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이곳에는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정자 하나거 서 있다. 정자의 이름은 ‘삼기정’이라 하는데, 삼기정은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짓고, 삼기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지은 이는 하연으로 전해진다. 최득지는 세종 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당시 정몽주의 문인이었던 하연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는 도중, 고산읍에 들렀다가 소풍을 나간 곳이 삼기리였다.

 

하연은 이곳이 앞으로 흐르는 만경강과 기암, 그리고 송림이 우거진 것을 보고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여 ‘삼기(三奇)’ 라 송판에 써주었다.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정자에 거니 이것이 삼기정이다. 지금의 삼기리라는 명칭도 이 정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율헌 유허지에 서 있는 삼기정

 

삼기정을 축조한 최득지(고려 우왕 5년, 1379~ 단종3년, 1455년)는 본관은 전주, 호는 율헌이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 장흥교수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환갑을 맞이하던 세종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현 삼기정 건물의 상량에는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三年庚午重建世宗己未創建'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고산현감 최득지가 삼기정을 축조한 것은 세종21년인 1439년이고, 그 뒤 오랜 세월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 오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처음에 이 삼기정을 세운지 벌써 520년이나 지났다.

 

삼기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씩이다. 정자 안에는 하연의 ‘삼기정기문’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이곳의 풍광에 얼마나 빠졌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고산현 동쪽 오리쯤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으니 절벽이 깎아질렀고 그 아래에는 긴 내가 맑게 굽어 흐르고 위에는 노송이 울창하여 푸르렀다. 그 서쪽에는 평평한 들이 펼쳐 있다. 임인년(1422년) 봄에 나는 고산읍에 간 일이 있어 이 언덕에 오르게 되었다. 연하 초목이 모두 아름답게 내 눈앞에 깔려 있는데 수석과 송림이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이에 삼기라 이름 하여 깎은 나무에 글씨를 써주었더니 이에 현감 최득지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가 처음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써 그러한 뜻에서 사양할 수 없이 되었다.

 

생각하건대 사람의 마음은 물건을 보고 감동되는 것으로 눈을 달리하여 보게 된 그 느낌은 더욱 간절했다. 맑은 물을 보게 되니 나의 천부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바위가 엄엄한 것을 보니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를 더욱 높게 하여 이 언덕의 세 가지 물건이야말로 어찌 경치가 아름답거나 찌는 더위에 재미있게 논다는 것 뿐이리요.

 

내가 다른 사람과 소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뒷날에 선비들이 이 언덕에 오르면 느끼고 뜻을 두게 될 것으로 생각 할진대 마음을 삼가 하고 뜻을 길러내는 기회가 족히 되어야 할지라. 또한 목욕을 하고 풍월을 하는 행락도 있을 것으로 전날에 내가 이름을 지은 뜻이 거의 같을지다.」

 

 

 

옛 선조의 마음을 읽어보다

 

정자에 걸려있는 삼기정이란 편액은 강암 송성용이 썼다고 한다. 작은 정자에 올라 주변을 들러본다. 옛날 선조가 느낀 삼기는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곳의 풍광은 아직 옛 모습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바위가 있어, 아마도 과거에는 이곳이 꽤 큰 바위 등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크지 않은 정자 마루에 앉아 선조의 숨결을 느껴본다. 아주 오래 전 내 선대인 하연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이렇게 호흡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만, 이다음에 또 누군가 나의 후대도 우연찮은 기회에, 이렇게 나를 기억할 수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옛 말씀에 ‘후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라’고 하신 것인지. 오늘 또 삼기정이란 작은 정자에서 또 하나의 공부를 한다.


 

하연(1376∼1453)

선조 하연은 경상도 진주(지금의 산청)에서 태어났다. 고려왕조 최후의 충신이었던 정몽주(1337∼1392)로부터 학문을 사사한 하연은, 조선 태조 때인 1396년 과거시험 병과 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많은 요직을 거친 하연은 태종 이방원 시절에는 ‘사헌부 간관(諫官)’으로 일하면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여 임금이 직접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로 인정받은 관료였다.

 

1423년 대사헌, 1425년 경상도관찰사, 143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1436년 예조와 이조 판서를 거쳤다. 70세인 1445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영의정 황희(1363∼1452), 좌의정 신개(1374∼1446)와 함께 ‘조선의 빛나는 삼정승 시대’를 연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세자 섭정을 하고 있던 문종의 스승으로도 활동한 하연은, 좌의정을 거쳐 세종 39년인 1449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일기예보에서는 연일 ‘찜통더위’라는 표현을 한다. 그만큼 올 여름은 무덥고 더위도 길다고 한다.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어주면 좀 시원해질 듯도 하건만, 오는가 하면 어느새 멈춰버린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참 견딜 수가 없는 무더위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7월 29일 오후 2시. 30도를 넘는 기온에 참을 수가 없다. 차라리 이런 날은 땀을 흘리고 목물이라도 한바탕 하면 덜 더울 듯하다. 광교산으로 향했다. 어차피 바닷가로 갈 수가 없다면,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에 발이라도 담구는 것이 좋을 듯해서이다.

 

 

 

광교산은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수원의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시가지를 품고 있는 수원의 대표적인 산이다.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명명되었다고 전해지는 수원의 진산이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수십만의 등산객이 이용한다는 광교산은, 자연이 살아있는 곳으로 숲과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는 광교산으로 피서 간다.’

 

광교산으로 오르는 상광교 버스종점서부터, 계곡에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위로 오르면서 앉을만한 곳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더러는 숲에 텐트를 치고 본격적인 피서를 즐기기도 한다. 조리를 할 수 없다는 것 외에는, 무엇 하나 불편함이 없는 곳이다. 깔 자리를 옆에 낀 사람들이 자꾸만 위로 오른다.

 

 

 

 

 계곡에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맑은 물과 숲이 있어 피서에는 제격이라고

 

노루목으로 오르는 길가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도,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담소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참 행복한 표정들이 보인다.

 

“시원한가요?”

 

묻지 않아도 될 만한 말이다. 하지만 얼마나 행복한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물속에 발을 담구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정말 천국입니다. 내려오셔서 발 좀 담가보세요. 내장까지 시원합니다.”

“어디서 오셨나요?"

“요 아래 연무동에서 자리 하나 갖고 올라왔어요.”

“피서를 갈 생각은 없으신가 봐요?”

“길 막히고 바가지 쓰고, 거기다가 덥고 끈끈한 곳이 해수욕장인데 왜 그런 곳을 갑니까? 저희들은 걸어서 올라올 수 있는 거리에 이 산이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돈 안 들고 정말 좋은 피서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여름엔 바다 냄새라도 좀 맡아야 하지 않나요?”

“우리는 매년 여기 와서 한 여름을 보내고는 해요. 아이들 고생도 안 시키고 깨끗한 물과 숲이 있어서 정말 좋아요. 내가 수원에 산다는 것, 그리고 광교산 가까이 산다는 것이 정말 행복합니다.”

 

광교산 아래 연무동에 산다는 이아무개(남, 43세)는 입이 침이 마르도록 광교산 자랑을 한다. 아마도 막히는 도로에서 짜증을 내기보다는, 이렇게 시원한 곳에서 한 여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일 것이란 생각이다.

 

 

 

노무목으로 오르는 길목의 숲길(위) 자리 한 장이면 올 여름 피서는 끝이라는 사람들도 계곡을 찾아 노루목으로 오른다(아래)

 

나도 자리 하나 들고 피서 나설까?

 

노루목으로 오르는 길을 조금 더 걸어본다. 숲속의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연일 땀을 흘리며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에, 여기저기 땀띠가 돋았다. 그저 맑고 찬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돗자리 한 장 들고 노루목을 향해 걷는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조금 더 올라가면 바위를 따라 흐르는 물이 모여 있는 작은 소가 있어요. 옆에는 바위도 있고요. 거기다가 자리 펴고 책이나 보려고요.“

“올 여름은 어디 안가세요?”

“이곳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요. 우린 광교산으로 피서갑니다.”

 

환하게 웃는 그 모습에서 정말로 광교산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맑은 계곡물과 우거진 숲이 있는 곳. 광교산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수원사람들. 올 여름에는 나도 이곳에 명당자리 하나 마련해야겠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에 소재한 삼막사. 삼막사의 내력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인 ‘삼막사사적비’에 보면, 신라 문무왕 17년인 5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도 이때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사적비는 조선조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만큼 삼막사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이라는 것이다.

 

비문에는 신라의 원효(617-686)등이 창건하고 도선국사(827-898)가 중건하여 ‘관음사’라고 개칭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고려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고, 여말 선초에는 나옹, 무학 등의 고승이 오래 머물면서 선풍을 드날린 고찰이라는 것이다. 그 뒤 조선 태조 때 왕명으로 중수되었다는 등의 사실이 적혀있다.

 

 

사적비를 지나 오른 산신각

 

사적비는 삼막사 경내를 들어서면 좌측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 위쪽에 자리한다. 이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를 직접 깎아서 조성한 돌계단이 있다. 삼막사 인근은 바위가 많은 곳으로, 삼막사에는 남녀근석과 마애불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사적비를 촬영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곁을 지나 위로 올라간다. 그 위편에는 전각이 보이지를 않는데, 바위에 대고 수없이 절을 한다.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산 쪽을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았다.

 

밑에 산신각이란 이정표는 있는데 정작 위편에 전각이 보이지를 않아 의아해했는데, 계단 위를 올라서는 순간 그 모든 의문이 풀렸다. 바로 바위를 안으로 깊이 파내고 그 곳에 산신을 새겨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 전각은 바로 이렇게 바위에 산신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기분 좋은 답사

 

삼막사 입구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날 오른다고 생각을 하면, 처음부터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가파른 오르막길을 물도 없이 한 시간 넘게 걸어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 답사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올라가 만난 절 삼막사. 전통사찰인 삼막사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기도 하지만, 그동안 여러 해 찾아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올 들어 가장 기온이 높다는 날 올랐으니,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을 실감한 답사 길이다.

 

그렇게 찾아 올라간 삼막사. 저 멀리 까마득하게 마을이 보인다. 거의 산 정상부에 절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곡 밑에서 치밀어 오르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살 것만 같다. 시원한 물을 한 대접 마시고 올라가 만난 사적비와 산신각이다.

 

 

 

이 산신각 명물 되겠네.

 

삼막사 바위암벽 산신각은 바위면을 안으로 네모나게 깊게 파 들어가, 그 안에 산신과 호랑이 동자상 등을 돋을새김 하였다. 양 편에는 기둥을 새겨 놓았으며, 바위를 보고 우측 위편에는 구름을 새겨 놓았다. 처음에는 산신이 타고 앉은 호랑이를 보고 한참이나 속으로 웃었다. 산신님이 들었으면 노했을 듯도 하다.

 

 

 

호랑이가 어딘지 모르게 옛 만화에 나오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앙편에 새겨 놓은 동자상도 조금은 어색하다. 아마도 지금은 기계를 갖고 조형을 했을 텐데, 일부러 옛 분위기를 만드느라 민화에 나오는 모습으로 조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몇 사람인가가 또 올라와 절을 한다. 이 더위에 그늘도 없는 곳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치성을 드려서 덕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 그래도 이런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이 산신각에도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고, 그 후에는 명물이 될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 온 바람 한 점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전주 남고산성에 가면 정몽주의 암각서가 있다. 푯말에는 ‘만경대 암각서’라고 이정표가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남고산성 안에 있는 남고사 조금 못 미처 길 가에 서 있다. 50여m 정도 바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남고산성이 늘어서 있고, 상벽 바로 안 바위에 적혀져 있는 글이다. 이 근처는 지형으로 보아 남고산성의 두 곳의 장대 중 한 곳인 남장대 인근으로 보인다. 이곳에 왜 정몽주의 시가 암각서로 남아 있는 것일까?

 

이성계의 잔치에 화가나 말을 달린 정몽주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9월.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른다. 이곳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환영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시 종사관이 되어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정몽주(1337 ~ 1392)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오른다. 남고산성에는 남인문지 근처에 천경대가 있고, 남고사 인근에 만경대가 있다. 그리고 남고사 뒤편 산 정상부근에는 억경대가 자리하고 있다.

 

말을 달려 이곳까지 온 정몽주. 선죽교에서 방원의 철퇴에 맞아 숨이 지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이 변하지 않았던 충신답게, 스스로 고려를 생각하면서 근심을 이어간다.

 

 

千仞崗頭石逕橫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登臨使我不勝情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근심이여

靑山隱約夫餘國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서하던 부여국은

黃葉檳紛百濟城 누른 잎은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九月高風愁客子 구월의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짙은데

百年豪氣誤書生 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 하늘가 해는 지고 뜬 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矯首無由望玉京 하염없이 고개들아 송도만 바라보네

 

정몽주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 시구이다. 이곳 만경대에서 송도를 근심하던 정몽주. 이렇게 글을 남겨놓고 개선장군이 되어 당당하게 송도로 돌아가는 이성계와 함께 이곳을 떠났다.

 

 

 

김의수가 각자한 정몽주의 글

 

당시 시를 지은 정몽주가 이곳 만경대 바위에 각자를 한 것은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영조 22년인 1742년 진장인 김의수가 각자를 한 것이다. 예전에는 바위 앞에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많아 암각서를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을 정리하고 철책을 둘러놓았다.

 

바위를 어렵게 내려가 만경대라고 음각을 한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만경대라는 글씨는 알아볼 수가 있는데, 그 내용은 마모가 되어 글씨조차 판독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다만 글 말미에 보니 각자가 된 글씨보다 조금 크게 병인년에 진장 김의수가 각자를 했다는 글이 보인다. 진장 김의수는 왜 정몽주의 이 길을 이곳 만경대 바위에 새겨 넣었을까? 진장이란 조선 인조 때 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진영의 장관을 말한다.

 

아마 진장 김의수는 정몽주의 불사이군의 충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시대를 뛰어넘어 300년 가까이 지난 다음이지만, 김의수는 그러한 글을 이곳에 각자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충심을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수많은 세월이 지난 각자마저 흐릿하지만 정몽주의 충심과, 그 충심을 아는 진장 김외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영웅의 교감은 세월을 뛰어넘는 것인지.


며칠 간 속초를 다녀왔습니다. 피로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그저 아무 생각없이 소나무 숲길도 걷고, 바닷바람도 쏘여가면서. 그제(11월 14일) 오후 4시가 넘어 바닷길로 나갔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라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을 보기 위해. 속초 외옹치와 영금정 일대를 돌아보면, 파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치면 영금정엔 폭포가 생긴다.

속초 영금정을 가 보신분들은 한 번 정도는 보았을 장면입니다. 바로 영금정 앞에 놓인 바위를 타고넘는 파도들이 마치 폭포처럼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을. 난 늘 그것을 '영금정 폭포'라고 말을 합니다. 각양각색으로 폭포를 만들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내는 파도. 이런 다른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것 역시 동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들입니다.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기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달려가는 곳 영금정. 14일엔 파도가 그리 높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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