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 전주에서 순창으로 나가는 국도(면 소재지인 원기리를 통과는 도로는 옛 길이다. 지금은 마을 뒤편으로 전용도로가 생겼다)에서 구이면 소재지 방향으로 접어들면, 좌측에 있는 원두현의 마을 안쪽에 정자 하나 자리하고 있다. 원두현은 통천 김씨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마을의 형성 시기는 600년 정도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남계정. 남계 김진이 자시의 호를 따서 세운 정자이다. 남계정 마루에서 내다보면 앞으로 모악산이 지척에 보인다. ‘어머니의 산’이라는 이 모악산을 바라다보면서, 남계 김진은 어떤 생각을 라며 살았을까? 벼슬도 마다한 남계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고목과 어우러진 남계정, 운치 있어

늦은 가을 날 찾은 남계정. 계단 앞에 느티나무 고목은 이미 앞을 다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남계정 앞에 선 작은 산죽들은 푸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남계의 곧은 성격을 알려주는 듯하다. 볼품이 없다고 한다.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따듯한 정자이다, 남계정은 그렇게 모악을 바라다보며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다.

남계 김진은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남계정이란 작은 정자를 하나를 지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오직 아이들의 교육에만 전념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정자는 그래서 더욱 따스함이 배어있다. 남들은 벼슬을 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벌이는데, 남계정의 주인은 초연히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이런 남계 김진이 바보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깊은 속을 아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을 듯하다. 남계 김진은 조선 중엽의 유학자다. ‘남계(南溪)’는 그의 호로 자는 ‘이온(李溫)’이며, 본관은 통천이다.

김진의 검소한 성품이 보이는 정자

김진은 조선조 중종 22년인 152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했다는 김진은 25세에 초급과거시험에 급제를 하여 생원이 되었다. 선조 7년인 1574년에는 합천에서 훈도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오직 학문과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이 남계정은 김진이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지은 정자이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훈장을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남계정은 선조 13년인 1580년에 처음으로 지었다. 조선조 헌종 14년인 1673년과 1859년에 두 차례 중수를 하였다. 남계정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고목을 비켜 서 계단을 오른다. 정자는 붉은 벽돌로 담을 둘러쌓고, 안으로 들어가는 담장에 걸린 문은 잠겨 있다. 아마 후손들이 정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잠을 통을 채운 듯하다. 정자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며, 앞쪽으로는 마루가 연결이 되어있다. 정자 안에는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 등이 김진의 높은 덕을 기리는 글들이 걸려있다.


그저 초야에 묻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생을 받친 남계. 벼슬길도 마다하고 이곳에 들어와 생을 마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악의 정상에 걸린 구름 한 덩이가 세월의 덧없음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잎이 떨어진 고목나무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린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인 명재고택. 이 집은 한 마디로 우리나라 한옥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고택이다. 조선조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상류 양반가의 표본이 되는 집으이다. 안채는 비튼 ㄷ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튼 ㅁ자 형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잘 정리된 앞마당에서 풍기는 멋

명재고택을 찾아가면 우선 집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바르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집 앞에는 네모나게 조성한 연못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샘이 있다. 주변 정리가 잘 된 앞마당은 너른 공지가 마련되어 있어, 주차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사랑채 옆으로는 장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색다른 운치를 더해준다. 아마도 곁에 있는 집에서 전통 장이라도 생산을 하는가 보다.



사랑채의 우측 계단 위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당 역시 장독들과 잘 어울린다. 사당은 사랑채 우측으로도 오를 수가 있지만, 안채에서도 일각문을 통해 오를 수 있도록 동선을 조성하였다. 아마 사당에 제라도 올릴 경우, 부녀자들이 손쉽게 사당을 오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 같다

열린 공간으로 조성한 명재고택의 사랑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열려 있다고 한다. 앞으로 펼쳐지는 마을을 향해 언제나 개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증 선생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재고택의 주인인 윤증 선생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자인, 호는 명재 혹은 유봉이다. 김집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송시열, 윤휴, 이유태 등 당대의 명현들과 함께 교분을 쌓았다.



윤증 선생은 등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면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윤증 선생은 이러한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실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객을 해보아도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이런 일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증 선생은 마을사람들과 늘 함께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두 단의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정면 네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가운데 두 칸은 온돌을 놓고, 양편 두 칸은 마루방으로 조성하였다. 바라보면서 좌측은 높이 올린 누마루 방으로 조성하였는데, 사랑채 온돌방 앞에 놓인 툇마루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돌출을 시켰다. 우측의 마루는 시원하게 개방을 해놓았다.

옆을 판자문으로 마감을 한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놀랍다.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계단식으로 꾸민 건물에 툇마루를 통해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까지 이어진다. 사랑채를 보면서 좌측으로는 문간채로 이어지며,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누마루 방은 문을 들어 올려 완전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한옥의 미학을 대표한다는 명재고택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대청 양편에 고방을 둔 안채의 겸손함

고방이란 고택에서 잡다한 살림살이나 곡식 등, 다양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작은 방이다.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고방 대신 광이라 불리는 창고를 여러 곳에 배치하였으나, 규모가 작은 집에서는 안방과 부엌 가까이에 고방을 설치하고 채광과 환기가 잘 되도록 하였다. 명재고택의 색다른 점은 바로 이러한 고방을 대청 양편에 두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꽤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명재고택에는 광채가 따로 없다. 이것은 윤증 선생이 허세를 부리기보다는, 주변에 민초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채는 북쪽중앙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양편에 날개채를 달아냈다. 대청 양편 뒤쪽에는 양편에 고방을 두고, 대청의 서쪽에는 두 칸의 안방과 한 칸의 윗방을 두고 있다. 남쪽으로는 두 칸 넓은 부엌과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다. 그리고 대청 동쪽으로는 건넌방과 윗방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안채의 ㄷ자와 문간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나열이 되었다.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 앞면에는 나무를 위로 질러 시렁을 낸 것도 명재고택의 특징이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그래도 조심스러운 집안 여인네들의 동선을 생각해, 이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꾸민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휴일이 되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명재고택. 아마도 이 고택에서 느낄 수 있는 선생의 겸손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배어있는 명재고택을 쉽게 뒤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