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무덤’이 있다고 한다. 천주교 성지인 ‘청양 다락골 줄무덤’. 직접 보지 않는다고 해도 ‘줄무덤’이라고 한 것만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간다. 오죽하면 줄무덤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은 이런 역사의 아픈 흔적을 만나보기도 한다. 이번에도 문화재를 찾아 지나는 길에 만나기 된 줄무덤.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 길 78-6에 소재한 이 다락골 성지는 칠갑산과 오서산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고택을 찾아 화성면 기덕리를 찾다가 우연히 안내판을 보고 찾아간 다락골 성지. 입구에 작은 성당이 있고, 마침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저들도 이곳의 아픔을 보고 찾아 온 것일까?

 

 

병인박해 당시 처형당한 순교자들의 무덤

 

다락골 성지는 헌종 5년인 1839년 옥사한 후 103위 순교성인의 한 사람이 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그의 장남이자 대한민국의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가 태어나 자란 생가 터가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1866년 병인년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병인박해의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고종 3년이던 1866년에 벌어진 천주교 최대 박해 사건이다. 병인박해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불리우며, 당시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선교사 등 약 6천여 명을 처형하였다. 줄무덤은 바로 병인박해 때 포졸들의 급습에 의해 잡혀서 처형을 당한, 홍주(현 홍성)와 공주의 무명 순교자 37기의 무덤이 있는 성지이다. 그들의 시신을 야음을 타 시신을 매장한 곳이다.

 

 

다락골 줄무덤에 오르다

 

주차장 바로 옆에 ‘줄무덤 가는 길’이란 안내판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산으로 오른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길이지만, 장마철에 숲은 습하기가 이를 데 없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조금 오르다가 보니 조형물이 하나 보인다. 무명 순교자상이란 조각이다. 한편에는 사망, 또 한편은 부활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십자가의 길로 명명된 산길을 오른다. 독 모양의 조형물에 조각을 한 예수의 모습들이 보인다. 골고다의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조형물. 어쩌면 이곳 줄무덤에 잠들어 있는 순교자들도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당당하게 처형을 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 더 오르다가 보니 양편으로 길이 갈라진다. 좌측 길은 1, 2 줄무덤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 길은 제3 줄무덤으로 오르는 길이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3 줄무덤으로 오르는 우측 길을 택했다. 비가 내린다. 바쁜 답사를 하느라 땀으로 젖은 몸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비가 오히려 고마운 날이다.

 

순교자들 앞에 고개를 조아리다.

 

갈라진 길에서 우측으로 난 계곡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조형물을 설치하기 위해 조성을 한 공터들이 보인다. 저 곳에도 언젠가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멋진 조형물이 들어차기를 기대한다. 잔디가 그리 오래지 않아 깔린 위에 순교자들의 작은 무덤들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다락골 성지 제3 줄무덤이란다. 흐르는 땀을 닦아낼 틈도 없이 먼저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믿는 종교관이 뚜렷하기에 죽음을 맞이한 그분들에게 경의라도 표하는 것이 예의란 생각에서이다. 변변하지 않은 봉분과 작은 비석들. 그러나 그 마음만은 어느 거대한 무덤보다도 컷을 것이다.

 

비가 또 뿌리기 시작한다. 괜히 울컥한 마음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걸음을 재촉해 본다. 오를 때마다 더 무거워진 발길이다. 그래도 산 밑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온 바람 한 줄기 있어, 볼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아낸다.

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정월에 대원군은 전국에 천주교의 탄압 교령을 포고했다.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하는 이 천주교의 탄압 포고령이 떨어지자, 전국은 그야말로 피바다로 변해버렸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에서 천주교 신자 6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관군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잡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굶주림에 죽어간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더욱 이러한 난리 통에 신도가 아닌 사람들이 억울하게 박해를 당한 예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전북 익산군 여산면. 이곳에는 병인박해 때 생명을 잃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두 곳의 성지가 있다. 병인박해 때 순교를 한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교수형과 참수는 물론이고, 성벽 위에서 거꾸로 밑에 있는 바위위로 떨어트리기도 했다. 이러한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를 불러 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

백지사형을 행한 여산동헌 아래뜰

한지를 덮어 질식시킨 백지사(白紙死)

백지사란 말 그대로 백지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죽이는 형벌이다.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덧붙여 질식을 시켜 처벌하는 형벌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소방서 앞에 자리한 여산동헌. 이 동헌의 앞뜰에서 바로 이 백지사를 실행하였다. 일명 ‘도모지사(塗貌紙死)’라고도 하는 이 백지사는 호흡을 할 수 없어 받는 고통이 길어 오히려 더 심한 형벌이라고도 한다.

동헌의 아래 뜰인 이곳에는 당시 백지사를 당한 얼굴의 모형이 십자가 앞에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건물의 주추나 축대를 쓰였을 장대석을 모아놓았다. 딴 곳의 성지가 여러 가지 형태로 꾸며 놓은 것에 비해, 간단하게 성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과 모형조각만 땅에 놓여있다. 아마 이곳이 여산동헌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인가 보다.



얼굴의 모형만 보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손을 뒤로 묶고 말뚝에 매달아 백지를 얼굴에 덧 씌었다고 한다. 이들의 솜옷은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는데, 배가 고파서 옷의 솜을 다 빼서 씹어 먹었다는 것이다. 동헌건물의 옆에는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 있어 박해사실을 증명하는 듯하다.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겁 덮어 질식을 시키는 백지사의 형태(위)

한 가족 6명 등 25명이 순교한 숲정이 성지

여산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 도로변에 보면 또 한 곳의 성지가 있다. 일가족 6명 등 모두 25명이 순교한 숲정이 순교 성지. 이곳은 금산과 고산, 진산 등지에서 붙잡힌 신자들이형을 당한 곳이다. 그 중 고산 널바위 사람들이 17명이나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되고 논이 들어차 있지만, 당시는 이곳이 숲이 우거져 ‘숲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은 형장에서 칼을 풀어주자, 배가 고파 풀을 마구 뜯어먹었다고 전한다. 기록상으로는 25명이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고 하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숲정이 성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정비가 되었다.

숲정이 성지 정경

숲정이 성지로 들어가니 한편에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1866년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였다. 이때 금산, 진산, 고산의 심산 궁곡에 숨어살던 많은 신자들이 여산 관아에 끌려와 그 중25명이 진리의 증거자로 목숨을 바쳤다. 특히 당시 고산 넓은바위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17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의 가족은 6명이 순교하였다」

이 안내판의 곁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명단을 적은 또 하나의 안내판이 서 있다. 당시 순교자들을 보면 김성첨(토마스 62세), 김명언(안드레아 62세), 김정규(야고보 47세), 김정언(베드로 23세), 김홍칠(마티아 19세), 김찬여(요한), 김베드로(19세), 오유리안나, 박베드로(42세), 이필립보(19세), 오윤집(다대오 39세), 김성화(야고보 52세), 이서방, 손막달레나(27세), 한정률(요한 27세), 박성진의 아내, 전루시아(35세), 장윤경(야고보 37세), 전마리아(50세), 이영화, 박성실(요한), 김윤문, 박운겸, 박도미니코, 송가롤로(50세) 등 25명이다.




두 곳의 성지를 답사하면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순교를 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수많은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과연 그 마음을 어찌 읽을 수가 있을 것인가? 다만 그 순교한 분들의 굳은 믿음만은 조금은 이해할만하다. 간간히 언론에 오르내리는 소문이 무성한 종교들을 생각하면서, 이들이 더욱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낸 분들이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