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산2-1에 소재한 현 금둔사. 금둔사 일주문을 들어서 경내를 향하다가 보면 우측 산 절개지에 보물 제946호인 순천 금둔사지 석조불비상이 자리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금전산에 금둔사(金芚寺)가 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승주군 낙안면 금전산의 서쪽에 있는 절터에 삼층석탑과 함께 있다.

 

낙안면은 백제시대에 분차 또는 분사군이었으며,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는 분령군이라 불렀다. 고려 때에 들어서 낙안 또는 양악으로 칭하여 나주에 속해 있으면서, 1172년인 고려 명종 2년 에 감무를 두고 그 후에 지주사가 되어 군으로 승격되었다.

 

1515년인 조선조 중종 10년에는 고을에 불륜한 일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75년인 선조 8년에 복구되어 낙안군이라 하였다. 1908년인 융희 2년에 낙안군이 폐지됨에 따라 읍내면이라 칭하여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4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내서면 20개리와 동상면의 교촌, 이동일부와 보성군 고상면의 지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낙안면이라 칭했다.

 

 

비석의 형태로 조형한 통일신라의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지붕 모양의 보개와 대좌를 갖추고 있다. 직사각형의 평평한 돌 한쪽 면에 불상을 조각하여, 마치 거대한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분에는 낮은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솟아있고 얼굴은 원만한 형태이다. 신체는 우아하게 굴곡이 있어 부피감이 느껴지며 단아해 보인다.

 

금둔사지 석조불비상의 양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에는 평행의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다. 양 손은 가슴 위로 올려 양 손의 엄지와 검지의 끝을 맞대어 설법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다소 엄숙해진 인상, 투박한 옷자락 등의 표현은 9세기 현실적인 사실주의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불상의 뒷면에 글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이나 마멸이 심해서 읽어내기 어려운 상태이다. 뒷면의 윗부분에는 보살상을, 아랫부분에는 코끼리상을 조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개는 탑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과 모습이 비슷하다. 대좌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잎과 위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삼층석탑과 함께 조형된 석불입상

 

금둔사지 석조불비상은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과 동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 금둔사지 석조불비상을 만났을 때 참으로 신기했었다. 마치 넓적한 돌을 한 면을 깎아내어 조형을 한 석불입상이 비석에 새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돋을새김으로 조각을 한 솜씨로 보아 뛰어난 기능을 가진 장인의 솜씨였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 올린 넓적한 보개는 탑의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사방의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가 있어 처음에는 딴 곳의 탑의 지붕돌을 올려놓은 것으로 알았을 정도이다. 보개석 밑면 역시 탑위에 올리는 지붕돌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불을 새긴 돌과 맞물리는 곳을 보면, 이 보개석이 석불입상 위에 조형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손의 표현이며 법의의 옷주름, 그리고 법의 밑으로 약간 삐져나온 듯한 발가락 등이 뛰어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원으로 조성한 대좌는 아랫기단과 위기단이 맞물려 연꽃잎이 서로 반대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형태의 조형이 상당히 수준작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입상에서 보기 힘든 석조불비상. 다음에 금둔사지를 찾으면 더 자세한 형태를 살펴보고 싶다.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에 소재한 용화사. 그 경내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인 ‘이천자석리석불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 노천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인 개석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는 이마 중앙에 백호가 표현되었다. 양눈썹과 는, 돌출된 코와 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용화사의 주존불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와 간결하게 처리가 된 옷주름 등을 볼 때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화사(龍華寺) 경내에 주존불로 노천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입상은, 높직한 석축을 쌓고 그 중앙에 석불을 모시고 있다. 뒷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이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기단이 이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있던 것이 아니다.  새로 조성을 한 것이다. 가슴 아래에 커다란 하나의 동과, 가슴 위 부분과 얼굴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모든 것이 간략하게 처리가 되어있다. 이는 고려 말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의 경우 이러한 석불과 마애불 등이 딴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시장의 번영을 위해 세웠다고?

 

일설에는 고려 현종 9年인 1018年, 장호원읍 선읍리에 감무를 두어 그 아문을 설치하였을 때 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개 시장이나 마을의 안녕 등을 위한 것이었다면 석장승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석리는 본래 음죽군 근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롭게 조성된 지역이다. 여주군 소개면의 흑석동 일부와 가서면의 자은동 일부를 병합하여, 자은과 흑석의 일부를 따서 자석리라 하였으며, 설성면에 편입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했다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화강암의 두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용화사 석불입상. 일반적으로 석불의 경우 몸에 팔을 조각하는 것이 통례인데 비해, 이 석불입상은 그저 통으로 두 개의 돌을 포개놓고 얼굴의 형상을 조각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팔은 찾아볼 수 없고, 균형은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많은 석불을 만나보았지만, 그 중에 가장 약식화 된 석불입상이었다는 생각이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떨 때 찾아갔던 용화사 자석리 석불입상. 올 가을이 짙을 때 이곳을 다시찾아, 가을의 풍취와 어울리는 또 다른 모습이 보고 싶다.

전국에는 수많은 석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에는 여래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석조관음상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많은 석불 중 통영 용화사 관음암의 석조관음보살좌상은 경남유형문화재 제43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증평군에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된 미암리 사지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고, 경북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에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250호인 금릉 덕천리 석조관음보살 입상이 있다.

그 외에도 몇 기의 문화재로 지정된 석조관음상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석조관음상이 귀한 것은 아마 그 조각을 하는 공정이, 딴 석불에 비해 까다롭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관음입상이 한 기 서 있다. 이곳은 예전에 건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관음입상은 건흥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

낯선 관음입상에 매료당하다.

12월 11일 찾아간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은, 처음 볼 때부터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석불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는 낯이 설기 때문이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의 전체 높이는 3.5m 정도에 석불의 높이는 3,05m 정도이다. 이 석불이 관음입상이라는 것은 그 몸에 두른 법의나 손에 들고 있는 정병 등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석조관음입상의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보개가 솟아 있으며, 관음상에서 보이는 보관은 없어진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상은 석가모니불을 새긴 보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가늘고 긴 눈을 반쯤 뜨고 있다. 얼굴의 가운데 길게 새겨진 코는 약간 손상이 되었다. 손상된 코로 인해서 얼굴의 윤곽이 조금은 불투명하게 보인다.


보개는 높이 솟아있고, 보관은 사라졌다. 목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가 있다.

특이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석조관음상

이 석조관음입상은 일반적으로 신라 때의 석조물에 비해, 미소가 줄어든 형태로 표현이 되었다. 하기에 그 모습이 인자하기 보다는, 조금은 엄숙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깨는 약간 각이 져 있으며, 평범한 가슴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 장식이 느리어져 있다. 이런 꾸밈으로 인해 장방형의 모습과 더해져 보살상 특유의 유연함이 부족한 듯하다.

양 어깨에는 단조로운 모양의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그 단조로움을 허리를 감아 도드라지게 표현한 띠로 인해 단조로움을 벗어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양 다리에 걸쳐 U자형 옷주름이 엇갈리게 배치한 것도, 상림리 관음입상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천의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듯 표현을 하였다. 얼핏 무사들이 입는 옛 갑옷을 연상케 하는 천의의 형태이다.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대좌는 팔각으로 조성을 하여 연꽃무늬를 둘렀다.

이 관음입상은 오른손은 몸에 붙여 팔을 아래로 내려 정병을 들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대어 연꽃송이를 쥐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입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아래는 팔각으로 조성을 했으며, 그 위를 원으로 조성해 연꽃을 새겨 넣었다. 답사를 다니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석조관음입상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천의의 꾸밈이나 정병, 목걸이 등이 당시에 유행하던 지방의 불교미술의 특징으로 보인다. 정병을 든 오른팔의 팔뚝에는 띠를 두르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코가 훼손이 되 측면으로 보면 조금은 이상한 모습이다. 오른손 팔뚝에는 겹으로 된 띠를 둘렀다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즐거운 것은 역시 하나하나 우리 문화재를 알아간다는 점일 것이다. 수많은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지식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에, 그저 피곤한 줄을 모르고 돌아다닌다. 이 다음에 더 많은 자료가 쌓이는 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고 싶은 욕심에 힘든 답사의 여정을 재촉하는지도 모르겠다.


목걸이와 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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