의적 사고는 언제나 짜증만 유발시킨다.

 

비는 오락가락한다. 몇 번이고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전통다원 앞에 도착을 했다. 그 전서부터 높이 42m1100년이란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는 전화에도 불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냈다고 하니, 나름 신령한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은행나무 앞에서 잠시 경의를 표한 후 경내로 접어든다.

 

기품 있는 사찰 용문산용문사

 

용문산 용문사는 그리 크지는 않은 절이다. 하지만 천년고찰인 용문사는 기품이 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여름 날 만나는 용문사는 왠지 기품이 있어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두고 여기저기 둘러 서있는 전각들 때문일까? 늘 용문사를 들릴 때마다 느끼게 되는 생각이다.

 

 

먼저 보물 제5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정지국사 부도 및 비를 돌아보고 다시 경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각들을 찾아다니면서 젖은 몸이긴 하지만 참례를 한다. 대웅전, 지장전, 관음전과 삼성각을 들린 후, 차라도 한 반 하고 싶어 경내를 벗어난다. 그렇게 다니고 있는 동안 비가 그쳤다. 다원에 들려야겠다는 생각은 잊었다. 8월의 산속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다고 했던가? 절집이 좋아 절을 찾는다. 그리고 그 절 안에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또 다시 절을 찾는다. 8월에 만난 양평 용문산 용문사. 그 안에서 천년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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